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2__ CIA 마이클리 이(리). 『CIA와 대한민국』
- 뚱보강사
- 2025.11.1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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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보강사 이기성
1142__ CIA 마이클리 이(리). 『CIA와 대한민국』
『CIA와 대한민국』 책의 저자는 마이클 이(Michael Yi/리)입니다. 출판사는 도서출판 스카이... 『CIA와 대한민국』 책은 CIA에서 요원 및 분석관으로 활동한, 한국계 미국인 마이클 이(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사와 미국 정보기관의 관계를 조망한 책이다. 저자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속에서 CIA가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한국 정부와 소통해왔는지를 실무자의 시각에서 설명하고 있다.
냉전기부터 최근의 북한 핵 문제까지, 미국 정보기관이 바라본, 한반도 전략 환경과 실제로 수행된 정보 협력의 사례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또한 공개되지 않았던 에피소드와 한국, 미국, 북한을 둘러싼 외교·안보 정책의 내면이 폭넓게 소개된다. 저자는 특정 정권이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지 않고, 그가 직접 경험한 사실과 정보기관 내부의 작동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정보 분석의 구조, CIA 내부 문화, 한국 정보기관과의 협업 방식 등도 상세히 다룬다. 『CIA와 대한민국』 책은 한국의 안보 환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기록이자, 정보기관의 실제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용적 논픽션이다. 현대 한국사와 국제안보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40년간 한반도 한복판에 있었던 CIA 정보요원
East-West Center, KBS, EBS 에서 근무하신 박승배 님이 ‘CIA 마이클 이(리)’에 대해 글을 올려주셨습니다(2024년 6월 16일).
『CIA 요원 마이클 리』 격동의 한반도, 40년간 그 한복판에 있었던 정보요원의 숨 막히는 체험 수기, 마이클 리 저, 조갑제닷컴 출판, 2015 발행.
마이클 리(이) 경력: 미국 연방정부 40년 근속(DIA =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에서 16년과 CIA =Central Intelligence Agency(중앙정보국)에서 24년),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미국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미(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진정한 애국자요, 신앙인 마이클 리>... 그는 1933년생으로 올해 나이 92세다. 그가 쓴 신간 책 제목이 『CIA와 대한민국』이다. 제가 이 책을 읽다가 뜻밖의 경험을 했다. 저자의 경험담을 털어놓는 한 대목에서, 가슴이 그만 뭉클해져 왔기에 그렇습니다.
지금은 뭐,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 않는 ‘반공(反共)’을 낡은 유산으로 알고 있지만, ‘반공’을 위해서, 앞세대들이 얼마나 헌신했는가를 확인하면서, 가슴이 정말 울림이 왔습니다. 반공(反共) = 공산주의에 반대함...
이분들이 이런 노력을 했구나... 그러면서 마이클 리는 누구냐? 그는 미국 CIA에서 24년을 근무하고, 은퇴를 했습니다. 그전 CIA에 들어가기 전에, 서울 대방동에 있었던, 주한미군정보부대인 502군사정보단에 16년을 근무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보기관에 40년을 근무한 것입니다.
이분이 애국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책표지에 '나는 평생 조국 코리아를 위해 일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미 CIA에 적을 두었지만,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서 일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정보부대에서 무엇을 했느냐?거기서 바로 대북문제 등에 관한 전문성을 길렀습니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일을 잘했기 때문에, 미국 CIA에 스카웃됩니다. 이분이 구체적으로 한 것이 무엇이냐?
먼저, 옛날에 박정희를 접선하려고 내려왔던, 거물 남파간첩 황태성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1991년도에 내려왔던 황태성을 직접 심문했던 분이, 바로 마이클 리 입니다. 그는 그때 물론 갓 서른살로, 젊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청와대를 깰려고 왔던, 1968년 1.21사태시 무장공비 김신조를 직접 심문을 했습니다. 김신조는 북한에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적으로 남파된 무장 공비 출신으로, 1968년 한국 사회 전반에 큰 파문을 일으킨 1.21 사태 당시에, 청와대를 습격했던 무장 남파공작원 31명 중 유일하게 생포되었습니다. 그 다음번은 시간이 흘러 1987년 11월 발생한 KAL 858기 폭파 사건의 범인 테러리스트 김현희 등 1988년까지 모두 다 그가 심문을 했습니다.
김종필의 증언: "황태성은 남북협상 밀사로 자처했지만, 김일성은 황태성에게 박정희와 나를 만나서 북한에 합류하도록, 설득 공작을 해보라는 밀명을 내렸던 것이다... 나는 황태성을 큰 간첩으로 취급했고, 혁명 과업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 그 문제를 빨리 없애버려야 했다. 박정희 의장의 정체가 의심받을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간첩 황태성(1961~1963), 김신조(1968), 김현희(1987) 등 그들을 보면,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쭈욱 흘러왔다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북한에 억류됐다가, 미국으로 망명했던 영화감독 신상옥, 최은희부부, 이 부부가 망명한 것이 1986년 미국으로 탈출하는데, 그것을 돕기 위해 미국정부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 활약 뒤에도 손을 쓴 사람은 마이클 리 였습니다. 구체적인 얘기는 이 책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아마 원고를 다 써놨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 CIA는, 은퇴한 요원들의 책도 다 사전검열을 합니다. 그때 이 대목은 아직은 공개하면 안돼서,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격동의 현대사 뒤에는, 모두 미국 CIA의 마이클 리가 있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간첩을 잡고, 공산당을 때려잡는 전문가 중에서 이렇게 긴 세월에 걸쳐서 몸을 바친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미국의 정보기관에 몸을 담았기 때문에, 지금 92세인데도, 아직도 북한문제 하면 그를 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미국측 요원인 마이클 리가 한국요원들을 제치고 간첩을 심문했을까? 그때는 전시작전권이 미군에 있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내 모든 군사활동, 군사정보 활동을 미군이 통제를 했습니다.
영어에 능통했던 미국요원 마이클 리가 투입된 것은 당연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던져주는 얘기 중에서, 가슴뭉클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마이클 리라는 사람이 '진짜 참된 애국자요, 참된 신앙인이요 진정한 크리스쳔이다'라고 하는 것을 동시에 저는 읽었습니다. 하루는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국군 업무장교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전합니다.
미국 CIA의 심문이 끝나면, 한국 검찰에 넘겨져, 뒤에 재판을 받은 후, 끝내 사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형집행 전에 그 사람이 세례를 받고 구원받아 참된 신앙인으로 마지막을 장식을 했는데,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물어봤습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대방동에서 나를 담당해 심문했던 마이클 리 선생님에게 내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분 덕분에, 이렇게 예수 믿고 구원받아, 평안한 마음으로 저 세상으로 갑니다'라고, 마지막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 참, 이 책에 이렇게 가슴 뭉클한 대목이 숨겨져 있을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이클 리가 사무실 벽에 손을 짚은 채 흐느껴 울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심문했던 때 감정이 복바치면서, 수많은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그 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복잡했을 것입니다.
저는 마이클 리라고 하는 분이 그만큼 순수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마이클 리가 사무실 벽을 붙잡고 흐느끼며 우는 모습을 미군장교가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부대장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저 마이클 리를 보니까 '울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한 것입니다. 그러자 부대장에게 불려갔습니다. 부대장이 '당신 왜 울었습니까?'라고 캐물었습니다. 그러자 마이클 리는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제가 심문했던 그 사람이, 한국검찰로 넘어간 다음에, 절차에 따라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 순간 '마지막 얘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부대장이 아주 진중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날 자리가 잘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부대원 모든 심문관들과 장교들을 다 소집해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일장 훈시를 합니다. '정말 유능한 심문관이 되려면, 심문받는 사람하고 심문하는 사람 사이에 존경받을만한 인간관계를 조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심문관의 기본입니다'라며 강조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이클 리의 사례를 말합니다. '참 저 사람이 정말 참된 심문관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 사람은 유능할뿐더러, 인간다운 심문관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칭찬을 했습니다. 이것이 1960년대 중반 이후 70년대 중반 정도입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정말 감동을 했습니다. 분단의 비극에서 피어난 간첩의 신앙 얘기도 참 특별해서, 마이클 리를 새롭게 봤습니다. 왜 새롭게 봤느냐? 그는 간첩들이 넘어오면 겁박을 하고, 매질을 뼈가 부러지도록 하는 그런 식으로 심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피심문자의 전인격적인 신뢰 관계를 만들고, 그래서 자발적으로 술술 불도록 만들어내는 아주 단수가 높은 심문관이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신뢰: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전인격적 신뢰”라는 표현이 사용되며, 단순한 믿음이 아닌 삶 전체의 헌신과 변화를 동반합니다.)
이 책을 보면서, 제가 또한번 놀란 것은 이 책의 상당부분에 성경적인 얘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우남 이승만박사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하는 것에, 광장히 많은 분량이 곳곳에서 그런 얘기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이분이 참 특별한 기독교 신앙인이 맞구나~'라고 하는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성숙했고, 미군정보기관을 위해서 일했지만, 대한민국 코리아를 위해서 이렇게 일했구나 하는 것을 저는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마이클 리를 알기도 합니다.
그래서, "CIA와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마이클 리의 책에 보면, 한국교회가 병들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교회는 병들었다. 왜 그러느냐? 구약에 나오는 여호수아와 이승만과 같은 영적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이렇게 그는 반복해서 얘기를 합니다.
그 어떤 한국의 목회자들 못지 않게, 진솔하고 정확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마이클 리의 자전적 스토리가 절반이요, 동시에 대한민국 건국과 위대한 현대사의 얘기가 쫙 나옵니다. 공부가 짭짤합니다. 이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오염되지 않고 그야말로 정통 현대사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남파간첩 황태성의 스토리가 압권입니다!
-(조우석 평론가)=
『CIA와 대한민국』 - 조국을 사랑한 마이클 이
CIA와 대한민국 [1] 프롤로그 - 조국을 사랑한 마이클 이의 미국 CIA 40년 생생한 증언...
[스카이데일리] 마이클 이(2024년 6월 14일).
1945년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미국 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미국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대한민국과 CIA’를 지면에 연재한다.
알래스카 자적정사(自適靜舍) 이야기
3월이 거의 다 지나가는데,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는 아직도 하얀 눈으로 덮여 있다. 나는 2005년에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관광을 왔다가, 집값이 싸기에 아담한 집 한 채를 사 놓고, 일 년의 거의 전부를 이곳에서 보낸다. 나는 이 집을 자적정사(自適靜舍)라고 부른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이곳에서 홀로 사는 나를 사람들이 독거노인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집을 별장처럼 좋아한다. 이 집엔 침실 세 개·화장실 겸 욕실 세 개·응접실 하나·식당 하나·주방 하나, 그리고 차 두 대가 들어가는 차고가 있다. 한국과 미국에 있는 친구·친지들이 여러 번 다녀갔는데, 모두가 이 집의 쾌적함을 좋아했다. 나는 이 집에서 시를 쓰고 논문을 쓰며, 밤마다 꿈을 꾼다.
내 침실 우측에는 넓은 유리창이 있어, 커튼을 열면 언제나 시원한 설경이 눈앞에 전개된다. 나는 이 아늑한 침실 겸 거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밤늦은 시간에는 어두운 허공 저쪽을 바라보고, 두고 온 고향과 흘러간 지난날의 일들을 생각하며 잠을 청하지만, 쉽게 잠들지 못하는 때가 많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다가 상영이 끝난 후에 느끼는 허탈감 같은, 그런 느낌으로 나는 요즘 무언가를 도둑맞은 듯한 상실감을 느끼기도 한다. 먼바다에서 출렁이며 흘러온 파도가 해안에 부딪히듯, 나의 삶의 파도가 얼마 안 있어 피안에 닿으리라는 초조감 때문이리라.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의 인생이 곧 끝난다는 생각보다는, 그 미지의 출구를 통과한 후에 새로운 미지의 현장으로 이동한다는, 야릇한 기대감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어쨌든 나는 많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행복하다고 느끼며, 노후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이처럼 자유롭고 쾌적한 시간과 공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찢어지게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험난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걱정하던, 그 긴 세월이 어떻게 다 지나가고 내가 여기까지 왔는가 생각하면, 참으로 기적 같기만 하다. 내가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살았으며, 조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젊은 날의 꿈과 상관없이 무슨 일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지 꼭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마 지금이 그 일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자랑스러운 나의 자식들
나의 두 아들과 딸은 메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어서, 여름과 겨울에 몇 개월은 그들과 함께 지낸다. 2000년 2월29일 40년 근속한 미국 연방정부를 은퇴하고, 이곳에 온 지도 벌써 한참이 되었다. 1974년 5월 내가 먼저 미국에 오고, 가족은 이듬해 정월에 서울에서 데려왔다. 가족이 함께 살려면 먼저 일자리를 구하고, 집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낯선 땅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고, 새 삶의 터를 일구느라 나도 힘들었지만, 내 가족도 미국에 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내 직장 부근에 아파트를 구하고,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아내는 미국에 온 다음 세탁소에서 옷 수선하는 일을 했고, 딸은 숙명여고 2학년 재학 중에 왔기 때문에, 휘튼(Wheaton)에 있는 John F. 케네디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하고, 두 아들은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4학년에 각각 편입했다. 하지만 그 애들 모두가 영어가 딸려서,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로 고생했다. 그러나 내 아이들은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며 따라갔다. 그리고 불과 2∼3년 사이에 졸업할 때는, 모두 우등생으로 졸업을 했다.
딸 경실이의 경우엔 영어가 딸려서 학과 진도를 따라갈 수 없던 아이가, 미국에 온 지 불과 1년 반 만에 졸업을 하는데, 400명 졸업생 중에서 2등(magna cum laude, 차석 우등졸업)을 했다. 그래서 메릴랜드 주지사의 표창장도 받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입학 허가서와 함께, 장학금 통지서를 받았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은 미국 북동부의 아이비리그라 불리는 8개의 명문대학교 가운데 하나다.
그렇지 않아도 경실이는 고등학교 재학 중에, 워싱턴 수도권에서 제일 큰 한인 침례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서, 교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경실이가 명문인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장학금 통지서와 함께 입학 허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에서 모두 딸인 경실이뿐 아니라 애비 되는 나까지 함께 칭찬하고 축하해 줬다. 그럴 때면 나는 눈물이 나도록 내 자식들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큰아들 욱이는 메릴랜드 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후에 존스홉킨스 대학에서는 인체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욱이는 공부를 마친 후, 미(美)항공우주국(NASA)에서도 일했고, 지금은 국립보건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Health)에서 프로젝트팀을 맡아, 계약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막내아들 석이는 메릴랜드 주립대학교와 메릴랜드 주립대 의대를 졸업하고, 조지워싱턴 대학 의대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후, 워싱턴 병원센터(Washington Hospital Center)에서, 폐질환 전문의 수련과 응급환자 전문의 수련을 끝내고, 지금은 버지니아주 컬페퍼(Culpeper)시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석이는 그곳에서 한동안, 3년에 한 번씩 의료진의 투표로 선출하는 의료원장 직을 역임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며
미(美)중앙정보국(CIA)에서 40여 년을 근무하고 은퇴한 이후, 나는 24권의 책을 썼으며, 수십 편의 논문을 썼다. 그중에서도 ‘민족의 고난’ 같은 논문집과 ‘성서적 고찰’ 같은 성경 해석이 대표적 작업이며, 한국과 미국 교포사회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외에도 나는 이곳에 온 이후에, 한인회가 주관하는 노인대학에서 생활영어와 미국 헌법·대한민국 현대사와 국가안보에 관한 강의를 했다.
사람들은 내가 늙어 가는 것이 아깝다고 하지만, 나 자신은 나이에 별로 신경 쓰지 않으며, 내 인생이 녹슬어서 못 쓰게 되기보다는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한다. 내 책은 2015년 4월16일에 초판이 출판된 이후, 예상 외로 베스트셀러의 하나가 되었고, 많은 독자들의 사랑과 성원을 받았다. 독자들로부터 끊임없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해 달라는 부탁이 쇄도했다. 그러는 중에 박근혜 대통령의 불법 위헌 탄핵이 진행되었고, 대한민국이 역사 이래 최악의 혼미 속에 빠지는 걸 지켜보았다.
국가 운명의 미래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의 민족적 시련을 겪으면서, 수많은 애국 시민이 조국을 지키기 위한 피나는 투쟁을 하는 어느 한 자리에서, 필자도 최선을 다하여, 시국 판단과 국민 계도 활동에 참여했다고 자부한다. 그것을 위해 내가 무슨 일을 했는 지를 추가해 증보판을 내기로 결심했다.
나의 판단은 우리가 지금은 무서운 시련에 시달리고 있지만, 더 위대한 통일 대한민국의 탄생을 위한, 역사적 기류의 흐름과 국제정세의 방향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어려움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하여 좌절하지 말고, 그동안 자랑스러운 조국을 바로 지키지 못한 죄를 참회하면서, 새로운 꿈과 긍정적인 미래를 위해, 믿음을 갖고 ‘큰 그림’을 그리는 우리가 되자고 절규한다.나의 주장은 역사의 자정 능력을 믿으면서, 흐트러진 수많은 퍼즐 조각을 모아서 조립한 그림과 같은 것이다. 책 출판과 함께 스카이데일리 지면 연재를 통해, 나의 이야기를 온 국민이 읽어 줄 것을 기대한다. 증보판 추가 부분도, 미국 CIA가 사전 검열을 하였으며, 2019년 12월 10일에 출판 승인을 받았다.
…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다. 책에 나오는 지명이나 사람들의 이름이 거의 실명이며, 사건들이 허구가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그리고 체험한 일들이기 때문에,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나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회고록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스카이데일리] CIA와 대한민국 [2] 8·15해방과 남북분단 ① 조국을 사랑한 마이클 이의 美CIA 40년 생생한 증언... 2024년 6월 17일.-
아버지가 남긴 교훈
나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순흥(順興) 안씨로, 착하고 순하기가 비할 데 없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였으며, 아버지는 경주(慶州) 이씨로, 조선시대 유명한 재상이었던 백사(白沙) 이항복 대감의 후손이었으나, 그도 역시 구시대의 평범한 농부였다.
그래도 그 지역에서는 유식하기로 소문이 나서, 구정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토정비결을 보러 찾아오고, 환자가 생기면 한약 처방을 받으러 아버지를 찾아오곤 했다. 아버지는 목수 일도 했다. 농번기가 아니면 연장통을 등에 메고 여러 곳에 다니며, 집을 짓거나 학교 건물을 지었고 부잣집 저택을 짓기도 했다. 상량식을 올릴 때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시루떡을 얻어먹던 기억이 난다.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의 일이다. 한 부잣집에서 저택을 짓는데, 아버지가 도편수(都片手)로 일하다가, 어느 날 큰 변이 생겼다. 같이 일하던 목수 하나가 실수로, 대청 중앙에 세울 기둥을 한 자가 모자라게 톱으로 잘라 버린 것이다. 집주인은 노발대발했다. “이 재목은 안면도까지 가서 쌀 열 가마 값을 주고 사 온 거요. 당장 변상하시오”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아버지는 아주 침착하게 변상을 하겠다고 하셨다.
이틀이 지났다. 아버지는 이틀 동안 작업장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걱정을 하며, 아버지가 고민 끝에 크게 병이 난 것으로 오해를 했다. 그동안 아버지는 밖에서 주워 온 나뭇등걸을 정확하게 한 자 길이로 잘라, 끌로 정교하게 용트림을 조각했다. 사흘째 되는 날, 그 용트림을 들고 나와 대청 복판에 세우고, 기둥 밑에 한 자 높이의 용트림을 받침으로 괴었다. 민둥민둥한 기둥보다, 몇 배나 더 멋있는 기둥을 보고, 집주인과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살아가면서 일이 꼬였을 때는, 침착하게 그 어려움을 창조적으로 극복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개인도 그렇지만 나라도 마찬가지다. 실망과 조급한 포기는 약자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암울했던 날들
우리 마을은 약 30세대가 사는 평화로운 농촌이었다. 그 무렵, 나는 누나들을 따라 뒷산에 도라지와 싸리버섯을 따러 다니곤 했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가난하고, 먹을 게 없었다. 나는 이런 암울한 환경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농부들은 해마다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추수 때면, 일본 관리들이 와서 공출(供出) 명목으로 다 빼앗아 가고, 이듬해 씨나락으로 남겨 둔 벼 몇 가마니마저 내놓으라 해서, 내놓지 않으면, 마을 공터에 모아 놓고 매를 때렸다. 나는 아버지가 매를 맞을 때, 몸이 비실거리던 것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천자문을 가르쳐 주셨다. 학습이 끝나던 날, 어머니가 밀개떡과 냉수 한 그릇을 차려 놓고, 나는 아버지 앞에서 냉수에 붓을 빨고, 큰절을 올리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나는 왜놈 학교에는 보내지 않겠다는 아버지를 졸라, 열 살 되던 1943년에 드디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전시라서, 형은 징용으로 남양군도(지금의 인도네시아)로 끌려가고, 집에 없었다. 우리 어린이들도 학교에서 국어(일본어)와 산수 외에는, 매일같이 군대식 제식훈련과 군가를 배웠다. 아침마다 ‘기미가요(일본 국가)’를 부르고, 동쪽을 향해 일본 천황에게 궁성요배를 올렸다. 우리는 그때 너무 어려서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채, 일본이 우리나라인 줄만 알고, 열심히 따라 했다. 이름도 창씨개명을 해서, 내 이름도 일본 이름으로 바뀌었다.
나는 반에서 늘 우등생이었고, 산수를 제일 잘했다. 학년말에는 일등을 할 것이 확실해서, 성적표를 받으면 아버지에게 보여 주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픈 일이 닥쳤다. 1943년 가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어서 아버지가 자리에 누운 지 나흘 만에 숨을 거둔 것이다. 징용에 끌려간 형에겐 이 슬픈 소식조차 전해지지 않았고, 열 살밖에 안 된 내가 상주가 되어, 상복을 입고 아버지 상여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돌아가신 망인보다, 어린 내가 더 측은하다며 많이 울었다고 한다.8·15 해방
1945년 여름,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 운동장에 있는데 미 공군 폭격기 B-29가 비행운을 길게 끌면서, 아주 높은 상공에 나타났다. 그러자 전교생이 호들갑을 떨면서, 인근 콩밭에 뛰어 들어가 숨었던 일이 생각난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얼마 지나, 8월15일이 되었다.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를 통해 선포되었다. 우리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면민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모조리 쏟아져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걸 보고, 비로소 우리나라가 일본의 굴레에서 벗어났음을 느꼈다. 어린 나이였지만, 우리도 덩달아서 기뻤다. 그러고 나서 학교에서는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일본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일본말로 된 교과서는 모조리 운동장에 내다 놓고 불태웠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새로운 변화가 눈에 보였다. 일본 사람들이 짐을 꾸려 떠나는 것을 보았고, 마을 앞 신작로로 코가 크고 이상한 모자를 쓴 미군들이 ‘찝’차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어쩌다 그들이 길가에서 차를 멈추고 잠시 쉴 때면, 마을 아이들이 몰려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초콜릿과 껌을 얻어먹었다. 우리들은 낄낄거리며 “헬로‧오케이‧땡큐”를 배웠다. 해방 직후 마을에는 미국의 구호물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각종 통조림과 당과류에, 생전 먹어 보지도 못한 설탕 가루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커피 가루를 물에 개어 고약이라며, 상처에 바르기도 했다. 그 당시, 입에 대 본 신기한 것들 중에서도, 코카콜라라는 것은 참으로 특별히 신비한 맛을 갖고 있었다.
형의 귀환
전쟁이 끝났는데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생사가 묘연했다. 전후 2년이 지나서, 국제적십자위원를 통해 짧은 소식이 배달되었다. “小子客地眠食如前.” 형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다가 1948년 가을, 아랫집에 사는 사촌 형이 허겁지겁 달려와, 태수 형이 지금 저기에 오고 있다고 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지고 있던 지게를 벗어 던지고, 형이 오고 있다는 동구 밖으로 달려갔다.
분명히 형이 오고 있었다. 반가운 눈물인지 무슨 눈물인지 눈물이 쏟아졌다. 형의 모습이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이다. 비쩍 마른 몸에, 다 떨어진 일본 군화 ‘지까다비’를 신고, 추하기 그지없는 작업복에, 쿨렁쿨렁한 배낭 하나를 멘 모습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틀림없는 일본군 패잔병이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과 온 마을이 형의 생환을 기뻐했고 환영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우리 형수였을 것이다.
가난했지만, 우리 가족은 새로운 활기를 찾고 행복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슬픔을 극복할 만큼, 큰 희망과 의지를 되찾았다. 든든한 형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꽁보리밥에 짠 김치와 시래기국을 먹고 살아도, 좋기만 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기대했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형은 내가 상상했던 그리고 기대했던 그런 형이 아니었다.
형은 형수와 어울려 참으로 행복했지만, 늙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관심했다. 우리는 노랫말 그대로, 부엌 하나에 방 두 개짜리 초가삼간에 살았는데, 형 내외는 안방에서 기거했고, 어머니와 나는 건넌방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모시 길쌈을 해서 살림에 보탰고, 나는 들에 나가 참게를 잡아다 팔며, 형을 도왔다. 그리고 밤이면, 우리 모자는 이불 속에서 소리 나지 않게 많이 울었다. 우리는 불연속선의 기후 밑에서 살고 있었다.
[참고] 박승배, East-West Center에서 근무, KBS Korean Broadcasting System 및 EBS Educatinal Broadcasting System 근무.
https://www.facebook.com/kbs2baron
[참고] 마이클 이,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참고] 마이클 이(리) :
https://chatgpt.com/c/691c1c2f-16b4-8323-81eb-f501afa58b03
[참고] [스카이데일리] 마이클 이, 2024년 6월 14일.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35460
[참고] [스카이데일리] CIA와 대한민국 [2] 8·15해방과 남북분단 ①
조국을 사랑한 마이클 이의 美CIA 40년 생생한 증언, 마이클 이,
2024-06-17.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35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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