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__ 분꽃. 안중근 의사.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
- 뚱보강사
- 2023.09.0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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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__분꽃- 안중근 의사. 천주교회의 친일행적-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9ok
뚱보강사 이기성
731__ 분꽃. 안중근 의사.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
분꽃(Korean spice viburnum, a marvel-of-Peru, a four-o'clock)은 수술은 5개이고 밖으로 나온다. 암술대는 밖으로 길게 나온다. 열매는 까만콩 같은 난형이고 겉에 주름이 있으며 검게 익는다. 관상용으로 심어 기르는 한해 또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뿌리는 굵다. 줄기는 가지가 많이 갈라지며 마디가 굵고 높이 60-100cm이다. 잎은 마주나며 난형 또는 넓은 난형, 가장가리가 밋밋하고 끝이 뾰족하다.
꽃은 6-10월에 가지 끝의 취산꽃차례(聚揀花序)에 피며 향기가 나고 붉은색, 흰색 또는 노란색이다. 꽃싸개잎은 꽃받침처럼 보이며, 녹색이고 5갈래로 갈라진다. 꽃잎은 없다. 남아메리카 원산의 원예식물로 꽃 색과 무늬가 다양하다
[그림 1] 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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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분꽃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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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공공언어 쓰기
자동제세동기→심장충격기... 우리말로 바꾸니 훨씬 쉽다. "대체어 짧고, 이해 쉬워야"잘 쓰이는 대체어 이유 있다... 이데일리는 문화체육관광부·㈔국어문화원연합회·세종국어문화원과 함께 공공언어의 현 실태를 살펴보고, ‘쉬운 공공언어 쓰기’를 제안한다.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가 보도했다(2023년 8월 31일). 언어(말)는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국민의 알 권리와 인권을 실현하는 연장이다. 특히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공공언어는 국민이 정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써야 한다. 국민 건강과 안전에 직결되는 만큼 일상생활의 질을 좌우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넘치지 않는다.
--- 블랙 아이스→도로 살얼음, 자동제세동기→심장충격기, 키스 앤드 라이드(K&R)→환승정차구역, 뱅크런→인출 폭주, 언택트→비대면 등. 국어 전문가들이 잘 다듬어진 순화어(대체어)로 꼽은 ‘쉬운 우리말’ 사례들이다... 도로 살얼음, 심장충격기, 비대면 같은 다듬은 말은 국민 생명, 안전과 연관된 만큼, 쉬운 우리말로 대체한 경우다. 실제 2020년 코로나19 초창기에 자주 쓰이던 ‘비말’은 신속한 대응 덕분에 ‘침방울’로 대체되어, 방역에 대한 이해를 높여서 마스크 쓰기 등의 수칙들이 더 잘 지켜질 수 있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기차역 인근 도로 바닥에서 곧잘 볼 수 있는 ‘환승정차구역’도 잘 다듬어진 우리말로 꼽힌다. 잠시 차를 세워 사람을 태우거나 내려주는 공간을 일컫는 이 말이 원래 ‘키스 앤드 라이드’(K&R·kiss & Ride)로 쓰였던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글문화연대는 2017년 동천역에서 ‘키스 앤드 라이드’란 표기를 발견하고 용인시에 건의해 우리말로 변경했다. 이후 2021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배웅정차장’, ‘환승정차구역’ 등 우리말로 고치는 것을 정식 요청했다. 이에 한국철도공사와 국가철도공단은 강릉역, 둔내역, 만종역, 원주역 등 18곳 역에 있는 ‘K&R’ 표기를 우리말인 ‘환승정차’로 개선했다. ‘환승정차’의 개념이 더욱더 명확하고, 일반 시민 누구나 이해하기 쉬웠던 만큼 우리말로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우리말로 다듬은 대체어가 널리 쓰이려면, 무엇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언어라는 것이 습관과 감각의 문제인 데다가 새 말에 대한 세대별 수용 정도도 달라 일반 시민이 인식하게 되는 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국어 전문가들에 따르면 대체어 선정 시, 단어가 정확하게 인지돼야 사고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능하면 짧고 쉬운 말 표현이 중요하다. 말이 어려우면 보통 사람들은 그 뜻을 파악할 생각을 별로 하지 못하고, 점차 정보에서 소외돼 간다. 특히 안전, 위험, 건강과 관련된 단어의 경우,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의 대체어를 만들어 보급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어 전문가들은 “한동안 ‘스크린 도어’가 ‘안전문’으로 바뀌어 잘 쓰였으나, 최근 다시 자주 보이는 현상을 간과해선 안 된다”며 “원어의 함축적 맛을 살리지 못하거나, 오히려 우리말 대체어가 더 길고 어렵다면 금세 사라진다. 보다 알기 쉽고 친숙하게 말을 다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완벽한 대체어가 아니더라도 공공기관, 언론, 교육기관 등에서 사용 빈도를 늘려 우리말을 계속 유통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다듬은 말 중에는 다소 어색한 대체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자꾸 쓰다 보면 일상에 스며든다. 계속 다듬어 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천주교회의 친일행적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의사는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사도 토마에서 따옴), 다묵(多默)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였다. 이후 러시아제국군 헌병에게 붙잡혀 일본 총영사관으로 옮겨졌고,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다. 안중근은 자신이 사형 당하면 조국에 운구하여 매장해줄 것을 최후로 당부했다. 그러나 사형당한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죄수 공동묘역에 묻혔다. 야비한 일제는 뒤에 안중근의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위키백과).
그런데 최근까지도 로마 교황청 및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살인마 폭력범이라고 주장했다고??? 안중근의 집안은 천주교 성당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신앙심이 독실하였고, 안중근 자신도 16살인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배웠다.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출신의 천주교 신부였던 조제프 빌렐렘(Joseph Wilhelem, 한국명 홍석구)으로부터 토마스(도마, 다묵(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회의 친일행적은 언제까지?... 안중근 의사를 테러범으로 지정한 천주교... 장봉근 한글 활자디자이너가 안중근 의사는 테러범이 아닌 애국자라고 한국 천주교회 및 로마 교황청에 여러 번 항의했으나...
[페친] 전집현 님이 2022년 11월 16일 글을 올리셨다. 뚱보강사 칼럼 ‘#562__ 안중근. 중국은 한국 일부. 심백강. 시진핑 망언’과 ‘#572__ 엠팔. 남산 윤우의(매헌 윤봉길) 의사. 안중근. 반도체 SK하이닉스’에도 안중근 의사 이야기... 안중근의 짧은 생애 다룬 소설 <<하얼빈>>...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함”에... “안중근, 당대 가둬놓을 수 없어”… 소설가 김훈, <<하얼빈>> 출간... [한겨레신문] 최재봉 기자가 이를 취재했다(2022년 8월 3일)...
전집현 님이 <일제강점기 한국 천주교회의 친일행적과 그 배경>에 대해 알려주셨다. 천주교는 일제강점기의 친일과 해방 정국을 거치며 교세의 악화를 면치 못하다가,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 참여(정의구현사제단)로 사회적 명성을 얻고, 다시 신자 수 증가 등 교세의 성공적인 복원을 이루었다.
① 이또 히로부미의 정교분리 회유책 : 1906년 통감부 초대 통감인 이또 히로부미는 선교사들에게 회유책을 폈다. 그의 제의는 "한국 정치는 통감이 맡고, 정신적 교화는 종교가 맡는다.”는 "역할 분담론"이었다. 그러나 이는 교회 세력을 정치권으로부터 철저히 차단하려는 속셈이었다. 한국교회는 긴 세월 동안 박해의 체험을 가진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석연치 않은 정교 분리 원칙을 1906년 10월 19일 <경향신문> 창간호를 통해 공포하였다.
② 정교 분리냐? 유착이냐? : 일제하의 정교 분리 원칙은 오히려 정교 유착의 성격이 강했다. 교회는 일제의 정치적 술수에 말려들어 식민지 지배 통치를 묵인, 방조, 비호하는 정도를 넘어 동조와 협동, 봉사와 충성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에게 반침략운동을 금지할 뿐 아니라, 심지어 단죄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반민족 내지 비민족적인 성향을 띠게 된 요인은, 한국교회가 외국 선교사들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있었던 현실 때문이었다.
③ 선교사들은 남의 나라에서 교세 확장에만 몰두 : 파리외방전교회는 1831년 9월 9일 교황청으로부터 한국 선교를 위임받았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최대 과제가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해서 한국인들로 구성된 자치적인 교계제도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주고 교세 확장에 몰두하다가, 떠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남의 나라’였고, 선교지의 민족 문제나 민족 의식 고취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관심 밖이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 정부가 탄압을 했던 병인박해 등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던 시기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탄압을 가했던 나라를, 굳이 독립시키자고 적극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④ 프랑스 선교사가 친일파 : 한국교회는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 때문에 프랑스 정부의 보호를 받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조선 정부뿐 아니라 주민과 발생하는 문제까지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프랑스의 한 교구로 생각하였다. 한국교회의 통치권자(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재임 1890~1933)이었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항상 모국인 프랑스의 정책과 궤를 같이했다. 1907년 프랑스는 불일협정(佛日協定)을 체결하고, 일본의 한반도 소유를 용인하였다. 그러니 뮈텔 주교는 친일 노선을 폈다. 한국의 프랑스 주교들은 일본 제국을 합리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조선을 일본 제국의 종속국이 아니라 일본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의 눈에 조선의 독립운동은 ‘반정부운동’이며, 무모한 짓으로 보고 일제에 밀고하거나 참여를 거부했다.
프랑스 주교들은 신민회 105인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조선인들이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다.'는 고해성사를 한 것을 알게 되자, 1911년 1월 11일 눈길을 헤치고 가서 일본군 아카보 장군에게 밀고하였다. 그 밀고 대가로 교회는 조선총독부의 도움을 받아 명동성당의 진입로를 넓혔다.
반면 독립운동가 105인은 일제의 고문과 거짓 자백 강요 등을 통하여 유죄판결을 받는다. 또한 종교계가 주도한 독립운동인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에 천주교도는 단 1명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프랑스 주교들은 한결같이 이 운동을 단죄하였다.
⑤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망언 : 1911년 6월 11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서품식이 있었다. 16일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조선 총독 테라우치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뮈텔 주교는 “천주교는 정치적인 문제에 무관심하고, 나는 항상 일본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나와 우리 모든 신부들의 공통된 생각이고 또한 신도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충성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대구의 신도들에게 만세운동에 가담하면 대죄를 범하므로 지옥에 갈 것이라고 흥분하여 말했다.
한국교회의 통치권자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교회의 최대 사명인 선교가 우선이라, 한국인의 민족주의 운동을 더 크게 걱정했다. 일제하 한국교회에는 5명의 주교가 있었지만, 선임 주교들의 정책을 비판없이 따라갈 따름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는 '이는 정치적인 일이니 막지 않는다'고 했다.
⑥ 교황청도 일본의 침략행위를 정당 인정 : 1919년, 교황청은 일본에 대사관을 설치하면서, 한국교회까지 담당하게 하였다. 이런 조처는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의 일부로 생각한 것으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정당하게 인정해 준 것이 되었다. 또한 교황 베네딕토15세는 1922년 조선 총독 사이토와 정무총감 미즈노 그리고 총독 부인 미쓰미야에게 성 실베 스텔 훈장을 수여하였다. 포상 이유는 한국 주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데 대한 답례였다. 사이토 총독은 한국 주교들을 빈번하게 식사에 초대하고 베네딕토 수도원의 대원장인 독일인 주교 사우어(신)와는 아주 막역하게 지냈다. 이런 행위는 일제가 정권을 지지하도록 종교를 이용하는 상투적인 수단이었다. 교황청이 일제의 침략 행위를 지지하고, 정당화 내지 신성화한 극단적인 표현은 1936년 신사참배를 허용한 일이다.
⑦ 한국인 최초 주교 노기남, 친일반민족행위자 : 1942년 11월 14일 명동성당 보좌신부가 한국인 최초로 주교(제10대)가 됐다. 다름 아닌 노기남 주교(1902~1984)다. 그는 진작에 창씨개명을 한 주교였다. '오카모토 가네하루', 그는 경성교구장(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며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조선 천주교 기관지 『경향잡지』에는 ‘반도청년들이 황군이 되고’ ‘식기를 반납해 어뢰와 포탄을 만들자’는 글들이 이어졌다.
당시 가톨릭은 미영격멸 비행기 200대 헌납운동을 전개해 248대분인 2,481만 원을 일제에 헌납했다. '오카모토 가네하루'(노기남) 주교는 1939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산하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1943년에는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참석하여 특별지원병제도를 선전하기도 하였다.
권력과 명예를 누린 친일종교인들
종교계 친일인사들, 해방 후에도 교권 중심세력으로 활동... 살아서도 죽어서도 권력과 명예를 누린 친일종교인들... [오마이뉴스] 백찬홍의 '종교로 세상읽기(57화)'에 보도되었다(2009년 11월 11일). --- 불교계 이종욱 전 총무원장은 애국자로 둔갑해 현충원에 안장... 지난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이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4383명 중에는 해방 전후 한국종교계를 쥐락펴락했던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종교별로는 불교 54명, 개신교 51명, 유림 41명, 천도교 29명, 천주교 7명 등 총 182명으로 조사되었다. 2008년 4월 발표된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202명이었으나, 이의제기 등 재조사를 통해 최종확정한 것이다.
--- 이종욱 전 조계종 총무원장... 불교계의 경우,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이종욱 전 조계종 총무원장이다. 그는 월정사 승려로 있을 때인 1919년 만세 시위에 참가했고, 3·1 운동의 성과로 한성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강원도 대표로 참가했으며,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도 강원도 대표를 맡기도 했다. 그러나 1920년대 상해에서 국내로 돌아와서 조선총독부가 임명하는 월정사 주지가 되었으며, 불교계 대표 격인 종회(宗會)의 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
그러나,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변절하여, 기원법회나 시국강연회를 열어 일제를 적극 지지했으며 <신불교> 등의 잡지에 친일 논설을 쓰기도 했다. 또한, 이종욱 전 조계종 총무원장은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빠짐없이 참여했으며 전투기 등 전쟁물자 및 위문금 헌납운동, 징병제, 학도병 모집, 창씨개명에 적극 호응했다. 또 친일 종단인 조선불교 조계종을 설립하는 데 앞장서면서 스스로 종무총장(오늘날 총무원장)이 되었다. 그는 해방 후 종무총장직에서 사퇴하고, ‘승권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지만,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해 반탁 운동에 뛰어들면서 또다시 불교계의 원로로 복귀했다.
이종욱 전 종무총장(오늘날 총무원장)은 1950년 고향인 평창에서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에는 총무원장으로 복귀했다. 그가 동국대 이사장으로 있을 때 친일 승려인 권상로가 총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과거를 조작해 애국자로 둔갑한 이종욱 전 총무원장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고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그의 이름이 친일인사로 등재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 했지만, 편찬위원들은 친일행적 자료가 명확히 남아 있기 때문에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교계 친일인사 중에는 이종욱 전 총무원장과 같이 애국자로 인정되어, 현충원에 안장된 인물로 대흥사 주지 박영희가 있다.
개신교 친일파, 미군정과 이승만이 비호
불교에 이어 두 번째로 친일인사가 많은 개신교의 경우는 각 교단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개신교 친일파,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 아래 교계를 지배... 신사참배를 주도했던 장로교 총회장 홍택기 목사, 감리교 초대 총리사를 지낸 양주삼 목사, 성결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명직 목사 등도 친일명단에 올랐다. 조선장로교는 1938년 27회 총회 때 신사참배 결의문을 채택하고, 곧바로 신사참배를 단행했다. 신사참배를 주도했던 홍택기 총회장을 비롯해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 당시 서기로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그 다음해인 1939년 총회장에 오른 곽진근 목사 등이 친일인사로 분류되었다.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합동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총리사(오늘날 감독회장)가 된 양주삼(개명: 하시하라 추산 梁原柱三) 목사는 1938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종교인이기에 앞서서 국민"이라면서 신사참배를 찬성하였다. 그는 해방 후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 없이 "출옥한 교인이나 그렇지 않은 교인이나 고생하기는 매한가지였다"고 주장했고, 미국 유학경험을 통해 쌓은 뛰어난 영어실력과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교회인맥을 통해 미군정으로부터 보호받았다. 반민특위가 친일행위로 그를 구속하자, 미국 감리교의 실력자 웰치감독은 같은 감리교장로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의했고, 이 대통령은 즉석에서 김효석 내무장관에게 반민특위를 경비했던 특경대에 대한 해체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양주삼은 이후 승승장구해 1949년 대한적십자사 초대 총재가 되기도 했지만, 결국 한국전쟁 중에 납북 당했다.
감리교 목사였던 정춘수 목사도 한때는 3.1운동 당시 33인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으나, 자신이 참여한 개량주의 민족주의 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1938년)으로 체포된 이후 친일활동에 나섰다. 1939년 일제의 지원 아래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취임했고, 1941년에는 친일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입하여 내선일체에 순응할 것과 신사참배를 독려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구금되기도 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방면되었다.
정춘수 목사는 고향인 청주시 3·1공원에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 출신인 신흥식·권동진·손병희·권병덕·신석구와 함께 동상이 세워졌으나, 1996년 친일 행적이 밝혀지면서, 시민단체들에 의해 철거되는 수모를 당했다. 한국성결교회 초대 총회장이자 성결교의 신학적 토대를 만든 이명직 목사는 '국민정신총동원성결교회연맹'과 '국민총력성결교회연맹'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전력으로 친일인사에 올랐다. 이명직 목사 역시 친일경력에도 불구하고, 성결교 목회자 양성기관인 서울신학교 교장(1951년), 서울신학대학 명예학장(1965년)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경도되는 것보다 차라리 일제에 협력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명직 목사는 1938년에 쓴 '붉은 용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세의 붉은 용은 소련의 공산주의이며, 그 증거로서 종교박해, 인명살상, 사상혼란 등을 들었다. 그는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이 사단 즉 붉은 용의 도래 사상과 건전히 싸움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명직 목사는 일본·독일·이탈리아의 파시스트집단이 결성한 반공연맹이 기독교의 입장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박해하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일본·독일·이태리의 연합전선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공산주의를 반대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공산주의가 반종교적인 집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명직 목사는 "공산의 사상이라는 것은 오늘날 종교를 무시한다. 그뿐 아니라 종교박멸 운동을 도와주고, 무신론을 장려하여 인생의 전도를 암흑화시키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던지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이명직 목사의 친일활동이 논란이 되자 이명직 목사기념사업회는 '과연 이명직 목사는 친일인사인가?'라는 소책자를 통해 "표면적인 것만을 가지고 고 이명직 목사를 친일파라고 운운하는 것은 교단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이 목사는 일제로부터 특혜를 누린 일이 없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제에 이용을 당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오히려 이 목사는 신사참배 이후 일제가 한국교회를 통합하고 구약성서를 폐기하려고 하자, 이에 저항하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명직 목사가 속한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2007년 교단 창립 100주년을 맞이해, 교단지도자들의 친일행위에 대해 국가와 민족 앞에 교단의 이름으로 사죄문을 발표한 바 있다.
교육계 인사로 분류된 백낙준 전 연세대총장은 독실한 개신교신자로 <한국기독교교회사>를 집필할 정도로 교계와 깊은 교감을 갖고 있었다.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과 같이 친일인사보다는 민족 교육의 선각자로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전쟁용 비행기 헌납 지원단체인 조선장로교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부회장를 지내면서,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호 아래 초대 참의원 의장, 문교부 장관, 연세대학총장을 지냈다. 백낙준 전 총장은 1957년 잡지<사상계>에 자신이 극구 찬양했던 태평양 전쟁에 대해 '제국주의적 야심에 가득 찬 일본이 이웃나라를 병탐하고 이웃 동포를 괴롭히기 위해 벌인, 용납할 수 없는 부정불의의 행동'으로 비난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다.
프랑스 선교사야 자기 나라 국민이 아니니까, 한국 국민을 배신하고 자기 종교 세력 확장에만 힘썼겠지만, 한국인 신부, 한국인 목사, 한국인 스님들이 한국 국민을 배신하고 일본 정부에 아양을 떨었고, 한국 국민을 무시하고 탄압하면서 천주교, 개신교, 불교 세력 확장에만 노력해온 행동은 이제라도 진심으로 반성하여야만 참된 종교인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분꽃, 국립생물자원관 생물다양성정보.
[참고]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2023-08-31.
[참고] 전집현
https://www.facebook.com/ilyong.ko.5
https://www.facebook.com/photo?fbid=6017370608275860&set=pcb.6017284484951139
[참고] ‘#562__ 안중근. 중국은 한국 일부. 심백강. 시진핑 망언’, 뚱보강사, 2022.07.19. 조회 278.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823833
[참고] ‘#572__ 엠팔. 남산 윤우의(매헌 윤봉길) 의사. 안중근. 반도체 SK하이닉스’, 뚱보강사, 2022.08.11. 조회 260.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825603
[참고] 김훈, <<하얼빈>> 출간... [한겨레신문] 최재봉 기자, 2022-08-03.
[참고] [오마이뉴스] 백찬홍의 '종교로 세상읽기(57화)', 2009년 11월 11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5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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