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__ 안중근. 중국은 한국 일부. 심백강. 시진핑 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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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__안중근. 심백강. 중국은 한국의 일부였다- 시진핑의 중국 역사 망언----11ok

뚱보강사 이기성

 

     562__ 안중근.  중국은 한국 일부.  심백강.  시진핑 망언

 

 

19091026일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에서 총살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한 이유 15가지를 발표하셨다. 그 첫째가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했다는 이유다. 프랑스 신문 르몽드 일러스트레(LE MONDE ILLUSTRE)190911월에 안중근 의사가 총살한 이토 히로부미에 관련하여 특집기사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일본이 한국에 대해 얼마나 많은 잔혹한 짓을 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반면에, 이토와 인터뷰한 내용도 들어있는데, 평소에 이토는 "조선은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이 없어, 일본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처형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9091026일 러시아 제국 만주 하얼빈 기차역(Харбинский вокзал)에서, 대한제국의 안중근 참모총장이 일본 제국의 초대 내각총리대신과 초대 한국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했다. 일본인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에게 31살의 안중근 의사는 이토가 죽어야 하는 죄목 15가지를 가르쳐주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867, 대일본 명치천황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부도의 죄. 1895,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제국의 명성황후 폐하를 시살한 죄. 1905,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5조약)을 맺게 한 죄. 1907,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 조약(정미7 불평등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죄(이토가 퇴위를 강요). 한국 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업, 상업, 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강탈)한 죄. 한국의 경제를 장악할 목적으로, 무단으로 제일은행권을 발행하고 강제로 유통시켜,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 국채 일천삼백 만 원을 한국에 강제로 빚지게 만든 죄(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음.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대한매일신보 보도).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봉기를 폭도라며,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 수만 인을 살육한 죄.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 칠적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죄. 1909년 또 다시 거짓으로 5가지 늑약(기유각서, 대한제국의 사법권 박탈)을 맺게 한 죄. 한국 삼천 리 강산을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죄.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숨 쉴 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죄.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죄.

 

뚱보강사 칼럼 ‘#213__ 백선엽 장군과 맥아더 장군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 미일 카스라 태프트 밀약, 포츠머스 조약, ‘헐 노트에 대해 알아본 바 있다. 1882년 조선정부와 미국정부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조선과 미국 어느 한 나라가 외세에 의해 주권을 침탈당했을 때는 서로 돕는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강화를 맺는 포츠머스 조약에서, 미국은 카스라 태프트 밀약을 공공연하게 추가로 집어넣는다. 미국이 조선을 일본에 넘긴다는 것이다. 포악한 일제에 맞서서, 조선 전국에서는 1919년에 3.1만세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한국 독립운동  탄압하라는  미국 훈령

 

3.1만세 독립운동 한 달 뒤인 1919415, 미국무성이 일본 동경에 있는 미국대사관에 훈령을 보낸다. 미국 정부가 미국대사관에 보낸 훈령 내용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조선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믿고 봉기했는데, 이것은 조선이 잘못 안 것이다.’ 민족자결주의를 통한 독립은 일본 같은 1차 세계대전 승전국가에는 해당 안 된다. 패전국인 독일, 헝가리, 터키 등 패전 국가의 식민지만 해당된다. 그러니 일본정부는 조선의 3.1독립만세 투쟁을 적극 진압하라는 내용. 한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라는 훈령을 미국이 그해 415일 일본 동경 미대사관에 보낸 것이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1919년에 미국이 배신한 것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과 일본은 동맹을 해제하고 서로 갈라선다.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으로 동남아시아 각국을 공격할 때, 미국 코델 헐(Cordell Hull, 1871~1955) 장관이 일본에게 최후통첩을 한다. 이것이 유명한 헐 노트중국·인도네시아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요구한 것이다. 코델은 미국 대통령 F.D.루스벨트 밑에서 국무장관이 되어 호혜통상조약의 체결, 뉴딜정책 추진에 기여하였다. 코델 헐은 1943년 모스크바 회담을 비롯, 2차 세계대전의 수습을 위한 일련의 회의에 참여하였고, 1945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미국이 주장한 헐 노트일제는 1931년 이후 점령한 식민지에서 철수하라는 최후통첩이다. 이는 일제 괴뢰국 만주부터 동남아시아가 포함된다.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 해당된다’. 그러나 조선은 해당이 안 되었다. 조선은 일제가 서기 1910년에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나도 조선은 일본의 소유로 남는다는 뜻이다. 미국은, ‘미국을 우방으로 믿고 있는한국을 또다시 배신한 것이다. 19411126,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이 일본의 주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와 미일교섭 대사였던 구루스 사부로(来栖三郎)에게 헐 노트를 전달하였는데, 이 문서에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일본군의 전면 철수’, ‘중국 대륙에서 모든 이권 철회를 요구하면서, 한국의 광복을 제외시킨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상해임시 정부가 재빨리 움직인다. 일본이 패망하면 당연히 한국이 독립될 줄 알았는데, 미국이 배신할 줄이야... 2년 뒤인 1943년에 카이로 회담이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다고 하자, 임시정부는 백범과 약산 김원봉이 합심하여, 중국 측 장개석(蔣介石, 1887 ~ 1975)을 설득한다. 장개석이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에서 조선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해 달라는 것이다. 카이로 첫 회담은 19431122일에서 26일까지 미국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 영국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의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세계전쟁에 대한 대응 문제로 모임을 가졌다. 중요한 핵심 사안으로는 대일전(對日戰)에 서로 협력할 것을 협의하였고, 일본이 패전했을 경우를 가정하고, 일본의 영토 처리에 대하여 연합국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 이 방침은 <카이로선언>으로서 발표되었다.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처칠과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서 숙의하였고, 장개석(장제스)과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합의하였다.

 

 

    미, 영 조선독립 반대,  장개석은 조선독립 찬성

 

미국루즈벨트와 영국처칠이 조선의 독립은 안 된다고 강하게 반대했지만, 장개석은 끝까지 이 둘을 설득하며 "당신들 신문을 통해서, 조선의 무장투쟁을 보지 않았냐? 경찰서, 식산은행 등을 폭파하고 일제 심장부에 들어가 일본의 신, 일왕에게도 폭탄을 던지지 않았냐? 만약에 조선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조선의 폭력투쟁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의 평화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민족은 다른 민족과 다르다. 중국과도 다르다. 동남아 국가들과도 다르다. 한국을 제외한 이들 어느 국가가 일왕과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암살하고 그러던가?”.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을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것이 한국인이다. 조선민족은 이렇기 때문에, “일제하에 그대로 두면 아시아 평화가 유지되지 않는다고 장개석이 조선의 독립을 반대하는 미국과 영국을 설득했다.

 

 

    한국만  일왕에게  폭탄을,  총독을 암살했다

 

안중근 의사 얘기가 나오자, 미국과 영국은 조선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계속 폭탄 투척, 요인 암살 등 무력투쟁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식민지에서도 한국처럼 독립투쟁정신을 일깨워 반란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걱정과 불안감으로 결국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한다. 1943년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에 예외 조항을 만들어, 조선 독립을 시켜야 한다고 적시했다. ‘조선의 노예적 상태를 해방시키고,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단서조항을 붙여 독립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조선 독립이 이렇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독립이 이렇게 어렵게 된 것이다. 3.1독립만세 투쟁과 폭탄을 던지고 파괴해서 독립된 것이다. 그냥 독립된 게 아니다.

 

당시의 외교론자들이 말한 외교를 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안됐다. 외교론이나 교육론 등으로는 독립할 수 없었다. 미국 영국 등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인데, 이들에게 이런 이론은 부담을 주지 못한다. 폭력투쟁, 목숨을 바치는 투쟁이 미국, 영국에게 부담을 주어서 독립시키도록 결정케 한 것이다.

 

 

    214일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

 

발렌타인데이(Valentine’s Day)’로 알려진, 214일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이다.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인 214일을 맞아,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SNS를 통해 '한국사 지식 캠페인'을 펼친다고 밝혔다. [위메이크뉴스], 2021.02.14.

 

'한국사 지식 캠페인'은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날에 맞춰 그 날의 정확한 한국사 지식을 누구나 다 이해하기 쉽게 카드뉴스로 제작해 SNS상에 널리 전파하는 '온라인 역사교육 캠페인'이다. 8장으로 구성된 카드뉴스는 '국내에서 만난, 안중근 이야기'를 주제로 국내에서 안중근(187992일 황해도 출생, 사망 1910326) 의사를 기릴 수 있는 추모지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가묘(서울), 안중근 의사 기념관(서울), 안중근 공원(부천), 안중근 연구소(경산), 안중근 의사 사당(장흥), 내촌아리랑마을 하얼빈역(김제), 안중근 의사 여순 감옥 전시관(군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 일을 기획한 서 교수는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이 연인들의 대표적인 기념일인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날이라,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고 전했다. "매년 관심이 많아지는 이 날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안중근 의사에 관한 전국의 추모지를 소개한다면, 향후 방문객들 증가에 도움이 될 꺼라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서 교수는 "사형선고일 뿐만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일(1026)과 서거일(326)도 함께 꼭 기억하자"고 당부했다.

 

19091026, 대한제국의 안중근 독립군 참모총장은 이토를 하얼빈에서 3발의 총격으로 사살하는데 성공했다. 1910214일 오전 10301심 공판에서 일본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했다. 안중근 장군은 항소하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책의 저술을 마치고자 했지만, 일본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326일 오전 10, 여순(뤼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뚱보강사 칼럼 ‘#271__ 반중정서와 심백강 교수에서 시진핑의 망언을 잠시 알아보았는데, 마침, [페친] 김영기님이 2021428일에 역사학 박사이고, 민족문화연구원장인 심백강 교수의 글을 [페북]에 올리셨다. ***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연재1> *** "시진핑의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망언에 답한다"... , 심백강 박사...

 

  **1. 시작하는 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해 4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개최된 미, 중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망언을 하였다. 이를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공개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시진핑 주석이나 중국정부 당국은 트럼프가 한 말에 대해서 진위를 밝히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정부에 대해서는 그 말의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발언도 없었다.

 

대동재단(공동대표 허신행,심백강)에서는 공개질의서를 중국의 중남해와 주한 중국대사관에 발송하여, 시진핑의 동북공정 논리에 의한 잘못된 역사인식을 지적하고 해명을 요구했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답변이 없다. 이는 중국정부가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시진핑의 발언을 망언이 아니라, 정당한 발언으로 간주하여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인의 민족적 긍지와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 중국은 사과 한마디 없었고, 발언의 잘못을 인정하여 취소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국민은 언제라도 누구나 이의와 반론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 더구나 역사학자의 입장에서는 역사적 진실을 밝혀, 중국과 한국의 지도자와 국민들에게 바른 역사를 알게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다.

 

시진핑의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망언은 오늘날 한국인이 살고 있는 한반도가 역사상에서 중국의 일부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한반도가 중국의 일부가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와는 정반대로 중국대륙이 한민족의 터전, 즉 한국의 일부였다라는 사실은 있다. 이 사실을 중국의 고대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밝히고자한다. 한국 특히 중국 역사학계의 비판적 견해를 기대한다.

 

  **2. 한민족의 첫 국가 고조선은 발해연안을 끼고, 중국을 지배한 왕조였다

 

고조선은 우리 한민족이 세운 첫 국가이다. 그런데산해경에는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北海之隅有國 名曰朝鮮)” 라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북쪽바다는 발해를 가리킨다. 중원에서 바라볼 때, 북쪽에 있는 바다는 발해밖에 없다. 그래서 맹자에도 발해를 북해라고 표현한 내용이 나온다. 이는 이성계가 대동강유역에 세운 반도조선과는 다른 고대의 대륙조선이 발해의 모퉁이에서 건국되었음을 말해준다.

 

고조선이 발해의 모퉁이, 즉 오늘날의 북경부근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는 것은 비단 산해경에 의해서만 증명될 뿐 아니라 송나라 때 국가에서 편찬한 무경총요에는 북경에서 북쪽으로 고북구를 가는 중간에 조선하가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지금은 중국지도상에 조선하는 지워지고 없다. 그러나 고북구라는 지명은 여전히 중국지도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고 고북구와 북경사이에는 조선하대신 조하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 이는 지금의 조하가 1000여 년 전에는 조선하로 불렸음을 말해준다. 오늘의 북경이 일찍이 조선 땅이 아니었다면 왜 북경 북쪽을 흐르는 강의 이름이 조선하였겠는가?

 

송나라 때 낙사라는 역사학자가 쓴 태평환우기에는 하북도 노룡현에 폐허가 된 조선성이 남아 있는데, 이곳이 은나라의 왕자 기자가 망명을 해 왔던 조선이다라고 적혀 있다. 송나라 때 하북도 노룡현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이다. 전 중국에서 풍광이 가장 빼어난 발해만 부근으로, 중국 공산당 간부들의 휴양지이자, 모택동이 여름이면 수영을 즐기던 곳 북대하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중국대륙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북대하 부근 진황도시 노룡현에 우리조상들이 세운 고조선이 있었고, 그 유적이 폐허로나마 송나라시대까지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발해연안 북경부근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1500년 전 선비족 모용은의 비문에 나타난다. 남북조시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유신이 쓴 모용은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선비족은 삼국시대에 오늘의 하북성 일대에서 건국하였다. 모용은의 묘비명은 선비족이 하북성 일대에서 건국하기 이전에, 최초로 고조선이 이 땅에서 건국을 하였고, 뒤이어서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여기서 건국된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산해경은 서한시대에 유향(劉向)이 황실의 도서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책으로, 그때 이미 당시에 통용되지 않는 상고시대의 상형문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유향은 이를 하우(夏禹)시대 백익(伯益)의 저술로 보았다. 그렇다면 산해경4000년 전에 쓰여 진 책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선비족 모용은의 묘비명은 1500년 전 남북조시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유신이 썼다. 무경총요는 송나라시대 국가에서 편찬하였고, 낙사가 쓴 태평환우기는 송대 3대사서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유명한 책이다. 이들 두 책은 모두 1000년 전에 편간되었다.

 

4000년 전에 쓰여 진 산해경, 1500년 전에 쓰여 진 모용은의 묘비명, 1000년 전에 편간된 무경총요태평환우기에는 오늘날 북경부근 지역에 대륙고조선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시진핑은 중국 고문(古文)에 조예가 전혀 없는 백화문(白話文) 세대, 번체자(繁體字)를 모르는 간체자(簡體字) 세대가 만들어낸, 학문적 사기극인 동북공정의 논리에 따라, ‘한국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망언을 미국대통령을 만난자리에서 공개적으로 하였다.

 

  --- 북경지역 최초로 고조선. 고죽국. 선비족 모용씨. 몽골족. 명태조 주원장과 신라왕족 김함보의 후손인 청나라...

 

산해경, 선비족 모용은의 묘비명, 무경총요, 태평환우기의 기록에 따르면, 오늘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을 무대로 최초로 건국한 나라는 우리민족이 세운 고조선이다. 뒤이어 은나라 때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건국을 하였고, 삼국시대에 선비족 모용씨가 건국을 하였으며, 그 뒤에 몽골족이 중원으로 진출하여 북경을 수도로 하였다. 그 뒤 다시 명태조 주원장과 신라왕족 김함보의 후손인 청나라가 북경에 수도를 하였으며 지금의 중국공산당은 청나라를 이어서, 북경을 수도로 하고 있다.

 

이런 북경의 역사적 연혁을 살펴본다면 북경의 최초의 원주인은 한민족이고 오늘날의 북경 중남해에 있는 한족정권은 원주인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이 터닦아놓은 곳에 잠시 입주한 세입자에 불과할 뿐이다. 북경의 주인은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시진핑이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난날 중국대륙 북경 지역에서 건국의 첫 삽을 떴던 원주인의 노고를 무시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도적이 몽둥이를 들고 주인에게 덤벼드는 적반하장과도 같은 것이다.

 

산해경, 모용은 비문, 무경총요,태평환우기등의 기록에 따르면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가 아니라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 한국은 역사상 오늘의 중국을 만든 원류이고 중국공산당은 역사상 한민족의 뒤를 계승한 아류인 것이다.

 

  **3. 발해연안의 홍산문화가  중국문명의 모태이고,  그 주역은 고조선의 조상 조이족(鳥夷族)이다

 

1980년대에, 발해연안의 북쪽 요녕성 건평현(建平縣), 능원시(凌原市) 일대, 그리고 내몽고 적봉시 홍산 일원에서 제단, 여신묘, 적석총으로 상징되는 건국전야의 홍산문화가 발굴되었다. 만리장성 밖 한족들이 오랑캐의 땅으로 멸시해온, 내몽고 적봉시에서 중원의 황하문명의 상징인 앙소문화보다 연대가 수천년 앞서는, 홍산문화가 발굴됨으로써 중국문명의 발상지가 화하지역에서 동이지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화하족의 선진문화가 동이족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동이족의 선진적인 문화가 화하족의 후진적인 문화에 영향을 끼친 사실이 증명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중국문명의 서광으로 일컬어지는 이 자랑스러운 5천년 전, 홍산문화를 일으킨 주역은 과연 누구일까? 동북공정이라는 용어에서 보듯이 학문을 마치 공사판의 건축공정처럼 생각하는 중국공산당의 어용학자들은 지금 홍산문화를 일으킨 주역을 한족의 조상으로 날조하기 위해 온갖 추태를 다 벌인다. 하지만 5,000년 전에 만리장성 밖은 동이의 땅으로서 이곳이 화하족의 활동무대였음을 문헌적으로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를 찾기는 불가능하다.

 

중국대륙의 문명의 불꽃인 홍산문화가 발화한, 내몽고 적봉시 일대는 발해연안에서 북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다. 이 지역은 바로 4300년 전 고조선이 나라를 건국했던 곳이다. 한민족의 조상인 태양을 숭배하며 새를 토템으로 했던 조이들이 살았던 터전이다. 고조선은 4300년 전, 그러니까 한족이 그들의 첫 국가 하()나라를 건국하기 약 200여년 앞서, 단군이 아홉 개의 동이부족국가 구이(九夷)를 통일하여, 천혜의 땅 발해만 연안에 세운 중국대륙 최초의 통일 왕조이다.

 

산동반도, 요동반도, 한반도가 모두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지금의 하북성, 산서성, 내몽고, 산동성, 요녕성, 한반도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한다. 고조선은 한 개의 부족이 모여서 세운 국가가 아니라 아홉 개의 구이족을 통일하여 세운 중국의 첫 통일왕조였다는 것은, 명나라 때 중국인 학자 오명제가 쓴 조선세기구이군지(九夷君之)”라는 말이 잘 증명하고 있다. 고조선은 발해만을 중심으로 건국하여 지금의 북경 동쪽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수도가 있었고, 북경 남쪽에 있던 갈석산과 요수, 현재의 백석산과 역수유역이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다.

 

발해만 연안은 남쪽은 발해, 북쪽은 내몽고 초원, 동쪽과 서쪽은 농경지대로서 어렵과 수렵과 농경이 동시에 가능한 중국대륙에서 가장 살기가 좋은 천혜의 땅이다. 한민족의 조상들이 전 중국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발해만 일대를 선점하여 터를 잡고 살았다. 중국대륙의 토착민이었던 우리 한민족은 이런 천혜의 땅을 먼저 선점하여 여기서 선진적인 경제가 발달하였고 선진적인 경제의 기초위에서 홍산문화라는 중국대륙 최초의 문화가 발화했으며 그 토대 위에서 고조선이라는 중국대륙 최초의 국가 성립이 가능했던 것이다.

 

아홉 개의 부족 즉 구이족으로 형성된 동이족은 최초에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 아홉 개 동이족의 출발점 즉 동이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태양을 숭배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삼았던 조이족이었다. 조이족을 동이족의 시원으로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동이족의 시조 태호복희씨와 소호금천씨가 모두 새를 토템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중국대륙의 제1용과 제1봉황이 모두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 이것도 홍산문화가 조이족이 창조한 문화라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그리고 서경의 우공편에는 하나라 당시에 천하를 구주九州로 분할한 내용이 나오는데 거기에 기주(冀州)에 조이가 있었다고 나온다. 기주의 기()자는 북녘 북 자에 다를 이 자를 합친 글자로, 북방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상고시대의 기주는 오늘날의 하북성, 내몽고가 여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서경우공편에 오늘날의 홍산문화가 발굴된 지역에서 조이들이 살고 있었다라고 말한 것을 본다면, 홍산문화를 일으킨 주역은 조이라는 사실이 문헌적으로도 입증이 된다할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고조선시대에 발해만 연안에서 건국했을 뿐만 아니라 그 뒤 송사(宋史)백제 약유요서(百濟略有遼西)” “고구려 약유요동(高句麗略有遼東)”이라는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계속 홍산문화가 발굴된 하북성 내몽고 일대를 활동무대로 하면서, 중국역사상에서 동북이로 일컬어졌다. 또 우리민족은 고구려의 삼족오나, 백제 금동향로에 새겨진 봉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줄곧 새를 토템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 한국인은 바로 중국대륙 발해만 연안의 첫 통일왕조인 고조선의 후예일 뿐만 아니라, 중국문명의 초석을 놓은 홍산문화를 창조한 주역 조이족의 직계후손이 되는 것이다. 중국 대륙문명의 원류가 홍산문화이고, 홍산문화의 주역이 조이족이며, 새를 토템으로 하는 조이족의 혈통이 한국인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 때, ‘시진핑 주석의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발언은 역사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황당한 망언인 것이다.

 

시진핑 주석이 2017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망언을 해도, 문재인 정부가 엄중하게 대처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문재인 정권의 책임자들은 중국을 모시는 것 같은 저자세 처신에 대하여,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해야 할 것이다. [참고] 재외동포신문.

 

 

[참고] [한불통신], Agence Corée Presse Paris, ACPP/파리, 190911.

https://www.facebook.com/korea.press.production.acpp/

https://www.facebook.com/korea.press.production.acpp/photos/a.370654599622426/5160499327304572

[참고] ‘#213__ 백선엽 장군과 맥아더 장군’, 이기성, 2020.07.12. 조회 503.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666357

[참고] [위메이크뉴스], 2021.02.14.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0709190&memberNo=11029869&vType=VERTICAL

[참고] [페친] 김영기, 2021428.

https://www.facebook.com/origingoldsun

[참고] ‘#271__ 반중정서와 심백강 교수’, 뚱보강사, 이기성, 2021.04.29. 조회 258.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67428

[참고] 심백강 저,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2022.

https://youtu.be/sLbyQP1NQgA

[참고] [재외동포신문], 심백강 민족문화연구원장, 2021.10.25.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4861

[참고]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심백강 지음, 바른역사 출판사, 2021.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barcode=9791195284214

[참고]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목차

책 머리에

1. 발해를 끼고 앉아 대륙을 지배한 발해조선

2. 천하를 경영한 고구려 제국

3. 왕과 제후를 거느린 대륙백제

4.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5.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망언한 시진핑 주석에게 보낸 공개질의서(시진핑 망언에 대한 공개 질의서)

오늘의 중국이 있기까지 한족은 물론 조선족, 흉노족, 돌궐족,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등 아시아의 여러 민족의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보태진 것이다. 따라서 역사상의 중국은 조선족의 나라도 한족의 나라도 흉노족의 나라도 몽골족의 나라도 여진족의 나라도 아니며, 이들 민족이 함께 어울려 이룩한 나라다. 그래서 중국을 다민족 통일국가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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