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__ 운동권 논리로 이승만·박정희를
- 뚱보강사
- 2022.05.20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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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__운동권 주사파 논리로 이승만·박정희를 모욕 ---11ok
뚱보강사 이기성
513__ 운동권 논리로 이승만·박정희를
뚱보강사는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사람을 한마디로 평가하기는 참 힘들다. 평가하는 사람마다 주관이 다르고, 객관적으로 평가받는 사람의 장점이 몇 %이고 단점이 몇 %인지를 따져서 점수로 평가하기도 힘들고... 뚱보강사 칼럼 ‘#215__이승만과 윌슨주의와 레닌주의’에서 보면, 이승만(1875~1965) 초대 대통령은 인간적인 약점은 많았지만, 민주공화국의 초석을 놓은 공로가 있다. 북쪽에서 김일성이 레닌주의를 따를 때, 이승만은 본인이 1910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프린스턴 대학 총장이던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윌슨주의’를 선택한다.
20세기 초반은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공산주의가 정치 이념으로 경쟁을 할 시기였다. 21세기에 들어와 소련의 붕괴와 공산 중공이 자본주의 경제로 수정하여 부유한 중국으로 부상한 것이 바로 윌슨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윌슨(제28대 대통령, 1913∼1921)의 ①자유민주주의와 정치적 자결주의(1918)와 레닌이 주창한 ②전체주의적 공산주의라는 두 사상의 대결은 ‘윌슨주의’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반면에, 공산주의 즉 레닌주의와 그 레닌주의의 파생형인 스탈린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이즘, 주체사상 등 이런 것들을 지향하는 현실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절대다수는 1인 및 1당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시절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 계몽운동,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옥살이를 하였으며(1899~1904), 수감 시절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5년에 걸쳐 1907년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1908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1910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일제시대에 조선으로 귀국하여 교육계몽운동 등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하와이로 가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이승만의 박사 논문은 「미국의 영향 하의 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이었던 상황이었고, 1905년에 미국과 일본이 맺은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에, 한국 문제는 국제연맹에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관한 뚱보강사 이기성의 칼럼은 11개가 있다. ①‘483__저작권 독도 대마도 이승만’ 2022.03.21. ②‘349__38선은 어떻게?’ 2021.07.24. ③‘321__8.3 사채 동결, 대마불사, 닉슨쇼크’ 2021.06.18. ④‘317__배상금과 독립축하금’ 2021.06.14. ⑤‘315__나와 검인정교과서 출판’ 2021.06.11. ⑥‘286__이승만과 신채호’ 2021.05.12. ⑦‘252__태극기 영감과 싸가지 진보’ 2021.04.06. ⑧‘242__5적의 김지하 조갑제 김형석’ 2021.03.20. ⑨‘236__국제그룹과 삼성그룹’ 2021.02.24. ⑩‘215__이승만과 윌슨주의와 레닌주의’ 2020.08.09. ⑪‘181__아편 전쟁과 상해 임시 정부’ 2018.07.29.
운동권 주사파 논리로 이승만과 박정희를
주사파 논리의 판박이다... 천박한 역사관에 찌든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의 저질 칼럼... 김대중 고문은 천박한 운동권, 주사파 논리를 빌려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1875~1965)과 박정희(1917~1979)를 모욕하고 저주했다... [펜앤드마이크] 김용삼 대기자의 논설이다(2020-01-03). 유튜브 채널 '문갑식의 진짜TV' 문갑식 대표(전 월간조선 편집장)가 실명 공개는 안했지만 '탄핵정변' 당시 논란 빚은 조선, 동아, 중앙일보 칼럼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대한민국을 적화시키는 첫 기초를 마련해준 칼럼"... "아직도 언론인이라고 행세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비극"... "최순실의 전 남편 정윤회의 이혼 들먹이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연결시켜"... "결국 세 칼럼이 김의겸, 이진동, 손석희의 가짜 특종들을 만들어냈다". 문갑식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변' 당시 신문업계 메이저 3사의 몇 가지 칼럼들에 대해 '오늘날 대한민국을 최악의 위기로 몰아넣은 최악의 칼럼'이라고 영상을 통해 공개 비판했다.
최근 조선일보에서 퇴사한 뒤,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문갑식 대표는 신문 칼럼 필자의 실명을 밝히진 않았지만, 소개한 칼럼의 내용으로 짐작컨대, 탄핵정변 당시 우파 성향 지식인과 시민사회운동가 등 상당수 국민 사이에서 큰 공분을 산 동아일보 김순덕 대기자, 중앙일보 이하경 주필,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의 '문제성 칼럼'들이라고 생각했다(출처: 펜앤드마이크).
박근혜 대통령 탄핵 불러온 '언론의 난', “최악의 세 칼럼”... 김순덕, 이하경, 최보식의 '문제칼럼' 저격...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독재정권이라고 자리매김하는 것은 철부지 운동권, 주사파들의 논리의 판박이다. 김대중 고문은 천박한 철부지 운동권, 주사파 논리를 빌어다 건국의 아버지, 국가를 융성시킨 이승만·박정희를 모욕하고 저주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로버트 모리스 노예상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노예상인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누구인가?... 모리스는 1734년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다. 13세에 선박회사 견습사원으로 입사하여 금융과 무역을 익혔고, 31세 때 인도와 유럽을 왕래하는 해운업, ‘노예 매매업’으로 재산을 모아 미국 최고의 갑부 대열에 올랐다. 그의 회사 소유 선박이 청나라 광저우(廣州) 무역에 참여하여 떼돈을 벌었다.
당시 미국 상인들은 영국인들과 함께 열심히 아편을 중국에 팔아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모리스도 청나라 무역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아편 무역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뭐든 돈이 되면 지옥이라도 달려가는 것이 자본주의 상인들의 미덕이다. 그러한 대열의 선두에 서 있던 인물이 로버트 모리스였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 미국 13식민지의 대표자회의)는 부자인 모리스의 등을 떠밀어, 억지로 초대 재무관(재무부장관)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 모리스는 ①노예와 아편을 팔아 번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자신이 태어난 모국 영국과 싸웠다... 노예상인 모리스의 사재 출연은 독립전쟁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다. 미국 화폐 단위를 ‘달러로 정한 사람’이 모리스다. 독립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회사 소속 선박들은 ②영국 선박들을 대상으로 해적질을 열심히 하여 한밑천 벌었다. 독립전쟁 후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모리스에게 재무장관을 맡아달라고 했으나, 그는 공직을 마다하고 다시 돈벌이에 나섰다. 이번에는 ③토지에 전 재산을 쓸어 넣어 땅 투기로 한몫 챙기려 했으나, 나폴레옹 전쟁(프랑스와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스웨덴.스페인.포르투갈’과의 전쟁: 1803~1815) 덕에 자금 유입이 끊겨 파산했다. 말년에 모리스는 채무자로 전락하여 감옥살이까지 하였다.
노예무역으로 돈을 번 로버트 모리스
미국인들은 로버트 모리스를 ‘건국의 아버지’ 중의 한 사람으로, ‘혁명의 재무관’, ‘독립 영웅’이라고 추앙한다. 노예무역으로 돈을 번 로버트 모리스. 그는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노예무역으로 번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독립전쟁을 도왔다. 만약, 한국 같았으면 이런 악덕 상인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할까?
위스키 장사의 달인 조지 워싱턴
“친영파, 정략결혼의 대가, 술장사의 달인”으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1732~1799)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버지니아 식민지 웨스트모어랜드(현 버지니아 주)의 한 마을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지 워싱턴은 민병대 소령 계급으로 프랑스와의 영토 분쟁으로 야기된 ‘프렌치인디언 전쟁’(1754~1763,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서 벌인 싸움)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지휘 능력을 인정받아 대령까지 진급한다. 그는 영국군과 한편이 되어 싸우면서 지휘 능력을 배운다. 한국 사회였다면 조지 워싱턴은 영국군과 협력하여 싸웠으니, 영락없는 친영파로 찍혀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끝난 후 조지 워싱턴은 부유한 과부 마사 커티스와 정략결혼을 한다. 이 결혼으로 그는 막대한 자산가가 되어, 버지니아 주 최고 갑부 가운데 한 명이 된다. 한국 사회였다면 재산을 노린 정략결혼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1789~1797) 재임 중 조지 워싱턴은 재정 확보를 위해 위스키세를 신설했다. 그러자 이에 저항하여, 1794년 서부 펜실베이니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워싱턴은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진압군을 이끌고서, 반란 진압에 나선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다.
워싱턴은 대통령이었지만, 한편에선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반란을 진압한 사건의 여진이 가라앉기도 전에, 워싱턴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1797년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증류소를 만들어, 위스키와 브랜디를 제조하여 팔았다. 위스키의 연간 생산량은 1만 1000 갤런(41,639 ℓ)이었다.(1 gal은 3.785412 ℓ). 한국 같았다면 이런 술장사 부류의 인간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했을까?
우리나라 국회 청문회라면 ‘조지 워싱턴’은 엄청 하자가 많은 못된 인물로 몰아서, 대통령은커녕 장관 임명도 안 시키고 매장시켰을 것이다. 영국을 위해 싸웠으니 ①친영파였고, 부와 권력을 쥐기 위해 과부와 ②정략결혼을 했고, 돈을 벌기 위해 위스키 제조에 앞장섰던 ③술장사였다. 그런 인물도 미국은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한다. 왜 그럴까? 한국 같았으면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을 인물이 분명하다.
대통령과 싸웠던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
조선일보 김대중(1939~) 고문은 언론인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역대 대통령과 맞서 싸웠던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지금도 조선일보에 간간이 ‘김대중 칼럼’을 기고하는 현직 언론인이기도 하다. 2015년 6월 1일, 기자 생활 50년을 맞았으니, 올해로 기자 생활 57년째다. 김 고문은 1965년부터 25년은 현장에서, 1990년 주필이 된 이후엔 칼럼과 사설로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지켜봤다. 김대중 고문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한 명이고,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인정받는다.
김대중 고문의 힘은 논리와 비판을 장착한 글의 힘에서 나왔으며, 마흔 살 때부터 지금까지 칼럼니스트로서 거의 모든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 때로는 어딘가 딴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은’ 기자였다고도 했다. 그래서 망명을 가듯 외국에 나가 있기도 하고, 세무조사와 계좌 추적을 받기도 했다.
2015년 기자 생활 50주년 인터뷰에서, 김대중 고문은 “아부 안 해도 되고,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신문기자로 산 게 좋았다”, “권력 압박·유혹 있었지만 다른 직업 생각하지 않아”, “논객은 소통하는 직업 아니다. 자기의 생각을 얘기할 뿐”, “우리에게는 어제가 없다. 어제에 매달리면 회한만 쌓인다. 우리는 내일도 개의치 않는다. 내일에 집착하면 자칫 몽상가가 된다. 우리는 오늘을 살되 치열하게 살면서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없는 것’을 가차 없이 들춰낸다. 생명력은 짧아도 생동감 넘치게 살고 싶은 것이다. 이게 내가 신문기자로 살아온 방식이다” 등등 자신의 언론철학을 설파했다.
김대중 주필은 그 동안 대통령에 대한 비판 칼럼으로 인기를 유지해 왔다. 그가 대통령을 주제로 비판의 필봉을 휘둘러댄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권력과의 대칭관계에서 사물을 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사건건 정부가 하는 일에 찬성하려면, 뭐 하러 언론을 하나? 싸울 때는 누구랑 싸우는 게 제일 좋은가? 상대방의 보스와 싸워 넘어뜨리면 나머지와 안 싸워도 된다. 우리는 보스와 싸우는 게 본업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게임을 좋아하지 않나?”
이승만과 박정희의 말로를 보다
이승만, 박정희를 권력욕에 눈이 멀어 ‘장기 집권을 하려다 비운을 맞게 되었다’고 비판한 김대중 고문의 칼럼(조선일보 2019년 12월 31일자 칼럼)이 파문을 일으켰다. 김대중 고문이 여태까지와 다른 성향의 칼럼을 기고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2019년의 마지막 날, 12월 31일... 칼럼 제목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말로를 보다’였다. “이승만·박정희가 장기 집권의 권력욕에 집착하다가, 국민 저항에 부딪쳐 물러났다. 문재인도 독재자 짓을 하고 있으니, 그들 뒤를 따라 ‘어리석음의 기록’을 걸을 것이다.”
“문재인이 독재자 짓을 하고 있으니, 이승만·박정희 뒤를 따라 갈 것이다.” 이것이 2019년 12월 31일자 김대중 칼럼의 요지다. 이승만·박정희를 독재의 대명사로 몰아간 것이다. 과연 “이승만·박정희가 욕을 먹을 사람이었던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민주주의 가능하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미국 예일대학교 교수였던 민주주의의 석학 로버트 달(Robert Alan Dahl, 1915~2014)은 오랜 연구 끝에, 한 나라가 서구식 개념의 자유민주주의를 실행하려면 국민 1인당 4000~7000 달러의 산업적 기반, 탄탄한 중산층, 그리고 중산층들이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한 민주시민교육이 갖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태우 6·29 선언. 1인당 GNI 3480 달러
이승만 시절 우리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Gross National Income Per Capita)은 60 달러, 박정희 시절은 80~100 달러에 불과했다. 한국 사회가 소위 말하는 ‘민주화’ 시대로 이행한 것은 1987년 6·29 선언 이후이다. 6.10 민주 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6월, 집권당 민주정의당의 대표였던 노태우가 전격 발표한 선언이 6·29 선언. 이 선언 이후, 그해 말 개헌을 통해 한국 대통령 제도는 오늘날의 직선제, 5년 단임으로 정착되었다. 1987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480 달러였다. 당시 세계평균치 3306 달러보다 174 달러 많다. 이 때 소득수준이 비슷한 나라는 이라크(3520 달러), 가봉(3410 달러) 등이었다. 1986년의 우리 국민소득은 세계평균보다 18 달러 적은 2820 달러였다. 한국은 1987년 이후 비로소 로버트 달이 설파한 1인당 소득 4000 달러 시대에 돌입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시대에 ‘왜 민주주의 하지 않고 독재를 했냐?’고 비판하는 것은 우물가에 가서 숭늉 달라는 식이다. 이승만·박정희 시대는 오늘과 같은 자유민주주의가 가능케 하기 위한 물적 토대를 닦기 위한 ‘권위주의 정부 시대’였다는 것이 양식 있는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미국인들은 과거의 노예상인·아편상인, 친영파 장교, 부와 권위를 위해 과부와 정략결혼을 하고, 위스키 술장사를 했던 ‘때 묻은’ 인간들도 독립에 앞장 선 부분을 높이 평가하여,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하고 존경한다. 적어도 ‘독재자’ 소릴 들으려면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처럼 자기 나라 국민들 몇 십 만, 몇 백 만 명 정도는 재판절차 없이, 굶겨죽이고 때려죽이고, 가둬 죽였어야 한다.
‘왜 민주주의 하지 않고 독재를 했냐?’
한국은 1987년 이후 비로소 1인당 소득 4000 달러 시대에 돌입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민주주의가 가능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1948~1960)·박정희 대통령(1963~1979)은 미국의 로버트 모리스나 조지 워싱턴 대통령(1789~1797)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준동하는 공산주의자들, 좌파들과 싸워가며 이 나라를 건국하고 국민들 먹여 살리는 물적 토대를 닦느라 수없는 고초를 겪었다. 이승만·박정희가 정말로 권력욕에만 눈이 멀어 장기 집권을 했다고 믿는가?
한국에서 1인당 소득 4000 달러가 되기 이전 시대에, 이승만이 집권하지 않았다면 조봉암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고, 박정희가 3선 하지 않고 물러났다면, 김대중이 집권했을 것이다. 만약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다면 이 나라는 지금쯤 어떤 상태가 되었을 것으로 보는가? 그처럼 엄중했던 시대를 독재정권이라고 비하 자학하는 것은 철부지 운동권, 주사파 논리의 판박이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은 그런 천박한 운동권, 주사파 논리를 빌려다 건국의 아버지, 국가를 융성시킨 이승만·박정희를 모욕하고 저주했다. 이러한 쓰레기 글이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지면에 버젓이 실리는 것이 오늘날 조선일보의 사시(회사의 경영상의 방침, 주장)인 모양이다.
[펜앤드마이크]의 김용삼 대기자는 문제의 칼럼이 실린 2019년 12월 31일을 ‘조선일보의 언론으로서의 장례식’ 날이자 ‘언론인 김대중의 장례식’ 날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김대중 주필은 붓을 놓고, 여생을 편히 쉬시라고 후배 언론인으로 정중히 권한다.
[참고] [펜앤드마이크] 김용삼 대기자, 2020-01-03.
https://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26719
[참고] 483__저작권 독도 대마도 이승만, 2022.03.21. 조회 153.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812479
[참고] 349__ 38선은 어떻게?, 2021.07.24. 조회 151.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79684
[참고] 321__사채 동결, 대마불사, 닉슨쇼크, 2021.06.18. 조회 190.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76257
[참고] 317__ 배상금과 독립축하금, 2021.06.14. 조회 187.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71883
[참고] 315__ 나와 검인정교과서 출판, 2021.06.11. 조회 178.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71674
[참고] 286__ 이승만과 신채호, 2021.05.12. 조회 145.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68530
[참고] 252__ 태극기 영감과 싸가지 진보, 2021.04.06. 조회 271.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64377
[참고] 242__ 5적의 김지하 조갑제 김형석, 2021.03.20. 조회 343.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61549
[참고] 236__국제그룹과 삼성그룹, 2021.02.24. 조회 540.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55803
[참고] 215__이승만과 윌슨주의와 레닌주의, 2020.08.09. 조회 563.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668988
[참고] 181__아편 전쟁과 상해 임시 정부, 2018.07.29. 조회 568.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570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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