857__ 몸바사 출장. 웰에이징과 버킷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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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7__몸바사 출장- 웰에이징과 버킷리스트----8ok

뚱보강사 이기성

 

 

     857__ 몸바사 출장. 웰에이징과 버킷리스트

 

 

삶을 능동적으로 마무리하고, 죽음을 미리 준비한다는 뜻의 웰에이징(Well-aging)은 웰다잉(Well-Dying)이라고도 한다. '웰에이징'시대액티브시니어 되는 방법 10가지... [헬스조선] 이보람 기자가 보도했다(2018130). 단순히 오래 사는 '장수'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건강하게 잘 사는 장수가 중요해졌다. 그러면서 등장한 개념이 웰에이징(Well-aging)이다.

 

노화를 피할 수 없다면 건강하게 잘 늙어가자는 의미이다. 그 중심에 '액티브시니어'가 있다. 액티브시니어는 시간적·경제적 여유를 기반으로 소비 생활과 여가를 즐기는 50~60대를 말한다. 실제로는 젊게 사는 70~80대까지 확대된다. 이들은 외모나 건강관리 등에 관심이 많아, 자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문화 활동을 즐긴다는 점에서 기존 실버세대(55세 이상을 이르는 말)와 차이가 있다. 액티브시니어가 되면, 웰에이징은 저절로 따라온다.

 

표정을 밝게, 웃음을 달고 살라

불만과 잔소리를 줄여라

화를 길들여라(줄여라)

목소리는 가볍게, 약간 높은 톤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하라

늙은이 냄새를 줄여라

주변을 청결하게 정돈하라

밝은 색깔의 옷을 입으라

적당한 운동은 필수다

몸과 머리를 많이 쓰라

 

 

     회초리 매질, 왜 맞았나?

 

웰다잉 특강 시간에 뚱보강사가 지금까지 지내온 일들을 생각해보니, 억울한 일들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시험 점수가 나오면 100점이 아니면, 점당 몇 대씩 회초리를 맞았다. 98점으로 반에서 수학 1등을 해도 2점만큼 맞았다. 그것도 내가 스스로 미리 준비해놓은 회초리로.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님의 회초리를 맞고 아파하지 않고, ‘웃었더니그 다음부터 회초리 매질이 끝났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친한 친구네 가서 놀다가 늦으면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주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밤 12시 통행금지 시간 전까지는 집에 와야 했다. 1964년 대학교 1학년 학생 때는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계엄령이 선포되어서(6.3 사태) 저녁 7시가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1964년도는 서울대학생이면 가정교사로 인기가 높았다. 보수도 많았고... 그런데 집에서 못하게 했다. 정말 가정교사를 해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입주가정교사 자리도 있었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버킷리스트를 쓰려고, 지나온 시간을 회상해보니... 너무 억울하다. 왜 나는 당시에 이를 벗어나지 못했을까? 착한 아들이라는 소리가 그렇게 중요했나?

 

대학생이 되자, 공식적으로 술 먹을 기회가 생긴다. 신입생 환영회 등 공적인 자리라, 참석은 하지만 술은 안 먹었다. 술 먹는 친구들은 다 불효자로 알았다. 일부 친구들은 내가 알콜 알레르기 병이 있는 줄 알았다. 부모님 말 들어서 술을 안 먹으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담배도 마찬가지다. 당시에 나는 친구들이 이상했다. 저 친구들은 왜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술과 담배를 할까?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고등학교 때 기계체조반, 역도반 친구들과 학교 앞 안국동 4거리 만두집에서 찐빵이나 찐만두 20, 30개 먹기 내기는 했어도, 담배를 피거나 술은 안 먹었다. 담배는 연기가 싫어 지금도 싫어하나, 술은 맛을 알고 싶고, 술취한 기분과 술취한 분위를 알고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오고, 아버지 회사에 출근해서, 영업상 양주를 접대로 마실 수밖에 없을 때도 있었지만, 사전에 술이 안 취하는 약을 먹고, 새벽 2시까지 술대접을 하고 통금시간 넘어서, 요정에서 태워주는 경찰 백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다. 온몸에서 벌겋게 열이 나니, 등과 배에 냉찜질을 하고, 고생고생하다가 아침에 꿀물을 먹고 회사에 출근했다. ,고등학교 6년간 개근상을 받은 몸이니, 지각 안 하는 것이 당연했다.

 

고등학교 동창 공무원 친구들이 자기네 공무원들이 마신 술값 청구서를 회사로 보내오면 한,두 번은 내돈으로 결재해주지만, 상습적으로 찾아오는 술집 총각들의 청구서는 아버지가 결재해주지 말라고(사실은 재무상무가) 했다고 경리부서에서, 그냥 돌려보냈다. 일부 고등학교 동창, 대학 동창 공무원들은 사업하는 놈이 쩨쩨하게, 술값도 안 내준다, 마침 회사업무로 관계부처에 서류가 들어가면 당연히 승인이 나는 건인데도, 일부러 결재를 안 하고, 엿먹이고 트집잡고 시간을 질질 끈다. 술값 100만 원이면 무사통과할 서류가 계장 결재가 안 나고, 한 달 이상 지체되자, 아버지편을 들어 내가 결재 올렸던 공무원 술값 결재를 막았던 총무상무, 재무상무 들이 똥끝이 타서 과장 공무원 집을 찾아가도, 공무원들은 자기네 계장 편을 들며 결재를 안 해주었다.

 

외국에서 자재를 수입해와서, 부산의 조선소에서 선박을 건조해야 하는데, 부품 자재의 수입승인서(import approval, Import License) 결재를 안 해주고,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담당 과장의 대학 후배인 뚱보강사가 나서서, 과장이 좋아하는 스웨덴제 등산기구를 사들고 과장집을 찾아가서, 먼저 번에 우리 상무가 알지도 못하고, 술값을 몇 번 결재 안 시켜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당시의 고급 등산기구는 지금 골프채보다 더 비쌌다.

 

회장 아버지와 장남 아들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일제 강점기 공무원 출신인 상무, 전무 들의 견제와 모함 때문에, 아버지가 속아 넘어가서 아들이 술을 좋아하는 줄로 의심하고, 술값 결재를 막는데 찬성하셨던 아버지.

 

뚱보강사는 출판사에서 일했는데, 우리 회사가 무역회사와 원양회사를 인수해서, 해외시장 조사차 아프리카 기지가 있는 케냐 몸바사 항구에 출장을 갔다. 몸바사 인구는 약 90만 명. 1970년대 뚱보강사네 몸바사 사무실이 있던 곳은 서쪽의 킬린디니 로드. 초저온 냉동창고가 있는 몸바사 항구는 반쪽은 백만장자의 휴가지이고, 나머지 반쪽은 원양어선이 들어오는 어항(漁港)이다. 5~6개월에 한 번씩 항구에 들러, 그간 잡은 영하 45~50도로 급속 냉동된 참치를 내려놓고, 연료와 낚시용 어구(longlining)를 보충하고, 6개월 치 쌀과 고기와 채소를 싣는다(시꼬미 작업). 김치는 부산항을 출발할 때, 30개월치, 엄청난 양을 싣고 간다.

 

1970년대 당시 국내 참치잡이 원양어선은 보통 349톤급의 중고 일본 배를 수입한 것이 많았는데, 본사는 그것보다 4배나 큰 1200톤급 배도 있었다. 참치를 잡아서 영하 50도의 냉동 창고에 가득 채운 배가 아프리카 동부 케냐의 몸바사 항구로 돌아온다. 배를 점검하고, 부식되거나 선체에 상처난 곳을 수리하고, 다시 6개월간 작업할 동안 먹을 쌀과 부식과 물(청수)을 싣고, 참치를 낚을 미끼용 꽁치를 실을 시간이 필요하다. 이 며칠간 선원들은 술도 먹고 연애도 하느라고 바쁘다.


 

     시꼬미 비용 66만 불 과다 청구

 

시꼬미는 쌀, 부식품, 상비약, 기름 등 배에서 필요한 것 일체를 이르는 말이다. 뚱보강사가 아프리카 지사에 업무 감독차 출장을 가보니, 선박 한 척당 1항차(one voyage, 5~6개월 소요) 당 필요한 어구와 식량, 의료품 등 시꼬미 비용은 현지 시세로 2만 불 정도인데, 일본 대리점에서 매번 본사에 청구하는 금액은 4만 불에서 5만 불이었다. 거기에 대리점에서 미리 구매하는 수수료 3%가 추가되니, 선박 1척당 6개월마다 2만 불에서 3만 불씩 비싸게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배가 11척이니까 1항차에 22만 불에서 33만 불을 더 청구한 것이고, 1년에 2항차 정도니까 1년에 총 44만 불에서 66만 불을 더 청구하고, 비싸게 청구한 금액 전부를 어획판매 대금에서 결재해간 것이다. 초과해서 지불된 물품대금은 당시 화폐 가치로 계산하면, 1년에 66천만 원(66만 불)이었다.

 

뚱보강사가 현지 시장에서 확인한 금액이 2만 불 정도인데, 2배가 넘는 4만 불에서 5만 불을 청구했다니... 일본 대리점은 우리 회사 배 한 척당 6개월마다 2만 불에서 3만 불씩 더 가져간 것이다.

 

 

     저울속이기(저울눈금 속이기)

 

또 한 가지 수법... 어선의 냉동창고에 가득 차도록 참치를 잡아서, 만선으로 5~6개월 만에 아프리카 항구에 들어오면, 남자라면 누구나 딱딱한 땅을 밟고서, 술집으로 달려가고 싶기 마련이다. 물론 1등항해사나 선장이 영하 50도를 유지하는 배의 냉동창고에서 바로 꺼낸 참치를 저울에다 무게 재는 것을 감시해야 하는데, 처음 몇 분만 저울에 재는 것을 보고서는 술 먹으러, 여자를 보러, 배를 떠나서 육지로 상륙한다. 본사에서 출장 온 뚱보강사가 배에 남아서, 대리점측이 재는 저울 눈금을 보니 100kg인데 90kg으로, 150kg인데 135kg으로 10kg 이상 줄여서 장부에 기록한다. 냉동참치를 모두 다시 저울로 재고 확인하니까, 110ton()이었는데 120ton으로 늘었다. 저울눈금 속이기 10ton1년에 두 항차이니, 1척당 1년에 20ton의 참치값을 손해보았고, 우리 회사 배가 모두 11척이니 220톤의 참치어획대금을 손해 본 것이다. 시세가 톤 당 1000불이라면 우리 회사는 1년에 22만 불을 손해 본 것이다.

 

20246월 달러 환율은 1389. 해외기지 조사차 아프리카 케냐로 출장 간 것이 1974년이니까 딱 50년 전. 당시 달러에 해당되는 한국 돈 가치를 달러당 1000원으로 계산하면, 우리 회사는 1년에 일본대리점에게 손해를 본 어획대금은 22천만 원(22만 불)이고, 과도하게 지불된 물품대금은 1년에 66천만 원(66만 불)이었다. 매년 88천만 원(88만 불)씩 일본대리점에게 초과 지급되었던 것이다.

 

유명한 세계적인 냉동어류판매 대리점으로는 미국의 스타키스트(StarKist)와 밴캠프(Van Camp), 일본의 다이요(大洋)와 도쇼구(東食) 회사가 있다. 한국 원양어업회사에서는 열심히 참치를 잡았지만, 외국 대형 대리점회사들에게 국제협정수수료인 3% 커미션 이외에, 그보다 몇 배나 되는 금액을 착취당하고 있었다. 일부 유럽 대리점에서는 6%의 커미션을 요구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당시에는 수산개발공사나 우리 회사처럼 아프리카나 대서양 현지에 지사를 설치한 곳은 거의 없었기에, 참치 어가(魚価) 및 시꼬미 대금을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 한국 회사가 많았다. , 국내 일부 원양회사 중에는 실제 주인은 일본회사인데, 국내 원양회사의 대표 이름만 한국 사람으로 등록한 회사들도 있었다. 원래 중국에서 유행하던 형태였는데, 한국에도 외국자본과 결탁하여 자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토착자본인 매판자본(comprador capital, 買辦資本)이 있었다. 원래는 외국자본과 자국의 시장을 중개하는 무역상인 또는 외국상사의 대리업자의 자본을 뜻하였는데, 예속자본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석유파동(오일쇼크)이 일어나기 전이라, 기름값이 싸고, 냉동어류값이 좋아서, 한국 회사들이 일본이나 미국 대리점회사에게 착취당해도 남는 돈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1972년 박정희 정권의 8.3사채동결 긴급조치와 원가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기름값이 1973~1974년에 제1차 석유파동, 1979년에 제2차 석유파동이 나고부터는 한국의 원양어업계에서 자본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경영하지 못하는 회사들은 도태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동 석유가격이 2.5달러에서 15달러로 껑충 뛴 것이, 한국 원양어업계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한국 본사 직원 항구에서 내쫓기

 

해외 판매대리점회사들은 초저온 냉동창고가 있는 아프리카 서부 대서양의 라스팔마스, 테네리페, 아프리카 동부 인도양의 몸바사에 한국 원양회사의 지사설치를 극구 방해했다. 한국 지사가 없어야, 시꼬미 대금(어구 및 식량 대금)을 실제보다 비싸게 청구하고, 냉동창고에 하역하는 냉동참치의 무게를 달 때 저울을 속이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 본사에서는 선장이나 1등항해사에게 시꼬미 대금의 감독과 저울 눈금 감시를 위임하지만, 이건 현지 상황을 모르는 완전 탁상 행정이었다. 한국의 원양회사 본사에서는 회사가 원양어선을 준비하고, 회사와 선박측(선장과 선원 전부)이 경비를 제외한 매출금액을 7:3으로 분배하기로 계약했으니까, 선장이나 항해사들이 알아서 챙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거의 죽다살아올 정도로 힘든 적도지방의 6개월 참치잡이 작업 후, 항구에 도착한 선장과 선원의 컨디션은 육상에서 근무하는 평상인의 컨디션과는 전혀 다르다.

 

실제로 뜨거운 적도지방의 바다에서 여자도 없이, 5~6개월 흔들리는 배의 갑판 위에서 멀미와 싸우며, 참치를 잡는 인간의 신체는 참을 수 있는 극도의 한계까지 이른 것이다. 힘든 것을 참고, 견디고 악착같이 작업을 하여 참치를 잡고, 영하 50도의 초저온 냉동 어창에 가득 채우고, 울렁거리지 않는 땅바닥이 있는 항구에 들어와서, 바로 상륙하여 단단한 땅을 밟고서 술과 여자를 만나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한 요구인 것이다. 그런데 상륙하지 말고, 배에서 냉동 참치를 육상 냉동 창고에 옮길 때까지 기다리라니... 현지에 와보면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뚱보강사도 선박 기관사 자격증을 따고, 직접 부산에서 회사 원양어선의 기관실에서 일하며, 시모노세끼까지 가서, 참치의 미끼(베이트)로 줄 냉동꽁치를 구입하고, 귀국시에는 기관사 자격증을 가진 기관사가 아니라, 여행객 여권으로 비행기로 서울로 왔다. 몸바사에서도 회사 어선을 탄 경험도 있다. 아프리카 몸바사와 대서양 테네리페, 스리랑카의 골(Galle), 말레이시아 페낭(Penang Island) 등 어항에서 몇 달간 지낸 경험은, 한국에 귀국하여서 본사에서, 인도양의 배에서 직접 보내는 선장과 기관장의 전보 내용을 글자뿐만 아니라, 전보를 보낸 선장, 기관장의 속마음과 어선의 실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인도양 몸바사의 일본인 지사장과 대리점 회사의 부장이 힘을 합쳐서, 회장의 친아들인 뚱보강사를 몸바사에서 하루라도 빨리 내쫓으려고, 우리 회사에 수차례에 걸쳐 모함 편지를 보낸 일, 스페인어에 능통하고 현지 사정에 밝은 대서양 그랑까나리아 제도(Las Islas Canarias, The Canary Islands)의 라스팔마스와 테네리페 주재 수산개발공사의 지사장을 내쫓으려고, 외국 대리점 회사에서 수산개발공사 상급 간부를 뇌물로 포섭하여, 결국 지사장에게 누명을 씌워서 내쫓은 일... 둘 다 같은 맥락이다. 일본이건 미국이건 대리점 회사들은 이윤추구를 위해, 못하는 게 없다는 걸 뚱보강사는 배웠다.

 

일본 몸바사 대리점이 청구했던 항차당 시꼬미 금액이 4~5만 불이었는데, 뚱보강사가 1970년 현지에서 확인한 시꼬미 금액은 몸바사 시장에서 2만 불이면 충분하였다. 이 증거를 확보하려고, 뚱보강사가 개인적으로 쓰겠다고 2만 불을 가불(cash advance, 현금 선지급)을 신청했더니, 일본 몸바사 대리점장(과장급)이 본사 부장에게 안 주게 해달라고결재를 올렸다. 내가 이 현금 선지급은 계약서에 있는 내용이라고 말했는데도, 주기가 싫으니까, 일본 본사에 결재를 올렸다. 2만 불로 몸바사 항구에 들어온 우리 회사 배의 어구, 식료품 등 시꼬미를 전부다 하고, 영수증을 챙겼다. 나중에 알고보니, 일본 본사 부장이 회장(아버지)에게 아드님이 젊어서 술과 여자와 골프를 즐기느라고, 2만 불이라는 큰 돈을 현금으로 가불을 했는데”, 젊음은 한 철이니까 그럴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슬쩍 아들을 빨리 한국으로 귀국시키라고(불러들이라고) 편지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 아버님은 술도 못 먹는 아들 뚱보강사에게 연희골프장에서 1964년 대학 1학년 때부터 골프를 가르쳐주셨는데... 잔디도 없고, 운동장 같은 아프리카 골프장에서 롱기스트 플레이어인 아들이 골프를 치겠는가? 일본 부장 편지에 회장님 아들이 술, 여자, 골프를 너무 즐긴다고 했다는데, 아버님은 나중에 원양어업을 접을 때 가서야, 아들 뚱보강사에게 편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버킷리스트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출판사 시절, 무역회사와 원양회사 경영 시절... 한참 동안 과거 회상에 잠겨 있던, 뚱보강사가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보았다.

Fat professor's Bucket List

1. I want to go to the university abroad which I couldn't accomplish when I was young.

2. Developing Korean fonts to be used by both North and South Korea.

3. Develop a brand new publishing system.

4. I want to give lectures or broadcasts.

5. I want to go to Iceland, Greenland, or a place where the Eskimos live.

6. I want to learn scuba dive.

7. I want to continue studying and researching.

8. I want to learn billiards (4-ball play).

9. I want to do a lot of spiritual meditation.

10. I want to be a traditional Korean Medicine doctor (uses both Korean and Western medicine).

1. 젊었을 때 못 이룬 유학을 가고 싶다. ]

2. 한글 활자(폰트) 개발하기 (남북한용)

3. 새로운 출판시스템을 개발하기

4. 강의나 방송을 하고 싶다.

5. 아이슬랜드, 그린랜드, 에스키모가 사는 곳을 가고 싶다.

6.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고 싶다.

7. 계속 공부하며, 연구하며 살고 싶다.

8. 당구(4)를 배우고 싶다.

9. 영적인 명상을 많이 하고 싶다.

10. 한의사가 되고 싶다(한의학을 서양식과 합쳐서 과학적으로 발전시키는).

 

 

[참고] [헬스조선] 이보람 기자, 2018.01.30.

https://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30/2018013001475.html

[참고] ‘#203_ 택시 기사와 개인택시 이야기’, 뚱보강사, 2019.12.26., 조회 182.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636153

[참고] ‘#194 _영국 신사와 뇌물쌀’, 뚱보강사, 2019.10.22., 조회 254.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629310

[참고] ‘#153_뚱보강사의 취임사’, 뚱보강사, 2016.03.07., 조회 263.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291585

[참고] ‘이기성의 축사! 2015년 창조경영대상자에게’, 뚱보강사, 2015619, 조회 886.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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