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__ 1953년 이승만과 젤렌스키의 외교
- 뚱보강사
- 2022.08.05 15:33
- 조회 218
- 추천 1
=
570__1953년 이승만과 젤렌스키의 외교----10ok
뚱보강사 이기성
570__ 1953년 이승만과 젤렌스키의 외교
노르웨이에서 살던 친구와 스위스에 살던 친구가 이수역 근처 아파트로 이사왔다. 한국서는 자가용 자동차가 필요 없겠단다.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역이 집근처에 있어, 시내에 차를 몰고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 주차장 찾기만 힘들다고. 뚱보강사를 만나러 이수에서 과천으로 버스를 타고 왔다. 하필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과천KT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기다리면 픽업하기로 했다. 약속 시간 20~30분 전에 오는 친군데, 20분 전에 차를 가지고 나갔는데, 보이질 않는다. 안 왔을 리가 없는데...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에 있냐니까 버스, 정류장에 있다는 거다. 아니, 안 보여서 전화하는데...
자세히 보니까 버스정류장에 방 같이 생긴 곳이 있다. 비가 와서,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단다. “원더풀~” 하면서 난리다. 버스정류장 투명 박스 안에 에어콘이 있다는 거다. 몇 번 노선 버스가, 몇 분에 도착한다는 글자 안내와 스피커로도 안내... 그리고 편안한 의자... 이거 세계 어느 곳에서도 못 보았단다. ‘한국의 명품 버스정류장’을 세계에 자랑해야 한단다. 에어콘 달린 세계 최고의 버스정류장. 겨울엔 엉덩이가 따땃한 의자~~~ 과천시 버스정류장 최고... [페북]에 올렸더니 김태영님은 “넘 괜찮은 동네입니다”... 제천시에 계신 김윤식님도 “교수님 공감합니다... 시골버스정류장에도 에어콘바람이 나오는 곳 있어요. 공중화장실도 좋고,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입니다”...
--- 언론 좌파 노조 척결... 영남일보 선임기자 임준식님이 ‘여론조사 기관과 언론에 깊이 꽈리 튼, 좌파 노조 척결이 매우 시급하다’고 글을 올렸다. 586 운동권 좌파가 장악한 민주당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발목을 잡더라도, 윤 대통령은 당초 마음을 먹은 대로 밀고 나가면 된다. 어차피 시간은 자유 우파와 윤 대통령 편에 있다. 5년이면 충분하다. 그래도 모자라면 다음 5년은 한동훈 장관이 받으면 된다.
건국대통령 이승만 서거 57주기 추모식
건국대통령 이승만 서거(1965년 7월 19일) 57주기 날... 한미동맹·자유민주·시장경제·부국강병, 이승만(1875~1965)의 헌신이었다… 박민식 보훈처장의 추모사 전문...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에 바탕 둔 대한민국의 토대 마련한 자유주의자의 삶"...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피와 땀으로 헌신한 위대한 업적 함부로 재단돼"... "역사적 평가 다를 수 있지만… 위대한 지도자들 행보는 객관적으로 평가돼야"... 건국대통령 이승만... [뉴데일리] 안선진 기자가 보도했다(2022년 7월 19일).
7월 19일 '건국대통령 이승만 서거 57주기 추모식'에서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낭독한 추모사 전문이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선진국 반열에 올라 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수십 년 동안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오늘날 교육과 의료 등을 원조하는 공여국으로 발전했습니다. 6·25전쟁 직후 67달러에 불과했던 국민소득은, 한 세기가 되기도 전에 3만 달러를 넘어섰고, 인구 또한 50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는 전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극적인 성공의 역사이며, 그 대한민국의 시작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계셨습니다.
일찍이 왕의 나라를 국민에게 돌려주려다, 5년 7개월의 옥고를 치른 공화주의자의 삶,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의 선구자이자 외교관으로, 대한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의 만방에 알렸던 독립운동가의 삶,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했던 자유주의자의 삶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일생은 격변했던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심이자, 혁명적 삶 그 자체였습니다. 농지개혁, 의무교육 도입,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을 통해 부국강병의 초석을 다졌고, 특히 한미동맹은 자손만대 번영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야기처럼, 오늘날 국가 번영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내외 귀빈 여러분!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성만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합니다. 공과 과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일방적인 비판에 가려서, 공화주의자와 또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반공 자유주의자로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기여했던 수많은 업적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마땅히 기려야 할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이 묻혀서는 결코 안 됩니다. 비단 이승만 대통령뿐만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모든 분들은 마땅히 추앙받을 자격과 권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업적은 제대로 조명 받거나 평가 받기는커녕, 이념에 따라 또 진영에 따라 축소되거나 왜곡되는 등,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벌어져 왔습니다.
흑백논리로 규정지을 수 없고, 또 규정지어서도 안 되는 일들, 특히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피와 땀으로 헌신한 위대한 지도자들의 행보와 업적이 함부로 재단돼 규정되었습니다. 이제는 이승만 대통령을 음지에서 양지로 모셔야 할 때입니다. 역사적 평가는 비록 다를 수 있지만 선대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행보는 있는 그대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돼야 할 것이며, 결코 이념이나 진영에 연결을 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밝혀진 공과 과 또한 진영을 대변하는 우상화, 또는 상대를 비판하는 수단이 아닌, 다음 세대가 반면교사의 교훈으로 삼는 전통이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대한민국을 위해 앞서 나간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아시다시피 자금 우리 경제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국론을 분열시키는 지역·계층·세대 간 갈등과 분열을 떨쳐내야 합니다. 상생과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단순하지만 뜻 깊은 말씀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새겨야 할 때입니다. 우리 정부는 격변하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속 이승만 대통령의 헌신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위기를 헤쳐 나갔던 용기와 지혜, 숭고한 애국심이 미래에 제대로 이어져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승만 대통령께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바칩니다. 뚱보강사 칼럼 ‘#215__ 이승만과 윌슨주의와 레닌주의’에 1963년에 독립한 아프리카 ‘케냐공화국’의 초대 대통령과, 1970년에 독립한 태평양 ‘피지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슬로건을 따라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 <<이승만 다시보기>> 책의 저자인 인보길 기자가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글을 기고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합의 항목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결재 문서’로 가져오라”...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한미동맹을 협상하면서, 미국 대통령 특사에게 요구한 말이다.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40년 전의 1994년의 ‘부다페스트 각서’가 화제에 올랐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소련 연방 해체 때, 우크라이나 지역 핵무기를 모두 소련에 반환하면, 유엔이 우크라이나 안보를 지켜준다는 요지의 문서다. 이때 소련 편을 든 것이 미국과 영국이다. 강자는 강자편이다. “강대국은 믿어선 안 된다. 미국은 한민족을 번번이 배신하였다”며 미국과 싸운 독립혁명가 이승만 대통령, 휴전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협상할 때, 그 진수를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미국대통령 특사 로버트슨과 1대1 협상 17일간, 한반도서 전쟁하던 세계는, 손을 놓고 경무대만 바라보았다. 약소국 대통령이 글로벌 헤게모니를 한 손에 쥔 결정적 국제 리더십, 며칠 전 반공포로 석방의 전술이 가져온 결과다.
--- 다윗과 골리앗의 줄다리기... 이승만은 요구한다. “휴전협정과 한미동맹은 무관하다. 미국이 내말 안 들어 전쟁이 났으니, 한미동맹 선결이 미국 의무이다.” 미국은 반대한다. “휴전에 동의부터 하라. 미국은 1대1 군사동맹은 맺지 않는다.” 이승만의 협상은 협상이 아니라, 대한민국 생존과 번영을 담보할 영구평화체제 구축이 목표다. 로버트슨 특사는 날마다 진땀을 빼야했다. 이승만은 늘 역사 강의부터 대화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아느냐? 루즈벨트 대통령은 우리민족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한반도를 일본에 내주었다. 이것이 ①첫째 배신이요. 38선을 그을 때도 일언반구 없이, 멋대로 소련과 합의한 것이 ②두 번째 배신이요. 이번에 우리가 결사적으로 휴전을 반대하는데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니 당신네는 ③세 번째 배신을 하고 있다. 기독교 국가 미국이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느냐?”... 한 가지 합의에 접근하면 새로운 요구를 들이대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로버트슨은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모처럼 합의 된 항목에 대하여도, 이승만은 “당신 말은 못 믿는다. 백악관 대통령의 결재를 받은 문서로 가져오라” 말하고선, 훌쩍 나가버린다. 로버트슨은 갈수록 이승만을 존경하게 된다.
협상이 막판에 이르렀을 때, 이승만은 경회루 연못에 나가 낚싯대를 던지고 앉았다. 몇 시간이 지나도 꼼짝 않는 대통령을 기다리다 못해, 기자들이 비서에게 묻는다. “잉어는 몇 마리나 잡으셨나요?” 비서가 대답한다. “바구니가 비어 있습니다.” 이승만은 기도하고 있다. 휴전에 동의하지 않으면, 조약체결을 못한다는 미국의 협박 때문이다. 낚싯대를 드리운 지 4시간쯤 지나서야 이승만이 일어섰다. 79세 주름진 얼굴에 두 눈은 눈물로 벌개져 있었다. 2주일도 넘는 협상이 어렵사리 끝나고, 공동합의문 발표 단계에 왔을 때 이승만은 한 장의 메모를 특사에게 준다. 거기엔 딱 한 줄로 이렇게 찍혀있었다.
“대한민국은 통일 없는 휴전에, 찬성할 수 없다. 다만 미국의 행동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낮에나 밤에나 걸어가면서도, 기도하며 하나님께 묻고 물어 얻어낸 이승만의 결론이다. 기막힌 협상의 묘수! 숙원의 통일기회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승만은 미국의 발목에 ‘단독북진 통일’이란 쇠사슬을 묶어두면서, 휴전 반대를 용어적으로 슬며시 감춘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피를 토하는 ‘양보’였다. 휴전협정에 새로운 조항이 신설되었다. 휴전 후 90일 내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참전국들이 협의한다는 내용이다. 다음해 뒤늦게 소집된 소위 제네바 평화회담이 그것이다.
--- 마지막 쟁점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 7월27일 판문점서 휴전협정이 체결된 며칠 후, 미국무장관 덜레스가 달려왔다. 한미상호방위조약 문안을 매듭짓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이 참에 이승만의 ‘단독북진 통일’ 열망을 반드시 꺾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NATO처럼 공산군 재침시 미군의 ‘자동개입’을 요구하였고, 덜레스는 반대하였다. 90일내 평화회담을 열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뤄낼 자신이 있다며 이승만을 설득하려 애쓴다. “전쟁해서도 이루지 못한 통일을, 테이블에서 얻겠다고? 하하” 이승만은 웃었다.
하지만 조약문 협상 책임자가 문안을 가져왔을 때 ‘자동개입’은 없었다. 이승만은 격노한다. “이것은 알맹이 없는 종이쪼가리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 휴전협정도 허사야, 허사… 모든 게 원점이야.” 그러나 어쩔 것인가. 결국 자동개입 대신 ‘한국 영토 내, 미군 주둔”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 제네바 회담 파탄… 대미투쟁 제2라운드... 휴전 후 90일이 다 되도록 평화회담은 감감소식이다. 이승만은 펄펄 뛴다. “휴전협정은 무효다. 미국이 국제법을 위반했다. 국군은 단독 북진 통일하겠다.” 당황한 미국이 서둘러 이듬해 1954년 6월에야 제네바 회담이 열렸지만, 예상대로 공산권 선전장으로 변했고, 우여곡절 끝에 한국대표단 철수, 미국도 이승만에게 약속한대로 철수해야 했다. 이승만은 또 직격탄을 날린다. 육해공군 전투 비상령을 발표하고, 미국 체재 장교들에게 즉시 귀국명령을 내린다. 국회에서 비준한 한미방위조약의 비준서 교환도 무기연기다. “이승만은 미쳤다. 단독북진이라니 국가자살 하려느냐? 한미동맹 철회해도 좋으냐?” 아이젠하워는 뿔이 났다. 이승만도 한 치의 후퇴 없이 정면 대결한다. “자살도 우리 주권이다. 휴지조각 조약은 깰 테면 깨라.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어쩔 수 없이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달래려 공식방미 초청한다. 33년간 독립운동을 한 제2의 고향 미국을 대통령이 되어 찾은, 이승만의 방미기록들은 국회 양원합동회의 연설을 비롯, 수많은 단체와 각 지역 순방 연설문만 해도 두꺼운 책이다. 아이젠하워와 두 차례 정상회담은 이승만이 ‘고얀 사람” 소리칠 정도의 정치투쟁이었다. 미국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영웅 퍼레이드'를 베풀어 이승만을 '자유세계의 리더"로 대접하였다.
한미동맹 발효! 1954년 11월 18일
--- 마침내 한미합의각서가 발표되었다... 이승만이 요구한 경제군사원조 10억 달러 제공, 경제 재건자금과 자주국방에 필요한 군사력 증강 및 무기 현대화를 확보한 것이다. 미국의 원조는 해마다 박정희 집권 때까지 계속된다. 총액이 약 30억 달러. 이때 방미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전리품은 주한미군의 최전방 주둔이다. 조약문에 ‘자동개입’이 빠진 대신, 미군 2개 사단의 휴전선 침략루트 배치, 즉 ‘인계철선’을 얻어낸 이승만의 집념을 어느 누가 흉내 낼 수나 있었을까? 합의각서 교환과 동시에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도 그제야 수교하였다. 그 순간 한미동맹 발효! 서울 조인 15개월이 지난 1954년 11월 18일이다.
[참고] 임준식, 영남일보 선임기자.
[참고] [뉴데일리] 안선진 기자, 2022-07-19.
[참고] ‘#215__ 이승만과 윌슨주의와 레닌주의’, 뚱보강사, 2020.08.09. 조회 588회.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668988
[참고] 인보길 [이승만 현대사-위대한 3년], [이승만 다시보기] 저자.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66570617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