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2__ 박근혜 탄핵. 이승만 독재자 프레임은 정적들이 만든 거짓
- 뚱보강사
- 2023.10.01 13:12
- 조회 195
- 추천 1
=
742__박근혜 탄핵- 이승만 독재자 프레임, 정적들이 만든 거짓--- 14ok
뚱보강사 이기성
742__ 박근혜 탄핵. 이승만 독재자 프레임은 정적들이 만든 거짓
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손석희를 홍석희로 부르며, jtbc를 재인티비씨로 부르는 것일까? ‘#701__ 손석희와 재인TBC. 영어 유치원 <미래형 인재 자녀교육>’ 뚱보강사 칼럼에 나오는 내용이다. --- 문재인은 대선후보 중에서 유일하게 홍석현을 비밀리에 독대...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는가? 이를테면 손석희는 아직도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언론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손석희를 홍석희로 부르며(?), jtbc를 재인티비씨로 부르는 것일까(?). 문재인은 2015년 3월, 조선일보의 사주이자 '밤의 대통령'인 방상훈과 서울 모처에서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 문재인은 지난 대선 때 대선후보 중에서 유일하게, 2005년에 주미 한국대사를 지냈던 홍석현을 그의 저택에서 비밀리에 독대했다. 손석희는 홍석현 아들의 월급쟁이고, 홍석현은 문재인의 통일외교안보 특보였다. 홍석현(洪錫炫, 1949~)은 중앙일보, JTBC 회장을 지낸 이후 중앙홀딩스 회장, 재단법인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 한국기원 총재를 맡고 있다. 그는 기업인 이건희의 처남이며 기업인 이재용의 외숙부이다.
헌법재판소가 2017년 3월 10일 대심판정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사건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박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을 내렸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이날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에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을 확정했다. 이는 2016년 12월 9일 국회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고 헌재에 접수한 지 92일 만의 결정으로, 헌재가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를 인용한 것은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현직 대통령 파면이다.
왜 박근혜가 탄핵을 당했나? 박광배 [페친] 님이 글을 올렸다(2023년 9월 5일). 1979년에 20살 안팎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숨이 막혀오는 압박감. 요즘 그걸 느낀다... 촛불 항쟁(抗爭)으로, 일부에서는 혁명으로 평가해 촛불 혁명으로 부르는데... 가짜 뉴스, 가짜 유튜브도 돌아다닌다. 극우 인터넷 이봉규 씨가 허경영 씨와 대담한 내용이란다. 2019년 6월 25일자. 모두의 공원.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3640430).
허경영: 중공군이 남하하면서 미국군이 만 명 이상 죽은 승전기념일(미군승전)에 박근혜가 참석해서, 미국은 박근혜에게 어마어마한 배신감을 느끼고 CIA에 찍힘... 그래서 탄핵됨. 이봉규: 그러면 문재인 대통령도 제거될 수 있네? 허경영: 문재인 대통령같이 미국과 중국을 왔다갔다하는 것은 괜찮아. 왜 박근혜가 제거 되었겠는가? 그거야 외세에 대들었기 때문이겠고...
미국 제임스하우스먼이 1946년 출생, 1981년에 사망했다.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은 미합중국의 군인이며, 미국 중앙정보국 CIA 소속 정보장교이다. 미군 군사고문단 참모장, 중앙정보국(CIA) 한국 책임자(미국 육군 방첩대 CIC 한국 책임자), 미8군사령관 특별고문, 주한유엔군총사령관 특별고문직 등 여러 직위를 역임하였다. 한국군의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서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군의 아버지'로 칭하였으며, 1946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에 머무르면서 한국 현대사의 주요사건들에 관련된 인물이다. 그 중요성에 비하여 CIA 정보장교라서 더글라스 맥아더나 존 하지 군정 사령관에 비하여 일반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참고: 나무위키).
태블릿 피시가 뜬금없이 왜 튀어나왔을까? 그거야 중국 가서, 시진핑 푸틴이랑 다정하게 열병했잖여... 그걸 보는 바이든 심사가 어땠겠나? 오바마가 아니구. 그 동네는 정부가 여러 개인 거 같어... 우리는 군권이 없다. 자주독립국가가 아녀. 초보 허수애비가 자연발생인가? 그렇다면 박근혜 사면할 때 정교수도 사면했어야지. 조국이네 밟으며 밀어준 거 아녀. 지금도 옴짝들 못하는 게 조국이네가 본보기 아녀. 한 놈만 줄창 패는데 공권력으로. 어쩔건데. 뒷배 든든하고 우리는 죽어나가고. 군부가 나설겨? 정보기관이 나설겨? 경호가? 의회 무녀리들이 뭔 탄핵, 설령 통과했다손 헌재 구렝이들이?
요새, 길 가다 칼 맞는가 하면, 교사들이 줄줄이 목숨을 놓는 다네. 이는 또 뭔 일여? 희망마저 꺼져가고 있는가? 백제가 망할 때, 어느 절에 백마가 나타나 몇날 며칠 울부짖으며 법당을 돌더란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는 소부리(所夫里, 일명 사비)라 불렀으며, 538년(백제 성왕 16) 웅진(熊津, 현재의 공주)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백마가 울부짖자 소부리 사람들이 집단으로 정신을 놓더란다. 이는 뭘 말할까? 내보기에 나랏 사람들 오랜 스트레스가 아닐까 싶다. 내는 요즘 징조를 본다. 집단무의식 같은 거...
백마는 아무래도 계백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리 나라가 위태롭기로 처자를 벨까? 그는 오래 고민했을 게다. 백제가 멸망한 뒤 부흥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던 성인 주류성이 무너지니, 귀족들 남해안 테레성에 피신시킨 처자식들 데리고 일본으로 가더라...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의 왕비인 은고(恩古)의 전횡이 일본서기에 전한다. 고구려승은 백제는 자멸했다 개탄하더라. 요즘 맨 정신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우남 이승만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불가능
1960년의 4·19 주도 이영일(李榮一, 1939~) "63년 전 그때는 몰랐지… 이승만 아니면 대한민국도 없었다는 걸"... 1960년은 뚱보강사 경기중학교 3학년 학생 시절... ‘수업이 중단되고, 담임 선생님이 낮에 교실로 들어오셔서, 학생들 집으로 가는 방향별로 구룹을 나눈다. 뚱보강사는 집이 서대문이라 화동(안국동) 경기중고등학교에서 광화문쪽으로 가는 그룹에 속했다. 그룹별로 해당 선생님을 졸졸 따라서 실탄이 날아다니는 경복궁 옆을 통과해서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NewDaily] 안선진 기자가 보도했다(2023년 4월 18일)...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인 4·19를 주도한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 이영일 전 국회의원 인터뷰... "이승만 정부 부정선거 항의 시위… 우남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불가능"... "제2공화국, 이승만이 하야 요구 수렴해 탄생… 독재자 프레임, 정적들이 만든 거짓"... "4·19세대가 모여 63년 만에 이승만과 화해… 이제 80대 노인들도 무용지물 아닌가, 허허"...
올해 2023년은 1960년 4월19일 부정선거 항의 시민혁명인 '4·19혁명'이 일어난 지 63년 되는 해이다.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던 당시 20대 학생들은, 이후 50년이 지난 2010년에 이승만의 공(功)과 과(過)를 재평가했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북한에 위성국가를 세우려는 소련을 경계하고, 유엔 감시 아래 자유총선거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을 꾀했던 이승만에게 소련과 내부 정적자들에 의해 '민족 분열의 책임자' '독재자'라는 거짓 프레임이 씌워져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주장은 좌파등 운동권들이 아직까지 주장하고 있다. 이영일(85) 전 국회의원을 만나 1960년 당시 상황을 생생히 듣고, 이승만 대통령을 향한 거짓 프레임을 파헤쳐봤다. 이 전 의원을 비롯한 4·19 주역들은 지난달 26일 처음으로 우남(雩南)의 묘역을 찾아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1960년 4·19혁명에 앞장선 계기는?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부정선거는 민주주의 국가, 즉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에서 발생하는 최고의 범죄다. 당시 자유당 소속이던, 이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였던 조병옥 씨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대통령에 무투표 당선됐다. 그는 85세의 노인이었고 후계자가 필요했다. 그때 초대 비서실장이던 이기붕이 후계자가 돼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자유당 강경파, 소위 4.19혁명의 원흉들이 있었다. 이들이 이기붕을 억지로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 했고, 노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저 따를 뿐이었다. 그는 부정선거를 통해 이기붕을 당선시켜야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한 적이 없다. 또 국무회의 속기록을 보면 실제로 부정선거가 있지도 않았다. 국민의 선택에 맡겼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바깥에서만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떠들어댔다. 이에 내가 친구들을 불러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데모에 합의해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 4월 19일, 당시 현장을 떠올린다면?... "시위 전날인 18일, 정치학과 동기이자 문리과대학학생회 신문 '새세대' 주간을 하던 이수정이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선언문을 작성했다.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그 유명한 4·19선언문이다. 그러고는 글씨를 잘 썼던 황선필이 사학과에서 가리방(がり版, 줄판)으로 쓰고 등사기(1960년대의 수동 프린터)로 찍어 선언문을 제작했고, 미리 만든 플래카드와 합쳐 정치학과 연구실에 보관했다. 데모 시작도 전, 경찰이 문안을 가져가는 일을 막기 위해 나는 그날 연구실에서 잤다. 19일 아침이 밝자마자 강의실마다 뛰어 들어가 학생들에게 플래카드를 나눠 줬다. '선생님, 미안합니다' 한마디 하고 들어가면, 교수들도 '이 친구가 데모 선동하러 왔구나' 생각하고 '나는 오늘 수업 안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모든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뛰쳐나와 운동장으로 몰려갔다. 법대 캠퍼스에도 가서 '동기들이 전부 데모를 나갔는데, 법대생들은 뭐 하고 있느냐?'고 외쳤고, 그곳 교수들 역시 '오늘 수업 없다'고 말했다. 1960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미술대학, 의과대학이 지금의 대학로에 있었다.
그렇게 다 같이 행진을 하고 있는데, 경찰들이 막아섰다. 대학생들로서는 곤봉을 든 무술경찰을 뚫을 수 없더라. 곤봉에 맞아, 쓰고 있던 안경 유리가 깨져 눈에서 피가 흘렀다. 서울대 의대 병원까지 같이 가 준 김치호라는 친구는 도서관에 둔 가방을 찾으러 가겠다고 말하고는, 데모에 뛰어들어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경찰 총에 맞아 죽었다. 미술대 학생들도 데모에 참여했는데, 그 중 고순자라는 여학생도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총에 맞아 죽었다. 당시 경찰이 총을 들었을 것이라고, 또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시위에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 했던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183명이 죽었다. 그러자 오후부터 시민들까지 합세해 시위를 벌였고, 경찰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더라. 20일이 되니 서울 경찰서가 싹 비워져, 우리 학생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각 경찰서로 이동해 민원 신고를 받고, 사회 질서를 회복해 갔다.
나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해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대규모의 시민들이 참여하며 전국적으로 확대된 반독재 투쟁이자 혁명이었다. 부정 선거 당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4할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3·15 마산 의거’에 참여한 김주열이 실종된 지 27일 만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의 허종 기자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지며 격화되었다.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회는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윤보선에 의해 지명된 장면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부정 선거 책임자와 그 과정에서 부정 축재를 한 사람들을 처벌하는데 실패하였으며 민주당 내의 구파와 신파 분열이 일어났다. 혼란을 틈타 구정치인의 활동 금지와 부패한 공직자 처벌을 명분으로 1961년 5.16 박정희 군사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4월 19일 데모 당시에는 정부에서도 질서를 유지한다며 계엄을 선포했고, 무장한 군대가 탱크를 앞세워 서울 시내로 몰려들어왔다. 그런데 학생들이 시민들과 함께 탱크 위로 올라가서는 '군인은 우리 편이다'를 외치면서 박수를 막 쳤다. 그러니 어떻게 군인이 총을 쏘겠나? 사령관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사병들이 데모꾼들 편에 가세해버리니, 대한민국 육군의 자유당 정권에 대한 충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한민국 군의 로열티가 자유당 정권에서 떠난 것이다. 구경만 하던 교수들도 가두에 나가 시위를 벌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키 150㎝ 조금 넘는 국어학자 이희승 교수가 '이승만 물러가라'를 목놓아 외치던 장면이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문장 외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플래카드를 든 채 각 대학 교수 100여 명이 대학가에서부터 행진했고, 중간에 다른 대학 교수들도 참여하면서 규모는 점차 커졌다."
--- 50년이 지난 2010년,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대학교수들의 시위 직후, 학생 부상자 위문을 다니며 '자네들이 있어 든든하다. 불의를 보고 싸울 수 있는 청년들이 있어야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는 방송에 나와 “나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선언하고 사임했다. 그때는 우리가 강해서 이 대통령이 물러났다고 생각했는데, 50년이 지나고 보니 ‘평화적으로 하야했다는 것’,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2010년, 시위에 참가했던 선후배가 모여 4·19혁명 50주년 세미나를 열었다. 기독교에서 50년은 '희년(禧年)', 즉 빚진 자를 탕감하고 갇힌 자를 풀어주고 새로 시작하는 날이다. 4·19세대가 본 '이승만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를 평가해보기로 했고, 내가 주제발표를 맡았다. 그런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①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고, ②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③해방 직후 건국 대통령이었다는 세 가지뿐이더라. 4월15일 논문 발표까지 3개월간 국회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며 조사했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유엔을 한국 통일문제에 개입시키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지닌 폐해를 깨닫고, 유엔을 한국 통일문제에 개입시키려 한 인물이 바로 이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일본을 장악하면 된다는 생각뿐,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전무했다. 반면 소련은 시베리아 개발과 태평양 진출을 위해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이 필요했고, 그래서 북한 땅에 위성국가를 만들려는 상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으로 들어온 많은 동구라파(동유럽) 이민자들에게 소련이 어떤 국가인지 물어봤다.
공산주의는 불평등이 없는 대신 소유권과 종교를 부정하고, 국가 소멸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북한이 그런 소련의 위성국가가 될 것을 경계했던 그는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들여와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동구라파 모델을 채택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유엔 모델을 선택했고, 미국 조야를 돌아다니며 '유엔 감시 아래 총선을 진행하고 통일 독립을 이루겠다'고 역설했다.
--- 남한에서 이 대통령의 인기는 대단했다... 1945년 10월 16일, 그는 해방 후 두 달이 지나서야, 미국 국무성의 도움으로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는 '대통령을 맡아 달라'는 일각의 부탁에 '당신들이 나를 좋게 평가해 준 것은 고맙지만, 그건 국민이 선택할 일이기에 절대 일방적일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해외 독립운동가 환영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해외파는 '국내파는 친일파'라고 주장했고, 국내파는 '우리가 훨씬 더 고생했다'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때 이 대통령이 벌떡 일어나서는 '2000만 국민이 친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없는 나라를 만든 이는 조선 국왕이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일본에 나라를 바쳐 한일합병을 해버렸다. 책임을 물을 것이라면 조선 국왕에게 해야 한다. 또 일제시대에 일본 황실과 똑같은 대접을 받았던 이왕직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
이승만은 우리가 임금 잘못 만나 일본으로부터 노예생활을 하는 멍에를 더 이상 쓰지 않으려면 친일, 반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자 민심이 모두 이 대통령에게 쏠렸다. 당시 그만큼 우수한 경력·관록·학력을 가진 이는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존재하지 않았다. 단언컨대, 이승만은 최고의 엘리트였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씌워진 거짓 프레임
거짓 프레임 씌우기... 하지만 여전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씌워진 거짓 프레임은 두 가지다. ①첫 번째는 소련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민족 분열의 책임자' 프레임이다. 소련은 북한에 위성국가를 세웠는데, 이 대통령이 유엔 감시하에서 자유총선거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안을 내놓으니 '전 국민이 원하는 통일을 반대하고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했다'는 심리전을 펼쳤다. 그런데 이것을 북한 공산당 김일성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국내외 좌파들이 동조하는 바람에, 그는 민족 분열을 이끈 원흉으로 몰렸다. 나중에 소련이 붕괴되고 허위사실임이 밝혀졌지만 이 허구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②두 번째는 이 대통령을 독재자로 몰아야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국내 정적들이 만든 '독재자' 프레임이다. 당시 학력·경력·경륜·리더십에서 그를 능가할 수 없었던 정치인들은 3선개헌과 부정선거를 명분으로 이 대통령을 '노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라고 칭했다.
하지만 독재자 중 이승만 대통령처럼 국민의 하야 요구를 받아들인 사람은 없다. 전부 정권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을 일치시켰고, 그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도망쳐버렸다. 반면 이 대통령은 국민의 하야 요구에 응해 다시금 공정선거를 치렀고, 제2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또 그의 자유민주주의 헌정과 한미방위동맹조약 때문에 우리나라는 지금껏 70년간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시위 당시 나 역시 이승만 대통령을 노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로 봤는데, 50년이 지나서야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 4.19 세대 각계 원로들, 한화갑 전 의원, 이인호 전 KBS 이사장, 이영일 전 의원 등이 지난달 3월 2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에 합당한 평가와 예우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참배행사를 단행했다. 과거 시위 직후 대책회의를 열면서 알게 된 각 대학 리더들에게 전화를 돌려 '올해로 4·19혁명은 63주년, 이승만 대통령 서거는 54주년을 맞았다. 금년 148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어떤 성명이나 선언 없이 묘소 참배 하나만으로 이 대통령과 우리 사이 화해의 역사를 이루자'는 제안을 했다. 여기에 응한 50~60명의 80대 노인들이 그 자리에 모였다. 노자 사상에서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도 쓸모가 생길 때가 있다는 의미다. 우리 노인들이 이 대통령 묘소 앞에서 참배를 하니 없던 쓸모가 생기더라. 허허. 이제 4·19혁명을 시작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냈고, 또 63년 만에 참배를 함으로써 화해를 이뤄냈는데 미션을 클리어했다고 본다."
친북·종북세력 판, '동지가 아니면 적'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떠한가?... "민주주의는 모순도 많고 약점도 많다. 그러나 야당이 있기 때문에, 여당의 부패와 오만을 막을 수 있다. 견제세력이 없으면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고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위기에 놓여 있다... 보수와 진보가 견제와 균형을 이뤄야 하지만, 친북·종북세력이 판을 치고 있다. 이들은 일반적 사고인 '적이 아니면 동지'에서 벗어나, '동지가 아니면 적'이라 생각하고 적을 만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견제와 균형이 '없는' 정권을 견제와 균형이 '있는' 정권으로 변모시킨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독립된 정치개혁위원회를 만들어, 바람직한 선거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701__ 손석희와 재인TBC. 영어 유치원 <미래형 인재 자녀교육>’,
뚱보강사 칼럼, 2023.07.07. 조회 120.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940911
[참고] 가을길, 2019-06-25.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3640430
[참고] 박광배, 2023-9-5.
https://www.facebook.com/duegipa
[참고]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A0%9C%EC%9E%84%EC%8A%A4%20%ED%95%98%EC%9A%B0%EC%8A%A4%EB%A7%8C
[참고] [NewDaily] 안선진 기자, 2023.04.18.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4/13/2023041300084.html
---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흐르게 했던 왕은 태종(太宗, 1367 ~1422)이방원이었다. 방번, 방석 어린 형제는 물론 개국공신 정도전 부터 처가 민씨집안 까지 완전히 도륙을 냈던 이방원이었다.
이방원(태종)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10명의 신하가있다고 치자. 그 중의 한 명은 틀림없는 충신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 명은 반역을 꿈꾸는 역적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8명은 누구 일까?“
"나머지 8명은, 내가 강하면 충신(忠臣)이 되고, 내가 약해지면 역적(逆賊)이 된다."
태종 이방원의 고뇌(苦惱)와 처갓집까지 멸문 (滅門)을 시킨 그 번뇌 (煩惱)를 이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국가를 경영 하는 자가 맞이해야 할 슬픔이요, 고독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박근혜의 몰락 속에서 발견한 것은 돌아선 8명이었다.
김무성이 그랬고 이정현이 그랬고 유승민, 이준석이 그랬다.
평소엔 입이 닳도록 충성을 약속하던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돌아섰다.
그들은 비박과 친박 이란 이름으로 당쟁 싸움에 골몰했을 뿐,
주군의 위기엔 무기력 한 존재였고 배신자들 이었다.
언제나 조직엔 1명의 충신과 1명의 역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8명의 기회 주의자가 있으리라.
사람이 없으면,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또한 사람을 바꾸지 못하니, 정부조직을 완성할 수 없다. 보다 널리 사람을 구해야 하니.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성의(誠意)와 집념을 갖어야 한다.
지도자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
믿음을 속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 지도자인 당신은 지금 누구보다 강해 져야 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역사를 맡아야 하는 그 위대함은, 한마디로 고독(孤獨)이다.
위대한 고독.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숨쉬는 것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고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