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__쇼팽 퀴리 폴란드 민주화
- 뚱보강사
- 2022.05.1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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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__쇼팽 퀴리 코페르니쿠스 바웬사 폴란드 민주화-----11ok
뚱보강사 이기성
509__쇼팽 퀴리 폴란드 민주화
'폴란드'는 영어로 국가 명칭이고, 폴란드어로는 'Polska'(폴스카)이다. '폴란드' 혹은 '폴스카'라는 서슬라브족에 속하는 부족 중 하나인 '폴란인(Polanie)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겨울 영하 30도에서 여름 영상 35도의 기후. 폴란드는 유럽 한복판 중부 유럽에 위치한 국가로 수도는 바르샤바이다. 서쪽에는 독일, 남쪽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동쪽으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북쪽에는 발트 해와 러시아, 리투아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다. 국토 총면적은 31만 2679 km²로 유럽연합 6위이며, 인구는 2020년 기준 3785만 명으로 유럽연합 5위 국가다. 인구의 97% 이상이 폴란드인(Poles)으로, 대한민국에 버금가는 단일민족국가이다.
원래는 다민족국가였지만, 폴란드 땅에 대대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에서 대부분 사망하거나 이스라엘이나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1918년 10월 독립 이후에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획득한 동부지역 영토를 소련에게 재차 빼앗기고, 그 대신 보상으로 패전국 독일의 영토였던 오데르강 이동 지역과 동프로이센 남부 지역의 영토들을 새로 얻었는데, 이 일대의 원주민인 독일인들을 독일 본국으로 축출하고서 그 자리에 지금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 리투아니아 수비우키 지역 등 소련이 빼앗아간 동부 영토에서 살던 폴란드인들을 이주시켰다. 인구의 90%가 가톨릭을 믿는다.
폴란드는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와 함께 비세그라드 그룹(Visegrád Group)이라 하여 지역협력기구를 창설했는데, 이 네 나라는 옛 공산권에서 체제 전환을 경험한 국가들 중 가장 성공적으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성장을 이루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1년 기준으로 서유럽/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소득 수준이 많이 낮은 편이다. 한국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유럽연합으로 묶인 덕에 국민들의 노동 이주가 쉬우며, 소득 수준이 높은 서유럽, 중부유럽, 북유럽 등지로 가서 일하고 있다. 다른 옛 동구권 국가들처럼 출산율이 1.3명대에 불과해서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그래서 2020년대 후반이 되면 노동력 부족 현상에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 동남아 등지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있으며, 아시아계 이민자들도 받아들이는 추세이다. 동구권 붕괴 이후에, 서방 진영으로 노선을 바꿔 유럽연합과 NATO에 가입했으며, 오늘날에는 유럽 안보의 핵심을 담당하는 국가이고, 러시아를 견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레흐 바웬사
--- 폴란드 정부는 중부유럽과 동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사회주의를 버렸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9년 초반, 전 지역으로 퍼져나간 협상으로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이 협상은 사회주의 진영과 반대파의 '원탁 회의'로 불렸다. 대다수의 찬성에 의해, 당시 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끌던 폴란드의 자유노조 '연대'의 합법화와, 1989년 6월 4일의 자유 선거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이것으로 '연대'를 이끌던 레흐 바웬사(Lech Walesa, 1943~)는 198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89년 자유노조는 합법화 되었으며, 새로운 의회에서 99%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1990년 12월 레흐 바웬사는 민주화된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1990~1995)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개혁의 부작용으로 실업이 증가하고 경제난이 가중되는 등 국민의 불만과 시위가 확산되자, 의회를 해산하고 1993년 9월 총선거를 실시, 신정부를 출범시켰으나, 1995년 대통령선거에서 전 공산당원 크바스니에프스키(Aleksander Kwasniewski)에게 패배, 연임에 실패했다. 크바스니에프스키(1954~)는 1990년 공산당이 해체되자 ‘민주좌파연합’을 조직하여 의장직을 맡았고,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집권 중에는 친 서방정책을 채택하여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였다. 2000년 10월 재선에 성공하였다.
폴란드는 유럽에서도 가장 친미적인 국가이기도 하다. 2015년에 ‘법과 정의당’ 정권이 들어선 후로는 유럽연합과의 갈등이 심각해졌다. 미국에서는 45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2017.01~2021.01) 정권이 들어서서 관계가 크게 악화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 ‘법과 정의당’의 낙태금지법 강행과 유럽연합 탈퇴 시도까지 일어나, 현재는 정치적으로 많이 혼란스럽다.
--- ‘법과 정의당’은 2001년 레흐 카친스키,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형제에 의해 창당되었다... 민주화의 주역인 레흐 바웬사와 같이 투쟁한 적이 있지만 중도적인 노선을 표방한 바웬사와, 선명한 우파 노선을 표방한 카친스키 형제와 갈등이 벌어졌고, 결국 카친스키 형제를 위시로 한 연합 내 우파가 탈퇴해 ‘법과 정의당’을 창당한다. 법과 정의당은 총선에 도전했지만, 이 당시, 창당 행위가 역으로 우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결국 우파 양당은 구 통일노동당의 후신인 ‘민주좌파연합’에 패한다. 법과 정의당은 44석을 얻어 원내 4당에 그친다. 그러나, 구 공산정권의 후신 세력이 재집권했다는 사실에, 민주/보수 세력은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다시 연합하여 민주좌파연합 정권에 맞서게 된다.
2002년~2004년 민주좌파연합 정권은 대규모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급속도로 인기를 잃었고, 2005년 총선에서 ‘법과 정의당’·‘시민연단’의 연합은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대선에서도 레흐 카친스키(2005.10~2010.04 폴란드 대통령)가 당선된다. 그러나 2007년 조기 총선에서, 보수주의 중도우파 정당인 ‘시민연단’에 패한다. 현재는 ‘법과 정의당’ 대변인(2013~2014) 출신인 안제이 두다(Andrzej Duda, 1972~)가 연임에 성공하여, 폴란드 대통령(2015.08~)으로 재직 중이다.
코페르니쿠스
‘지구가 돈다’의 ①코페르니쿠스(1473~1543) 신부... 피아노 시인 ②쇼팽... 라듐 발견 ③마리 퀴리... 폴란드 출신의 유명 인물들... 어두웠던 근대 역사에 비해서 상당히 많은 유명인을 배출한 나라이다. 16세기에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있었고, 17세기에는 서구 문명의 수호자로 칭송받았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와 오늘날 별자리의 탄생 주역들 중 하나인 천문학자 헤벨리우스가 있었다.
--- 자전과 공전(지구가 돈다)을 주장한 지동설(태양중심설)의 제창자로 알려진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신부는 이탈리아 유학중에, 그리스의 고문헌을 통해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을 알게 된 후, 폴란드로 돌아와 자신의 ‘태양중심설’ 천문학을 ‘요강(要綱)’ 형식으로 서술해서 유포시켰다... 천문학 체계로서 전개한 것은 1543년 그가 임종할 때에 도착한《천구(天球)의 회전에 대하여》 책의 초판 인쇄본에서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이 책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천문학 체계에 대치되는 본격적인 지동설 천문학 체계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또 당시 활발해지기 시작한 인쇄매체를 이용함으로써 혁명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논의에만 몰두하는 당시의 스콜라학의 학통에서 벗어나, 천체관측과 궤도계산(天球座標系; Celestial Coordinate System)을 위주로 하는 실지천문가였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이라는 지동설 주장은 발표되고 나서 440년이 지난 뒤에야, 로마 가톨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코페르니쿠스 신부는 파도바대학교, 볼로냐대학교에서 공부했고, 폴란드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1520), 폴란드 알렌슈타인교회 평의원(1516), 폴란드 엘름란드교구 회계감사역(1516), 폴란드 프라우엔부르크성당 신부(1512)로 근무했다.
쇼팽
--- 피아노와 쇼팽(1810~1849)... 쇼팽은 프랑스어 교사 아버지와 폴란드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 어머니한테서, 네 아이 중의 하나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와 가까운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1810년 3월 1일). 평생 피아노곡 밖에는 쓰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은, 교향곡에 있어서의 베토벤, 실내악곡에 있어서의 하이든, 가곡에 있어서의 슈베르트처럼, 피아노에서는 쇼팽이다. 쇼팽의 음악에 몸을 맡기는 모든 사람은, 달빛에 정화되어 고요히 빛나는 마음속에서 꿈꾸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러나 그 환상적인 시인 쇼팽도, 한편으로는 고국 폴란드를 생각할 때는 열렬한 애국의 정으로 건반을 피로 물들이는 정열의 시인이기도 했다. 쇼팽의 주요작품에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제2번, 피아노 소나타 제2번~제3번, 발라드 제1번~제4번 뱃노래 F#장조 Op.60, 자장가 D♭장조 Op.57, 연습곡 제1번~제24번, 즉흥곡 제1번~제4번, 마주르카 제1번~제51번, 녹턴 제1번~제20번, 폴로네이즈 제1번~제7번, 전주곡 Op.28, 스케르초 제1번~제4번, 왈츠 제1번~제14번, 발레 음악 「레 실피드」, 환상곡 f단조 Op.49가 있다.
쇼팽은 6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8살 때 이미 신동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2살 무렵부터 바르샤바 음악원의 원장에게 이론과 작곡을 배웠고, 아달베르트 지부니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이후 쇼팽은 정식 피아노 레슨을 받지 않고 작곡에 전념했으며, 1824년에 들어섬과 동시에 갑자기 음악에 몰두하여, 그 이듬해에 최초의 작품 「론도」를 출판했다. 18살 때인 1828년 아버지의 친구 야로츠키 박사와 함께 베를린으로 갔는데, 거기서 받은 자극으로 귀국 후 그의 음악 활동은 한층 활발해졌다. 20살 때 빈에 나갔는데, 그는 그 곳에서 모국의 슬픈 소식을 들었다. (1825년 12월 1일 러시아의 황제로 즉위한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 니콜라이 1세는 반동적인 군주로 폴란드인들을 탄압하였고, 이에 따라 1830년 11월 폴란드인의 봉기가 발발했다. 그러자 니콜라이 1세는 1832년 폴란드 입헌왕국의 자치권마저 박탈하고 러시아 제국에 완전히 귀속시켰다.)
함께 빈에 나간 친구들이 모국의 위급에 앞을 다투어 귀국할 때, 몸이 쇠약하여 친구와 같이 폴란드로 귀국하여 군대에 갈 수 없었던 쇼팽은 피아노에 의지해서, 애국의 열정을 작곡에 기울이는 수밖에 없었다. 쇼팽은 파리로 나갔다. 동경하던 파리는 무명의 천재를 당장 받아들여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폴란드에 호의를 보였던 프랑스의 사교계는, 얼마 후 섬세하고 고상한 쇼팽의 피아노 연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가 재빨리 이 천재를 인정하여 파리 악단에 소개했기 때문에, 파리는 안심하고 그를 피아노의 명연주가로서 환영했다.
여류 작가 조르즈 상드(George Sand, 1804~1876)와의 교제는 유명하다. 상드와 쇼팽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남쪽에 있는 휴양지 마요르카 섬에서 사랑의 기쁨을 누렸는데, 당시 결핵을 앓던 쇼팽의 병세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래도 섬의 한 때를 아끼기라도 하듯이, 그는 여기서 많은 주옥같은 명곡을 썼다. 파리로 돌아간 두 사람은 마침내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때 병세가 조금 회복되어 영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그것이 그를 과로에 빠뜨려 1849년 10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쇼팽이 1830년 폴란드를 떠날 때 친구들이 병에 담아 준 조국의 흙에 덮여, 페르 라세즈의 묘지에 묻혔다.
쇼팽은 생애를 통해 피아노곡 작곡에 전념했다. 그러나 예외로, 6개의 관현악곡 · 3개의 소나타 · 3개의 실내악곡 · 17개의 가곡도 있다. 또 즉흥곡 · 뱃노래 · 녹턴 · 마주르카 · 스케르초 · 왈츠 · 폴로네이즈 · 연습곡 · 전주곡 · 발라드 등은 어느 것이나 쇼팽이 개척한 피아노곡 형식이었고, 그 형식 위에 시정이 담겨 정열의 꽃이 피었다.
--- 19세기~20세기에 들어와서 피아니스트 쇼팽, 쿠오 바디스 등을 지은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노벨문학상 수상자),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한, 흔히 퀴리 부인으로 한국에 알려진 마리 퀴리(노벨물리학상, 노벨화학상 수상자), 폴란드 자유화의 기수 레흐 바웬사(노벨평화상 수상자), 제264대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천재 물리학자 테오도어 칼루차, 첫 외계행성을 발견한 알렉산데르 볼시찬,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사람들이 있어 약소국으로 파묻힐 폴란드의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마리 퀴리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출생한 물리학자·화학자인 마리 퀴리(Marie Curie, 의 국적은 프랑스이다. 남편과 함께 방사능 연구를 하여 최초의 방사성 원소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였다. 마리 퀴리(1867~1934)는 노벨물리학상(1903), 노벨화학상(1911)을 받았다. 퀴리의 결혼 전 이름은 스쿼도프스카(Maria Skłodowska)이다. 당시 폴란드는 분할 지배하에 있었는데, 바르샤바는 러시아령이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제정 러시아의 압정(壓政)을 겪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김나지움의 수학 및 물리학 교사였다. 10세 때 어머니를 잃고,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독학하였다.
당시 폴란드와 독일에서는 여자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마리 퀴리는 189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물리학을 전공하였고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5년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여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으며, 남편과 공동으로 연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물리학계의 뢴트겐이 X선을 발견, H. 베크렐이 우라늄 방사능 발견함에 자극받아 퀴리 부부도 방사능 연구에 착수하였다. 부부는 방사능의 세기를 측정하는 데에 전기적 방법(피에르가 발견한 압전기의 이용)을 사용했다. 그것은 방사선의 정량적 측정법으로서 베크렐의 사진법(寫眞法)보다 편리한 것이었다. 토륨도 우라늄과 마찬가지의 방사선을 방사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방사능(radioactivity)'이라 명명하였다.
퀴리 부부는 방사능이 원자 자체의 성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여러 시료에 대하여 측정하던 중, 우연히 우라늄 광물 피치블렌드가 우라늄 자체보다도 강한 방사능을 보인다는 것을 알고, 그 속에 미지의 강한 방사성 성분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 이것의 추출을 시도하였다. 보헤미아의 요아힘스탈에서 산출되는 피치블렌드에서 방사되는 방사능을 바탕으로 화학 분석을 하여(방사화학분석법의 시초), 1898년 7월 ①폴로늄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마리 퀴리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이어 그해 1898년 12월 ②라듐을 발견하였다.
①폴로늄과 ②라듐 두 원소는 방사성 원소로서 발견된 최초의 것으로, 특히 라듐은 우라늄에 비하여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발견은 학계에서 새 방사성 원소를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는 소르본대학 이학부 교수, 마리는 그 실험실 주임이 되었다.
1906년 남편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어 사망한 뒤에도, 단독으로 방사성 물질을 계속 연구하였다. 1906년 5월에는 남편의 후임으로 여성으로서 최초의 소르본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07년 라듐 원자량을 더욱 정밀하게 측정하는 데 성공하고, 1910년에는 금속 라듐을 분리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1914년 소르본 대학에서는 그녀가 연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라듐연구소를 건립하였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해오자 라듐을 스위스로 옮겼다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전쟁 중 장녀 이렌과 함께 부상자 치료를 위해 뢴트겐 투사기를 보급하는데 노력하였고, 많은 부상자들이 목숨을 구하였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파리 의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라듐연구소는 이후 파스퇴르 실험소와 퀴리 실험소가 되었는데, 그녀는 퀴리 실험소 소장으로서 프랑스의 과학 연구에 공헌하였다. 1911년 라듐과 폴로늄 발견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후 연구소의 운영은 물리학자인 장녀 이렌에게 맡겼으며, 이렌은 마리 퀴리의 실험 조수로 있던 F. 졸리오 퀴리와 결혼한 뒤, 1935년 남편과 함께 인공 방사능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마리 퀴리는 그동안의 실험으로 몸이 쇠약해져, 스위스에서 요양을 하였지만 1934년 7월 4일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61년 만인 1995년 4월 20일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으로는 사상 최초로, 역대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었다.[참고] [나무위키] 폴란드.
https://namu.wiki/w/%ED%8F%B4%EB%9E%80%EB%93%9C
[참고] [사이언스올]
[참고] 코페르니쿠스.
[참고] 쇼팽.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00585&cid=51045&categoryId=51045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쇼팽 [Fryderyk Franciszek Chopin], 최신명곡해설 & 클래식명곡해설 - 작곡가편, 2012. 5. 31., 삼호ETM 편집부.
[참고] 마리 퀴리(Marie Curie), 두산백과 두피디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50925&cid=40942&categoryId=3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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