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__디자인과 호두모양 과자

  

144_디자인과 호두모양 과자

 

뚱보강사 이기성

 

나이 먹는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신체가 변한다는 걸 의미하나봅니다. 일상적인 머리를 숙이고 세수하는 것, 머리를 감는 것이 대단한 운동이라는 걸 알게 되면 내 나이도 벌써 70이라는 것이 실감납니다. 지난주에는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라는 데서 전화가 왔습니다. 한국문화인물 구술기록 아카이브 구축사업을 하는데 저와 5~6시간 인터뷰 촬영을 해야 한답니다. 카메라 두 대로 촬영을 하니 넥타이 매고 오랍니다.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출판과 한글이 어떻게 디지털화 되었는지 묻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와 새로운 전두환 정권은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고 교복과 두발 길이를 자유화하고 국가시험에 합격하지 않아도 해외 유학을 갈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조치로 다양한 수준의 학생들이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특히 미술분야 유학생들은 도안이란 우리말 용어를 디자인으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판을 출하는 것이 출판’, 안을 그리는 것이 도안입니다. 그런데 이 없이 그리기만 하는 것이 디자인인양(도안인양) 잘못 전파된 것입니다. ‘은 자기의 고유 아이디어 즉 자기의 철학인데, 남의 것을 표절하여 그리는 것이 디자인인 것으로 잘못 유행되고 있습니다. 제한된 지식을 갖춘 디자이너가 양산되었습니다. 특히 활자 원도를 그리는 서체디자이너 분야는 심각합니다. 자기 철학이 없이 활자 원도를 그리면 손기술 연습이지 디자인이 아닙니다. 한국 활자 제작에 자기 이 생기려면 20년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금속활자를 고르는 채자 작업부터 스승의 원도를 그리는 조수 역할을 하면서 20년은 배워야 활자 원도를 도안할 자격을 주었는데, 전문대나 4년제 대학을 공부하고 나서 활자를 디자인할 줄 안다고 자랑하는 도안사를 만나면 불쌍하다는 생각이듭니다. ‘안을 도하는도안이 아니라 만 할 줄 아는 초보 기술자 실력이라는 걸 모르니 말입니다. 호두과자와 호두가 없는 호두모양 과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 같습니다.

 

1973년에 제3차 교육과정기가 시작됩니다. 197210월 유신 조치가 발표되고는 검인정 논란, 국정화 논란, 단일본화 사건 등이 진행되다가 19772월에 검인정교과서 출판사 탄압사건이 발생하여 117개에 달하는 검인정교과서 출판사는 20개 정도만 남고 모두 몰락합니다. 당연히 출판업계가 위축되고 한글 활자 원도그리기와 제작 사업은 수년간 중지됩니다. 40년 전 수출산업이 거의 없던 당시에 출판계는 특히 교과서 출판계는 매우 규모가 커서 출판사가 원양회사나 전자회사를 인수할 정도였습니다. 고려서적은 고려원양을, 법문사는 오양수산을, 장왕사는 공양물산을, 사조사는 사조산업을, 민중서관은 민성전자를, 양문사는 삼형전자를 인수했습니다.

몇 개의 출판사와 원양어업 회사를 경영하던 장왕사도 계열회사인 진명교재연구원만 남기도 모두 해체되었습니다. 지구과학은 시사영어사, 가정은 교학사 등 타사 명의를 빌려 교과서를 발행했고 지리부도, 체육, 지리 등은 진명교재연구원에서 이름을 바꾼 장왕교재연구원에서 교과서를 출판하였습니다. 1977년 검인정교과서 탄압 사건에 대한 소송이 1989년에 대법원 승소 판결이 날 때까지 12년이 되도록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장왕사나 장왕교재연구원 명칭을 1989년 중반까지는 외부에 공개하지 못하고, 대외적으로는 진명교재연구원이나 진명문화사 출판사의 안종국 대표 명의로 출판 사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고정일, 정음사, 2012)

 

유명한 한글 서체디자이너 박경서 선생은 일제 강점시대에 한글 도안을 지켜온 공로가 크고, 월북도 하지 않은 애국자였는데 광복 초에 정부의 배려로 약간 활동을 하다가 6·25 남침 이후 빛을 보지 못하고 1960년 경에 돌아가셨습니다. 한글 서체디자이너의 대부 박경서 선생이 어렵게 노년을 보낸 안타까운 전례가 있으므로, 장봉선 선생의 남대문 사무실에 같이 있기도 했고, 경제에는 신경 안 쓰는 자유인인 최정호 선생은 1988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신수동 장왕교재연구원에서 서체 디자이너로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박경서 선생에 비해 최정호 선생은 훈장도 받았고, 그나마 16평짜리 연립주택이라도 있었습니다. 박경서, 장봉선, 최정호, 최정순 이 네 분은 현대 한글 활자 원도의 대부이며 그 공적은 각기 기념관을 세워 존경해야할 국보입니다.

 

납활자 조판을 수십 년간 사용하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인화지 사진식자기를 사용하는 시대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동 인화지 사진식자기 시대는 1980년대 개인용컴퓨터의 보급으로 식자기에 컴퓨터가 접목된 전산사식기 시대로 돌입합니다. 그러자 교과서, 단행본, 잡지, 신문 등 인쇄물에 인쇄된 한글 활자의 품질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납활자 조판 시대에는 한글과 한자, 일본 글자를 통틀어 마스터하고 있는 출판사의 편집부장이나 인쇄소의 문선부장급 경력자가 활자의 사용 용도와 활자 글꼴의 철학을 기획하고 이에 따른 기본 콘셉트와 제도 원칙을 정하여 원도를 그리는 전문가에게 제작 의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용컴퓨터가 대량 보급되자 인쇄계와 출판계에서는 실력과 경력보다는 개인용컴퓨터를 다룰 줄 알고 월급도 비교적 낮은 디자이너나 원도개발자로 세대교체가 진행되어 갔습니다. 특히 조판 부문과 제판 부문이 심했습니다. 이 결과 과거 한글 활자의 미적디자인과 지적디자인의 수준에 못 미치는 한글 활자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없고 만 배운 서체디자이너들이 납활자의 원도를 스캔해서 복제한 사진식자기나 디지털활자(폰트)의 원도롤 사용해서 인쇄 한 것은 글자에 힘이 없고 금속활자보다 예쁘지 않다고 저자들이 불평하여 책 전체를 납활자로 다시 조판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사진식자 대신 납활자로 조판된 교과서를 초교, 재교, ... 7교 교정을 하여 ok가 나면 전사스리라고 아트지에 수동으로 교정 인쇄한 것을 사진 촬영 하여 필름을 떠서 오프셋으로 인쇄하였습니다.

 

인쇄용 활자의 원도 도안사는 1500~2000개의 완성자 원도를 6Cm(두 치)5Cm(2인치) 사방의 네모 안에다 그리는데 붓으로 한 글자를 한 번에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수련생이나 조수들이 스승의 글자 원도 수 백 개를 두꺼운 종이에 붙이고, 이를 자소별로 오려놓고서 오려진 자소로 초성/중성/받침을 조합하여 한 개씩 글자를 조립합니다. 네모안에다 무게 중심을 맞추어 조립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글자마다 자소의 위치 정보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 네모 안에서 무게 중심을 계산하고 착시도 계산해야 합니다. 많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는 조립된 글자 위에 유산지나 트레이싱페이퍼를 대고 연필로 자소의 윤곽 테두리를 그립니다. 유산지에 연필로 그려진 글자 모양을 스승에게 검토를 받습니다. 수정 후 최종 오케이가 나면 먹으로 테두리를 그리고 자소의 속을 채우는 잉킹 작업을 합니다. 스승에게서 서체도안사 자격을 인정받아서 이제 하산하거라라는 명을 받으려면 보통 입문 후 20년이 걸렸습니다.


  

    양문사(대표 변호성)는 삼형전자를 인수하고, 삼영전자라는 이름으로 주식시장에 상장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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