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__서울대 129위. 이승만과 프린스턴대 윌슨 총장
- 뚱보강사
- 2022.10.3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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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__서울대 129위- 이승만과 프린스턴대 윌슨 총장--- 12ok
뚱보강사 이기성
601__서울대 129위. 이승만과 프린스턴대 윌슨 총장
한국 대학 중에서는 서울대가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고... 그 뒤를 성균관대, KAIST, 고려대, 연세대가 이었다... 세계 2000대 대학에 '중국 338곳 대 미국 280곳'… 한국은?... 미국 매체 US뉴스&월드리포트가 10월 25일(현지시간) 발표한 ‘2022·2023 최고 세계 대학 순위’(Best Global Universities Rankings) 명단에서 사상 처음으로, 중국 대학 수가 미국 대학을 앞질렀다. [한국경제] 이고운 기자가 보도했다(2022년 10월 26일).
국내 1위 서울대 세계 129위, 국내 2위 성균관대 세계 263위, 3위 KAIST 세계 282위, 4위 고려대 세계 290위, 5위 연세대 세계 292위... 울산과학기술원(360위), 세종대(397위), 포스텍(포항공대·409위), 한양대(441위) 등이 500위권에 들었다. 세계 1위는 올해도 하버드대... 순위 발표를 시작한 2015년 이후 계속 1위를 고수했다. 하버드대는 MIT, 스탠퍼드대, UC버클리, 옥스퍼드 순으로 지난해와 동일한 톱5 체제를 구축했다.
좌파매체의 이승만 대통령 폄훼 공작
좌파매체의 교묘한 조작... 2022년 8.15 건국절을 앞두고,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관련해 상당히 악의적인 기사가 쿠키뉴스에서 보도돼 반박한다. 기사의 요점은 이승만 대통령이 본처(박승선)를 버리고, 프란체스카 여사와 중혼하였으며, 이름 숨기려고 권력을 이용했다. 그리고 버림받은 본처는 법사(일부러 이런 표현을?)에게 사기당하고, 폭력을 겪다가 죽었다... 이런 내용이다. 좌파매체들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지능적인 폄훼 공작은 한 두 번이 아니다. 최대현 [펜앤드마이크] 편집제작부장이 보도했다. 먼저, 이승만 대통령이 박승선 씨와 결혼한 것은 맞다. 이승만 대통령은 박 씨와의 사이에 아들 봉수 씨를 낳았다. 그러나 아들 봉수 씨는 이 대통령의 미국 유학시절, 어린 나이로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망(1906년)했다. 1910년 이승만 대통령이 6년 만에 귀국했을 때, 아내 박승선 씨와 이 대통령의 아버지, 즉 시아버지의 관계는 파탄직전이었고, 이승만 대통령도 본가가 아닌 YMCA에서 기거해야 했다.
그리고 1912년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미국으로 떠날 때, 이 대통령은 박 씨와 이혼을 하고, 위자료까지 지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쿠키뉴스는 박승선 씨를 '본처'로 보도했지만, 정확하게는 '전처'가 맞는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권력을 이용해 호적을 정리, 혼인기록을 지웠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승선 씨가 결혼할 1891년에 현대식 호적제도나 법적인 이혼절차가 있었을까? 일제는 1923년 조선호적령을 발령해 호적제도를 정리했다. 즉 이승만 대통령은 ‘호적제가 생기기 전’인 1912년 박승선씨와 이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이 1945년 귀국 후 박승선 씨가 돈암장으로 찾아왔을 때, 문전박대했다고 하지만, 윤치형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돈암장에서 만났으며, 서로를 존중했다고 한다.
--- 교묘한 역사 짜깁기를 통한 이승만 대통령 폄훼인 것이죠... 좌파매체들의 이승만 대통령 폄훼 공작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대한민국을 건국되어선 안 될 나라로 만들고, 김일성이 세운 북조선이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한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1921년 자유시 참변이후 유명무실화된 항일무장운동을 부풀려, 김일성의 신화를 만들어 낸다(그나마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 김성주이지, 만주에서 활동한 김일성이 아니다). 좌파들은 끊임없이 대한민국의 건국역사를 부정한다.
이번에 광화문 광장을 재개장하면서, 사헌부 터가 복원되고,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명량 분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저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부터 설치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 광화문 광장에 건국대통령의 동상을 세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오세훈 서울시장이나,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8.15 건국절을 맞아 신경 써야 할 일일 것이다.
우남 이승만, 철학박사 이승만
국부 이승만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 -철학박사 이승만은 1875년(고종 12년)에 태어났다... [페친] 국민의힘당 워싱턴디시 총괄 본부장인 Sook Koo님이 글을 올렸다. 이승만은 프리스턴 대학에서 전공한 과목은 철학과 정치학과 국제법이었다. 이승만이 정치학과 국제법을 추가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력으로는 한국을 독립시킬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를 내다보고도 있었지만, 프리스턴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윤병구가 그에게 찾아와 한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윤병구의 말로는 이승만이 ‘친일파 대한제국 외무고문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암살한’ 전명운과 장인환의 애국 행위를 폭력 행위자로 몰아서, 의도적으로 재판에서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으려 한다는 모략이 충격을 준 것이었다. 그는 고의적 기피라는 ‘모략적 발언’을 윤병구로 부터 전해 듣고 나서, 충격을 받고 국제법 과목을 선택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30줄에 들어선 만학의 이승만으로서는 프리스턴 대학원에 또 진학 한다는 것은, 벅찬 과정이었지만 그는 열심히 공부 했다.
--- [티브이데일리] 공미나 기자가 [TV온에어]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전명운·장인환, 조국을 위해 만난 두 남자”를 보도했다(2018년 6월 3일). 대한제국 외무고문 스티븐스를 암살한 ‘애국자 전명운과 장인환’의 이야기...
1903년에 미국으로 건너온 전명운은 사탕수수 농장, 방직 공장 등에서 노동자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자, 전명운은 안창호가 주축이 된 독립운동 단체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그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수익의 일부를 독립운동 단체에 보태왔다. 그러던 중 1908년 3월 21일 대한제국 외무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의 인터뷰가 전명운의 분노를 샀다.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 방문 당시, 미개한 조선인들에게는 일본의 식민 정치가 필요하다는 막말을 했고, 이것이 대서특필됐다. 스티븐스는 평소에도 일본을 도와 외신 기자들에게, 일본이 대한 제국을 돕고 있다는 망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스티븐스 암살한 전명운과 장인환
이에 분노한 공립협회 회원들은 친일파 스티븐스가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가 항의했지만, 계속된 스티븐스의 망언에 폭행 사건으로 이어졌다. 결국 공립협회는 스티븐스를 암살하기로 했고, 전명운이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나섰다. 하지만 암살 계획 당일, 안타깝게 ①전명운의 권총이 불발됐고, 전명운은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러나, 전명운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어깨를 맞고 제압당했다.
그러나 그 순간 또 다른 총알이 날아와 스티븐스를 저격했다. 그를 쏜 인물은 또 다른 ②한국인인 32살 장인환.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는 전명운과 마찬가지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며, 미국 내 또 다른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보국회 소속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던 것. 역시나 스티븐스를 암살하고자 그의 뒤를 쫓으며, 기회를 엿보던 장인환은 스티븐스를 향해 총을 쐈다. 결국 병원에 이송된 스티븐스는 이틀 만에 사망했다. 이후 재판에서 전명훈과 장인환은 "조국을 위해 스티븐스를 암살해야 했다"며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당시 암살 현장을 목격한, 한 미국인 여성은 그들의 애국심을 찬양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으며, 몇몇 언론에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기사도 등장했다. 이 사건은 해외 거주 한국인 최초의 의거로, 전 세계에 대한제국의 상황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 이승만은 고종 12년(1875년)에 조선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연마하였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YMCA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하에서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퇴위 음모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학문연마 및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성경을 들여와 읽으면서 간수 및 동료 죄수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했고, 많은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사상을 학습하고 발전시켰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감옥 내 도서관을 만들 정도였다. 미완성이지만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기까지 했다. 또한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비롯해서 여러 저술들을 남겼고,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도 계속 논설을 썼다. 이승만은 러일전쟁 이후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을 원했던 ‘민영환과 한규설’의 끈질긴 주청으로 29살이었던 1904년 8월에, 5년 7개월의 감옥 생활을 끝으로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 요청”이라는 임무와 함께 미국 유학을 결심한 그는 미국으로 떠난다. 을사조약의 국제법적 부당함을 주장하는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돼 활동하였고, 한국의 주권회복을 위한 청원외교를 전개하였다. 1875년생 이승만은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나중에 미국 28대 대통령(1913~1921)이 되는 우드로 윌슨이 총장으로 있던,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1910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이후 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초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거쳐서, 1948년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국독립당 김구 후보를 따돌리고 당선되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승만은 이후 직선제로 바뀐 1952년 2대 대선과 1956년 3대 대선에서도, 두 번 연속으로 도전해 왔던 무소속 조봉암 후보를 이기면서, 1948년 7월부터 1960년 4월까지, 총 12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 청년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과 정치학과 국제법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데는, 그를 아끼던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총장의 배려가 컸다. 1902~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 윌슨은 이승만 청년을 자기 자식들 못지않게 사랑하였다. 윌슨은 가족 파티가 있을 경우에, 이승만을 초청하였다. 그는 초대된 인사들에게 이승만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여기 한국이라는 조그마한 나라에서 온 이승만 군을 소개합니다. 이 학생은 우수한 능력과 고결한 성품을 가진 우리 프리스턴 대학원 학생입니다. 원래 한국 왕실의 후손으로서, 장차 한국을 짊어지고 나갈 인물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청년입니다. 그는 놀라울 만큼 자기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의 정세에 대하여 정통합니다. 이 학생을 오늘 특별히 내빈 여러분께 소개 하는 이유는, 우리 미국 사람들 못지않게 자국인 한국에 대한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점과 자기의 동포들을 매우 사랑한다는 점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청년이 오늘 날 동양과 같이 혼란한 세계 정국을 이끌어 나갈 인물이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파티에 나온 한 미국인이 질문을 했다. "그러면 저 학생이 조선의 왕자입니까?" 이 말에 이승만은 단호하게 답변하였다. "여러분, 이 자리는 조선의 왕자가 여러분을 초대한 자리가 아닙니다. 윌슨 총장께서 과도하게 소개를 해주셨는데, 저는 왕자가 아닙니다. 저의 먼 조상 중에 임금 한분이 계셨는데, 그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비록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지만, 반드시 내 나라를 찾고야 말겠다는 것이 저의 소신입니다." 이승만의 말이 끝나자, 그 미국인이 말끝을 물고 늘어진다. "앞으로 한국이 독립하게 되면, 다시 군주국으로 세우실 것입니까? 아니면 입헌군주국으로 세우실 것입니까?" 짓궂은 질문에도 이승만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답변한다. "선생은 미국이 군주국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런 시대에 역행하는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일본이나 태국 같은 나라를 보아도, 입헌군주국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이승만이 "저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독립을 한다면 우리나라의 정체는 ‘민주 공화국’을 세울 것입니다." "민주 공화국이라니요?" "저는 한국의 전 백성들이 자유롭게 뽑는 대통령과 국회, 사법부 등 삼권 분립으로 세울 나라를 원합니다." 총장 윌슨은 딸 셋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윌슨 총장은 이승만을 아들 같이 대해 주었다. 크리스마스 때면 윌슨 부인과 딸들은 빠짐없이 그를 초대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족 노래자랑이라도 있으면, 미국의 민요가 쏟아져 나왔다. 반면 이승만은 한국의 민요 중 아리랑을 불렀다. 미국인들은 아리랑 노래 가사의 뜻도 모르면서, 이승만의 나라 잃은 슬픔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리랑 멜로디에 감탄사를 연발 하였다.
윌슨 총장의 이승만 사랑은 도가 넘칠 정도였다. 그는 교내 행사에서 이승만을 소개할 때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장래 한국 독립의 메시아가 될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이승만은 이러한 행사에 자주 참석 하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나라를 잃은 약소민족으로서, 우울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위안이라면, 가끔 기숙사를 찾아와,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는 목사님의 기도였다. 이승만은 국제법학과 학생들보다도 신학과 학생들과 더 친하게 지냈다. 목사님의 배려로, 기숙사에 들어가는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이유도 한 몫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1910년 6월 14일에 이승만의 35세 늦깎이 졸업식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열렸고, 이승만은 윌슨 총장으로부터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이 윌슨 총장은 3년 뒤, 제28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은 기뻐해야 할 마당에, 기쁨보다도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며 마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그가 할일은 조국에 돌아가, 그동안 갈고 닦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조국은 그 옛날의 조국 대한제국이 아니었다. 대한제국도 아니고, 조선도 아니었다. 그가 박사 학위를 받은 그해에 대한제국과 일본이 정식으로 합방된 것이다. 졸업을 기뻐해야 할 시기에, 이승만은 1904년 감옥을 출옥할 때와 같이 암담하기만 하였다. 이승만은 일본의 식민지에 들어가서, 어떻게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부터 막막하였다. 한국에 돌아간다면 어디로 갈 것이며, 누구부터 찾아가야 할지가 막막하였다... 그러나... 가자 조국으로 ... 이승만은 귀국을 결심하였다.
[참고] [한국경제] 이고운 기자, 2022.10.26.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2210265430i
[참고] 최대현, [펜앤드마이크] 편집제작부장, MBC에서 뉴스데스크, 뉴스투데이 앵커 근무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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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Sook Koo, 국민의힘당 버지니아, 메릴랜드, 워싱턴디시 총괄본부장.
https://www.facebook.com/groups/1324588214259907/user/100012781510405/
https://www.facebook.com/photo?fbid=1463556660747037&set=gm.5581096378609048
[참고] [TV온에어]의 [티브이데일리 공미나 기자], 2018. 06.03.
http://tvdaily.co.kr/read.php3?aid=15279922041358826019
[참고] [나무위키] 이승만/일생.
https://namu.wiki/w/%EC%9D%B4%EC%8A%B9%EB%A7%8C/%EC%9D%BC%EC%83%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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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프린스턴대 윌슨 이름 딴 강의실 이승만 기념홀 헌정
[JTBC] 입력 2012-10-04 19:35 수정 2013-11-25
https://news.jtbc.co.kr/article/article.aspx?news_id=NB10178164&fbclid=IwAR2Dv8_LrEvKOUUPUST7xKBVchpR4_pfyIBfk4Kg05oPLi2M6rtzs2dFyYc
요즘 우리 현대사, 특히 이승만 전 대통령을 재조명하자는 논의가 활발한데요. 이 전 대통령의 모교인 미국 동부 명문 프린스턴대에 이승만 기념홀이 헌정됐다고 합니다.
정경민 특파원이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한 1910년, 35살 이승만은 이곳에서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훗날 미국의 28대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당시 프린스턴대 총장은 이승만에게 박사학위를 주고 멘토도 돼줬습니다.
특히 윌슨이 1918년 선언한 민족자결주의는 이승만에게 독립의 희망을 심어줬고 3·1 운동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됐습니다.
바로 그 윌슨의 이름을 딴 공공정책 대학원 16호 강의실이 오늘(4일) 이승만 기념홀로 헌정됐습니다.
이 전 대통령의 박사학위 취득 100주년을 기념해 이 대학 한국 동문회가 조성한 이승만 학술기금으로 만든 겁니다.
[세실리아 라우스/우드로 윌슨 스쿨 학장 : (이승만 학술기금으로) 국제학술회의나 저명한 학자의 강의를 유치할 계획입니다.]
80명 정도가 들어가는 이 강의실 벽면엔 이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동판이 부착돼있습니다.
오늘 헌정식엔 정운찬 전 총리, 이기수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장과 이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 부부 등 100여명의 하객이 참석했습니다.
[이인수 박사/이승만 전 대통령 양아들 : 아버님으로선 100년 후에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모교에 다시 오신 겁니다. 역사의 만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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