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2__ 게으른 독일인. 틱톡 잡은 유튜브. 고구려 평양은 하북성 평주에. 강단사학은 왜 기록을 못 본 척하나?
- 뚱보강사
- 2025.06.0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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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2__ 게으른 독일인- 쇼츠로 틱톡 잡은 유튜브- 고구려 평양은 하북성 평주에- 강단사학은 왜 기록을 못 본 척하나?---42ok
뚱보강사 이기성
1072__ 게으른 독일인. 쇼츠로 틱톡 잡은 유튜브. 고구려 평양은 하북성 평주에. 강단사학은 왜 기록을 못 본 척하나?
East-West Center Institute of Culture and Communication의 박승배 님이 ‘김홍수 조선일보 논설위원 –2025년 6월 2일-’의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게으른 독일인'> 10여 년 전 그리스·이탈리아·포르투갈 등 남유럽 국가들이 재정 위기를 겪을 때, 독일 언론들은 모욕적 보도를 많이 했다. 시사 잡지 슈피겔은 춤추며 노는 그리스인 삽화를 표지에 싣고 ‘게으른 그리스인’이란 제목을 달았다. 포쿠스지(誌)는 그리스 문화의 상징인 밀로의 비너스상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조롱 사진과 함께 ‘유로화 가족 중 사기꾼’이라고 쏘아 붙였다.
당시 독일인 사이에선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포르투갈인이 술집에 들어가 술을 시킨다. 계산은 누가 할까? 독일인이 한다”는 농담이 유행했다. 유럽에서 독일인은 근면·성실 그 자체란 평판을 누려왔다. 그 배경엔 역사적·철학적 뿌리가 있다. 500년 전에 마르틴 루터 신부가 종교 개혁을 통해 독일 국민에게 “열심히 일하면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루터는 1517년 종교개혁을 주도하여, 개신교를 태동시켰다).
독일 철학자 막스 베버는 “기독교 정신의 핵심은 근면·성실”이라고 설파했다. 19세기 말 독일인은 하루 평균 14~16시간씩 일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때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됐지만, 근면한 국민이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1950~60년대 독일은 연평균 8%씩 초고속 성장하며 유럽의 경제 대국으로 거듭났다.
독일 정부는 1964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3000만 달러 차관을 주며 경제개발의 종잣돈을 제공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독일 모델을 기반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1990년 동·서독 통일에 따른 천문학적 재정 부담까지 극복하고, 유럽 제1의 경제 대국 지위를 유지해 온 독일 경제가 요즘 흔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패권 다툼은 러시아 천연가스, 중국 수출에 크게 의존해 온 독일 경제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2023년(-0.3%)과 2024년(-0.2%)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 늪에 빠지자 독일에서 ‘우리가 게을러졌나’를 둘러싼 논쟁이 불거졌다.
독일인들의 근로시간은 주당 평균 35시간 정도로, OECD 국가 중 가장 적다. 2023년 기준 연 1341시간으로, 미국(1811시간)보다 470시간 덜 일한다. 노조의 힘이 세, 주 4일 근무제가 확산한 데다, 고용률을 끌어올리려 ‘미니잡’이란 단시간 일자리를 늘려왔기 때문이다. 급기야 메르츠 총리가 “마이너스 성장을 극복하려면 더 많이 일해야 한다”면서, 법정 노동시간을 ‘하루 최대 8시간’에서 ‘주당 48시간’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여론은 찬반으로 갈려 있다. 조만간 그리스 언론이 ‘게으른 독일인’ 특집 기사를 낼지도 모르겠다.
쇼츠로 틱톡 잡은 유튜브
“시성비 뜨자, 쇼츠로 틱톡 따라 잡은 유튜브”... 2024년 유튜브 그리고 유튜버③, [데일리안] 류지윤 기자가 보도했다(2024년 2월 16일).
쇼츠, 유튜브 성장의 주역... 드라마를 유튜브 요약본으로 숙지하고,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책 리뷰 영상을 시청한다. 또 사고 싶은 화장품이 있다면 뷰티 크리에이터가 리뷰한 영상들을 찾아보고, 비교 분석한다.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의 무대를 집중적으로 보고 싶으면 유튜브 직캠을 찾아본다. 이를 두고 최근에는 '시성비'라는 신조어가 붙었다. 시성 비는 '시간'과 가격 대비 성능을 뜻하는 '가성비'가 합쳐진, 신조어로 효율적인 시간 활용을 의미하는 시간 대비 성능이란 뜻이다. 이제 우리 일상에서 시성비는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일본에서도, 시성비를 중시하는 신조어 ‘타이파’라는 단어가 일본의 출판사 산세이도 선정 2023년 신조어 대상으로 따지는 ‘코스파(코스트 퍼포먼스·Cost Performance)’에서 ‘코스트(비용·뽑혔다. 가성비를가격)’ 대신 시간을 뜻하는 ‘타임(Time)’을 넣어 만든 일본식 신조어다.
우리가 유튜브를 통해 나에게 필요한 정보만 빠르게 습득해, 시간을 아끼는 행동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 최근에는 10분 이상의 영상도 길다며, 10초에서 15초 분량의 숏폼 영상을 시청하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핵심만 알고자 하는, 최근 소비자 경향’과 숏폼의 형식의 형식과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콘텐츠가 감상의 대상이 아닌 소비의 대상이 됐다는 의미다.
숏폼 선두주자인 틱톡에 이어, 유튜브도 2020년 쇼츠 서비스를 시작, 2023년 2월에는 쇼츠의 수익화 전환을 시작했다. 쇼츠에 광고도 붙이기 시작했으며, 쇼츠에 쇼핑 기능을 붙여 본격적으로 기능을 강화했다. 이후 쇼츠 콘텐츠 업로드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2분기 유튜브 쇼츠의 월간 이용자가 20억 명을 돌파한 것. 이는 2022년 구글의 월간 이용자수(15억 명)보다 25% 증가한 수치이며, 틱톡의 2022년 월간 이용자수 16억 명을 넘은 수치다.
빅데이터 플랫폼 기업 아이지에이웍스에 따르면, 유튜브 지난해 12월 국내 월 이용자 수(MAU)가 4564만 5347명으로, 처음으로 카카오톡을 앞질렀다. 2위 카카오톡의 MAU는 4554만 367명으로, 유튜브보다 약 10만 5000명 적었다.
지난해 1월에만 해도, 두 앱의 월 이용자 수 격차는 125만 명 이상이었지만 1년 새 격차가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여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쇼츠였다고 분석된다. 규제 사각지대 속에서 유튜브의 파급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가운데 쇼츠 시장을 발판으로 유튜브가 플랫폼의 절대강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지표다. 이 조짐은 지난해부터 예고됐다. 크리에이터 전문 스타트업 콜랩아시아가 지난해 발표한 1500여 개 보유 채널을 대상으로 시청자 데이터 분석 결과, 유튜브 시청의 84%가 모바일에서 일어났으며, 10명 중 7명은 쇼츠로 처음 채널에 접근했다. 또 시청자 뷰의 88.2%가 쇼츠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측정됐다.
실제로 쇼츠를 집중적으로 만들고 있는, ‘쇼츠 크리에이터’가 생기는가 하면, 쇼츠로 단기간에 많은 구독자를 유입시킨 사례도 있었다. ‘1분 요리 뚝딱이형’은 채널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쇼츠 영상으로 10만 명을 모았으며, 요리 레시피 ‘요리용디’, 반려견의 일상을 기록한 ‘진솔쓰’ 등도 같은 간결하고 재미있는 쇼츠로 인기덤에 올랐다.
쇼츠가 유튜브의 성장의 동력인 걸 부정할 순 없지만, 변화에 익숙하고 트렌드에 민감한 이용자들의 특성이 늘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크리에이터 업계 종사자는 “유튜브, 쇼츠를 보는 사람들의 종류는 시간이 없는 사람과, 주어진 시간 안에서 더 많은 영상을 소비하고 싶은 사람으로, 나뉜다. 즐거움을 감동을 얻는 것이 진짜 목적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반면, 무언가를 소비한 상태가 되는 것이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사람마다 시간의 가치가 다르다는 걸 영상에 반영해야 한다. 유튜브는 재생속도를 0.25배속부터 2배속까지 8단계로 나눠져 있다. 이용자의 다양한 감상 스타일을 맞춘 것이다"라고 전했다.
고구려 평양
뚱보강사 칼럼 “#786__ 책 ‘읽기’와 ‘듣기’. 선 전자책 후 종이책. 삼국시대 진짜 지도. 단군조선. 재야사학과 강단사학” (2024년 1월 19일) 에서 강단사학을 조금 소개한 바 있었다... 재야사학에서는 기존의 역사학자를 강단사학자(講壇史學者)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이 대개 역사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취득하고, 학계를 중심으로 대학 등에서 강의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재야사학자들은 주류 강단사학자들을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라 비판해왔고, 강단사학자들은 재야사학자들을 실증은 없고, 주장만 난무하는 비전문가들이라 비판해왔다. 현재는 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까지 받은 재야사학자도 배출되고 있다. 뚱보강사 칼럼 “#777__ 한국은 역사치매국. 환단고기. 5성취루. 녹도문 가림토문. 환단고기 실증사례”에서도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한 바 있다.
강단사학자(일제 식민사학의 후예)인 선생님들한테서...
우리나라의 역사는 일제시대에 ‘조선사편수회’라는 곳에서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조작/편집되어 우리의 뿌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우리나라가 광복된 이후에 태어난 세대도 진짜 우리의 역사가 뭔지도 모르는 중, 고등학교, 대학생 시절에 강단사학자(일제 식민사학의 후예)인 선생님들한테서 왜곡된 가짜 한국역사를 배웠다. 일본제국은 악랄하게도, ‘조선사편수회’를 앞세워서, 한국역사의 뿌리를 제거하는 역사 침탈을 했다.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 일왕의 특명으로 ,독립관청으로 승격된 '한국사 말살 전담 기관'이었다. 일왕의 특명은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해서, 조선의 역사 뿌리를 잘라내라'는 것...
== 고구려 평양의 위치를 몰랐던 조선 세종조의 신료 ==
[한사모] 대표 Tak Kim 님이 글을 올려주셨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은 나라의 강역과 옛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조선시대 이전의 왕조에 대해서, 그 왕성(王城)을 찾아 표식을 세우라고 명했다. 비록 왕조의 성씨는 달랐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역사의식을 가졌던 임금이다. 그러나 사서삼경만 공부하고, 중국사에만 통달했던 신하들은 고구려 왕성의 위치를 몰랐다.
예조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세종 9년 3월 13일)
대동강 평양이 고구려의 도읍지이었고 고려의 옛 서경이었다면, 마땅히 고려조와 조선조 관료들은 고구려 도읍지를 잘알고 있어야 한다. 또한 고려서경(대동강 평양)에서 고구려 도읍지의 흔적을 발견했어야 한다. 개경과 한양에서 대동강 평양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다고 몰랐겠는가? 이것은 고구려 평양은 한반도 조선의 경내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며, 고려 서경도 대동강 평양이 아니라는 명확한 반증이다.
1. 당, 송대의 중국사서 몇 줄만 뒤져보면, 고구려 평양은 하북성 평주에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강단사학은 왜 이런 기록을 못본 척할까?
진(晉) 시기에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後魏)시대에 고구려가 그 지역에 도읍하였다. 대당(大唐) 총장(總章:당나라 고종의 연호) 원년에 이적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晉因之 兼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 以統之 大唐總章元年 李勣平高麗...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 以統之) <통전(通典)>
* 통전(通典)을 편찬한 두우((杜佑, 735~812)는 당나라 재상. 당대의 인물. 고구려 멸망(668년)후 약 100여년이 경과한 시점의 기록으로 사료적인 가치가 높다..
진(晉)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 시기의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 권 10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 1223~1296)의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 북위(北魏, 즉 後魏) 시기에, 고구려가 평주(平州)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북위시기에 도읍지를 옮긴 고구려왕은 장수왕이 유일하다. <삼국사기>에 장수왕 15년(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딱 맞아 떨어진다.
2. 조선성= 고구려 평양 = 평주 노룡현
조선, 기자(箕子)를 뒤에 요(遼)의 낙랑에 봉하였다. 지금 평주(平州)의 노룡(盧龍)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다. 그런 연유로 무덕(武徳, 618~626)년간에 요(遼)를 기주(箕州)로 삼았다. 8년 고구려 역시 그 지역이다. 朝鮮 箕子後封遼之樂浪 今平之盧龍 有朝鮮城 故武徳以遼為箕州 八年 而髙麗亦其地
<노사(路史)> 권 27, 宋 나필(羅泌) 撰
조선성, 즉 은나라의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은 폐성이다. 朝鮮城 即殷箕子受封之地 今有廢城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 70, '平州' '노룡현(盧龍縣)'
평주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는데 폐성이라고 했다. 조선성은 고조선의 조선을 말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송나라 시대에는 폐성이 되었다고 했다. 조선성은 다름아닌 고조선의 왕검성을 이른다.
이 노룡현은 지금 하북성 진활도시 노룡현으로 지도에 나타난다. 다만 현재 노룡현의 위치에 옛 노룡현이 있었는지는 고증이 필요하다. 원래의 평주 노룡현은 지금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로 추정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3. 대동강 평양은 옛 평양이 아니다.
원사(元史)에는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고 평양을 빼앗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다. 압록수(鴨綠水) 동남쪽으로 약 천리 떨어진 곳인데, 옛날 평양이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주석을 붙여 놓았다.
동령로는 원래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낙랑 현토군을 두었는데 이는 낙랑땅이다. 晉 의회 후에 고련(장수왕)이 비로소,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하였다. 당나라가 고려를 정벌할 때 평양을 공격하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압록강 동쪽 천여리에 있었는데, 새로 옮긴 이곳은 옛 평양이 아니다.
東寧路 本 高句麗 平壤城 亦曰 長安城 漢滅朝鮮置樂浪玄토群 此 樂浪之也 晉義熙後 其王高璉始居平壤城 唐征高麗拔 平壤其國東徙在 押綠水 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也
<원사/지리지>동녕로(東寧路)
왕건이 평양을 서경으로 했고, 원(元)나라 지원(至元 AD1264-1294) 6년에 이연령, 최탄, 현원렬등이 주, 부,현,진(州,府,縣,鎭) 60성을 가지고 래귀(來歸)했다. 8년에는 서경을 동녕부로 했고, 13년에 승격시켜 동녕로총관부를 설치하여 녹사사가 정주, 의주현 , 중화현, 철화진을 관할케 하다.
王建以平壤爲西京 八年 改西京爲東寧府 元 至元 六年 李延齡 崔坦 玄元烈等以 府州縣鎭 六十城來歸 十三年 升 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 割靜州 義州縣 中和縣 鐵化鎭
<원사/지리지>동녕로(東寧路)
*한국의 강단사학은 원나라 동녕부=요양=고려 서경=대동강 평양으로 해석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그 나라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압록수 동남쪽 1,000 여리에 있게 되었다"
<정개양잡저(鄭開陽雜著)> 5권 조선고
*명나라 정약증(鄭若曾, 1503~1570 )의 호가 개양(開陽)이다. 군사전략가, 저술가.
4. 양평은 요령성 요양이 아니라, 하북성 평주 노룡현에 있다.
양평(襄平)은 현(縣)으로,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양평의) 옛 성이 지금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서남에 있다. 襄平 縣 屬遼東郡 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
<후한서(後漢書)> 권 104 下, 이현(李賢) 注,
* 당(唐)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의 위 《후한서(後漢書)》 주석
한(漢)나라 때에 요동군 양평현(襄平縣)은 하북성 평주 노룡현 서남에 있었다. 이 요동이라는 명칭이 지금 요령성 요하 이동으로 옮겨졌다. 일부 연구자들이(심지어 대학교수)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고구려의 도읍지가 요령성 요양시(양평현)라는 잘못된 주장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5. 대동강 평양은 고구려 시대에는 한성(漢城)이라고 불렀다.
"고구려 도읍은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그 외에 또 국내성 및 한성이 있는데, 역시 별도의 도읍으로 그 나라에서는 3경이라 부른다."
其國, 都平壤城, 亦曰長安城. 其外復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其國中呼爲三京.
<북사(北史)> 열전(列傳) 고구려(高句麗)
*고구려 3경은 하북성 평양성(장안성), 국내성(길림성 집안?) 한성(漢城, 대동강 평양)이었다.
6. 대동강 평양성에서 발견한 석축에 한성(漢城)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대동강 평양성을 한성(漢城)이라고 불렀다는 고고학적인 유물이 평양성에서 발견되었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는 그의 나이 44세(1829년)에 홍수로 무너저 내린 평양의 성벽을 살피다가, 성벽을 쌓을 때에 사용했던 돌에 비명을 발견했다. 평양성은 내외성으로 구성되었는데 발견지점은 외성(外城) 오탄(烏灘) 부근이었다.
학계에서는 고구려 성벽석각명(高句麗城壁石刻銘)이라고 하는데 연도표기에 따라서 병술명(丙戌銘), 기축명(己丑銘)이라고 부른다.
병술명석각은 다음과 같다.
“丙戌十二月中 漢城下 後部 小兄 文達節 自此西北行涉之
병술 12월 중에 한성(평양)의 후부 소형 문달이 지휘하였다. 여기서부터 서북 쪽으로 걸쳤다(걸쳐 축성하였다)”
김정희 선생은 돌에 새겨진 글자 중 '소형(小兄)'이 고구려의 관직이기 때문에 고구려시대로 파악하고, 장수왕대(長壽王代)로 추정했으니 서기연도로 환산하면 병술년은 446(장수왕 34년)년, 기축년은 449(장수왕 37년)년에 해당된다.
장수왕 15년(427년)이 평양성(하북성 평주)으로 천도한 해이므로, 그 후에 후방으로 부터 신라의 침공을 방비하기 위하여 한성(대동강 평양성)을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간지년도는 60년마다 똑같은 간지가 반복되므로, 기축년을 장수왕 37년(449) 혹은 평원왕 11년(569)이 될 수도 있다. 평원왕은 25대 국왕으로 31년 7개월 동안(559년 ~ 590년까지) 재위하면서, 수나라의 침공에 대비했다. 581년에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겁박하자, 평생 전쟁준비를 하다가 서거했다. 혈기왕성한 아들 영양왕이 뒤를 잇고 수나라를 선제공격하여 결국 고수전쟁이 터졌다.
<삼국사기>에 평원왕 二十八年 장안성으로 천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단학계에서는 대동강 평양성을 장안성으로 보기 때문에 평원왕때에 이곳으로 천도하고 축성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수나라의 침공에 대비했던 평원왕이 천도한 장안성은 하북성 평양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방어시설로 파악되어야 하며 대동강으로 후퇴했다고 볼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시기가 장수왕대이건 평원왕대이건 간에 대동강 평양성에서 한성이라는 석각명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북사(北史)>에 고구려에는 삼경이 있었다는 기록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결정적인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제시한 기록은 중국사서의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 기록만 가지고도, 지금 대동강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강단사학에서는, 온갖 이유를 붙여,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 도읍지 평양을 대동강으로 옮겼다고 가르친다. 무슨 이유일까?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유업을 계승하여, 대륙으로 <서진정책>을 추진했다.
[참고] 박승배, EBS, MBC, KBS System Producer Director. East-West Center Institute of Culture and Communication.
https://www.facebook.com/kbs2baron
[참고] [데일리안] 류지윤 기자, 2024.02.16. (yoozi44@dailian.co.kr)
[참고] Tak Kim [한사모]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세계한민족 공동체회의 대표. https://www.facebook.com/takkim1244
[참고] ‘#786__ 책 "읽기"와 "듣기". 선 전자책 후 종이책. 삼국시대 진짜 지도. 단군조선. 재야사학과 강단사학’, 뚱보강사, 2024.01.19., 조회 262.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957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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