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__ 차를 마셔요. 우파국민의 형성과정과 태극기 시위. 군인 박정희. 군인 전두환
- 뚱보강사
- 2025.09.2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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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__ 차를 마셔요- 우파국민의 형성과정과 태극기 시위- 군인 박정희- 군인 전두환-- 46ok
뚱보강사 이기성
1114__ 차를 마셔요. 우파국민의 형성과정과 태극기 시위. 군인 박정희. 군인 전두환
“차를 마셔요, 우리”, 이해인.
오래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찻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 마음에 끓어 오르는 담백한 물빛 이야기를
큰 소리로 고백하지 않아도,
익어서 더욱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기뻐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산을 닮은 어진 눈빛과 바다를 닮은 푸른 지혜로
치우침 없는 중용을 익히면서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함께 차를 마셔요.
오래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 세상 일들 혼자서 만들어내는
쓸쓸함, 남이 만들어 준 근심과 상처들을 단숨에 잊을 순 없어도,
노여움을 품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며, 함께 차를 마셔요.
차를 마시는 것은 사랑을 마시는 것, 기쁨을 마시는 것,
기다림을 마시는 것이라고, 다시 이야기 하는 동안,
우리가 서로의 눈빛에서 확인하는 고마운 행복이여.
조용히 차를 마시는 동안, 세월은 강으로 흐르고,
조금씩 욕심을 버려서 더욱 맑아진, 우리의 가슴속에선
어느날, 혼을 흔드는 아름다운 피리 소리가 들려올테지요...
우파국민의 형성과정과 태극기 시위
몇 년 전만해도 세복이, 철식이가 태극기 모임에 나가자고, 광화문으로 나오라고 전화, 페북, 카톡이 ‘깨톡’ ‘깨톡’했을텐데... 80이 되자 연락이 드물다... 다리가 아픈가? 허리가 아픈가? 비가 올 때도, 눈이 올 때도 서울은 물론 대전에서도 올라왔었는데...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한 정성수 시인 님이 올려주신 글입니다... 글제목: “우파국민의 형성과정과 태극기 시위의 역사적 의미” [프리덤뉴스]의 [최진덕 칼럼]입니다. 최진덕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철학), 2022년 6월 3일.
애국애족의 마음은 가득했지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 말고는 거의 없어... 박정희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길을 택했다... 혼란을 신속하게 극복한 인물이 군인 전두환... 실질보다 명분에 집착하고 군인을 저평가하는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파국민의 눈에, 전두환 정권은 타도해야 할 군사독재정권으로만 비쳐...
대규모 촛불시위는 한국현대사 속에, 처음으로 좌파국민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불길한 신호...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놀랍게도 전두환 이후 가장 선명한 우파노선을 걷기 시작... 불법사기 탄핵 덕분에, 태극기 시위가 등장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오히려 자신을 밑에서 받쳐줄 성숙한 우파국민의 존재를 확인하는 망외의 소득(望外ぼうがいの 喜よろこび)....
문재인과 주사파 일당은 불법사기 탄핵을 틈타, 우파정부를 하이재킹한 다음, 5년 내내 좌파국민과 우파국민을 갈라치고, ‘인민민주주의’식의 사회경제정책과 반미반일 친중친북 외교정책을 강화했지만, 우파국가 대한민국의 기본 틀을 허물지는 못해...
우파언론과 우파정당과 우파정부를 다시 만들어야...
우파국민의 형성과정과 태극기 시위의 역사적 의미
최진덕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철학)
단군 이래 처음으로, 1948년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이 민주공화국의 경제적 기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였고, 그 정치체제는 자유민주주의였다.
대한민국은 우파국가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파국가를 받쳐주는 우파국민이 아직 없었다. 애국애족의 마음은 가득했지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대통령 이승만 말고는 거의 없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민주주의를 떠들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중)민주주의 간의 구별은 늘 모호했다. 이런 상황에 1946년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0퍼센트가 경제체제로는 사회주의가 좋다고 답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지식인층의 선호도는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건국 당시 대한민국은 한 마디로, 모래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그 모래를 다져 단단한 땅으로 만드는 과정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파국민이 없는 우파국가는 1950년대에는 이승만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6.25 남침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그의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통치행태는 독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부정선거(1960년 3월 15일, 4대 대선·부선서 자유당 정부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어난 4.19 학생의거는 독재를 몰아냈으나,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민이고 우파국민은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학생들의 때 이른 민주화 요구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우파와 인민민주주의 좌파 간의 구별이 모호한 가운데, 정치사회적 혼란을 불러왔다.
군인 박정희
이 위기를 극복한 인물이 군인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불과 18년 사이에, 기아선상의 가난한 농업국가를 어엿한 산업국가로 바꾸었다. 천지개벽과도 같은 이 기적과 함께, 중산층 우파국민이 비로소 탄생했다. 그 이전에는 우파국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위대한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지만, 먹고살만한 수준의 사유재산을 가진 자유시민의 양성이 없이는 자유민주주의가 불가능함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층의 고급 취향과는 안 어울리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통속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백 년 전 명치시대의 일본처럼 국가 주도로, 기업과 기업인을 키우고 시장을 확대하면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바깥으로는 북한의 남침 위협이 가중되고, 안으로는 자유시민 즉 우파국민이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 경제와 안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자니, 정권 안정이 모든 사업의 대전제였다. 1969년 3선개헌과 1972년 시월유신은 정권 안정을 위해 박정희가 내린 고뇌에 찬 결단이었지만, 그의 애국심을 이해해주는 지식인은 거의 없었다. 그 당시에, 대학생,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에게 박정희는 그저 타도해야 할 군인 독재자에 불과했다.
당시의 상황(지적 수준)으로는, 박정희에 대한 이해가 거의 불가능했던 것 같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덕분에 등장한 중산층 자유시민들 즉 우파국민도 독재자 타도에 동참했다. 1979년의 10.26은 표면적으로는 김재규가 저지른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었지만, 그 속내를 더 들여다보면, 박정희가 낳은 자식들이 박정희를 죽인 역사적 비극이기도 했다.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꾀했다면, 경제개발 따위는 하지 말고, 자신이 살기 위해 나라를 말아먹은 김일성처럼, 철저하게 독재를 해야 옳았다. 하지만 박정희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길을 택했다. 우파국민(층)이 형성은 되었으나, 아직 성숙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터져 나온 민주화 시위는 4.19 혁명 때처럼 혼란을 불렀다.
4.19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헌법 유린, 부정부패,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1960년 2월 28일부터 4월 26일까지 전국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이다.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학생들의 시위에 시민들이 참여함으로써, 혁명으로 발전했고, 경찰의 유혈진압으로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고, 4월혁명기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국 단위 민주화운동으로, 이후 한국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민주화 세력의 요구에는 또 다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가 애매하게 섞여 있었다. 1980년 광주사태로 인해 혼란은 더욱 증폭되었다.
광주사태는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및 전라남도에서 시민들이 신군부에 맞서 싸운 대중봉기 형태의 항쟁으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라 부른다. 운동 참여자들은 계엄령 철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공수여단의 강경진압으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5월 21일 시민군을 조직하여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몰아냈다.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의 진압작전으로 항쟁은 종결되었다. 희생자는 사망자 165명, 행방불명자 65명, 상이 후 사망자 376명 등 606명으로 집계되었으나, 암매장자 및 미신고 인원을 고려했을 때에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인 전두환
1980년 이 혼란을 신속하게 극복한 인물이 군인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박정희 이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했지만, 혼란을 극복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힘으로 정권을 안정시키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민주화 세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그의 판단이 옳은지 여부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 두고두고 논란거리로 남겠지만, 북한의 남침 위협과 우파국민의 미성숙, 일부 정치꾼들의 수상한 선동, 그리고 제5공화국의 혁혁한 성취를 고려하면, 전두환이 옳았다.
전두환은 북한의 위협에 맞서 안보를 지키는 한편,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정상 궤도에 올려놓았고, 중산층 우파국민의 수를 크게 늘렸다. 1988년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대한민국의 도약을 전 세계에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자유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우파국민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①실질보다 명분에 집착하고, ②군인을 저평가하는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파국민의 눈에, 전두환 정권은 타도해야 할 군사독재정권으로만 비쳤다. 우파국민의 성숙도가 아직 낮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다.
총칼로 권력을 잡은 군부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떠나는 것은, 중남미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데에는 넥타이부대를 앞세운 민주화 세력의 공로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미국식 자유민주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엘리트 장교들의 애국심과 자부심, 그리고 자제심이 더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1980년대 말 민주화의 일등 공신은 아직 성숙단계에 이르지 못한 우파국민이 아니고, 그들의 요구 앞에 자기희생을 각오한 전두환과 신군부였다는 사실을 눈치 챈 우파국민은 아직도 거의 없다.
전두환은 2021년 사망할 때까지 민주화를 내세우는 좌파세력에 의해 30년 넘게 조리돌림을 당했고, 우파국민은 그냥 보고만 있었다. 전두환 육군 소장은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을까? 설령 미리 알았다 해도, 군인 전두환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바보짓을 감행했을 것이다.
[참고] [가톨릭평화신문] 문채현 기자, 2019.01.02., ‘이해인 수녀 시집’, 25년 만에 개정판. 사계절의 기도, 이해인 지음 / 분도출판사.
https://news.cpbc.co.kr/article/742858
[참고] 정성수,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역임.
https://www.facebook.com/sungsoo.chung.5
[참고] [프리덤뉴스] [최진덕 칼럼] 우파국민의 형성과정과 태극기 시위의 역사적 의미, 2022.06.03.
http://www.freedom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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