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__조돌이 뉴라이트 사사카와 재단
- 뚱보강사
- 2022.06.22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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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__조돌이- 사사카와 재단-일본재단 -뉴라이트 친일 부역집단 유사 유태인---9ok
뚱보강사 이기성
542__조돌이 뉴라이트 사사카와 재단
말은 생각의 외출복이다... 언어 수준이 그 사람의 수준이다... 요즘은 언어의 설사 시대다... 악플(惡reply)에선 이미 세계를 제패한 한국이다... [조선일보]에 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글이 실렸다(2022-06-17). 값싼 말(cheap talk)은 그나마 양반이다... 듣도 보도 못한 비속어, 합성어들로 온 사회가 오염되고 있다. 보통은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키지만,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킨다. 물건에는 품질이 있고, 사람에겐 인품이 있듯이 말에는 ‘언품(말의 품위)’이 있다. 사실, 내가 한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특히 입은 화(불행, 재앙)의 출입구다.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고 했다. “거친 말을 쓰지 말라. 그것은 반드시 너에게 되돌아온다.” 법구경(주요 불경)의 말씀이다.
‘일본재단’(日本財団 にっぽんさいだん, The Nippon Foundation)은 일본의 비영리 단체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지정되었던 사사카와 료이치가 도박사업으로 번 돈을 바탕으로 세운 "일본경정협회"가 나중에 이름을 바꾼 것이다.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 1899~1995)는 일본의 정치인, 사회활동가이다.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지만 불기소 처분됐다. 우익 단체인 국수대중당 총재, 중의원 의원, 일본재단 회장, 후쿠오카공업대학 이사장을 역임했다.
사사카와 료이치는 일본 오사카부에서 양조장 장남으로 태어났다.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초등학교 친구였다. 만주에서 마약상으로 매우 많은 돈을 모았고, 귀국하여 1925년 지방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예능 사무소를 운영하는 한편, 주식에 손을 대 큰 재산을 모았고, 군에 비행기, 비행장을 헌납했다. 1931년 우익 단체 국수대중당을 결성해 총재에 취임했다. 부하 중 폭력배 고다마 요시오(일본의 극우 운동가이자 CIA 요원. 폭력조직 금정회의 고문. ‘정재계의 흑막’, ‘해결사’, ‘우익의 거괴’라고 불린 거물)도 있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의 숭배자로, 단원에게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제복과 비슷한 검은색 셔츠를 입혔다.
사사카와 료이치는 1935년 공갈 혐의로 체포돼 오사카 형무소에 약 4년간 수감됐지만, 최종적으로는 무죄 석방됐다. 1939년 단신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에 건너가 무솔리니와 회견했다. 1942년 총선거에서 도조 히데키 내각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이 때 이미 시게미쓰 마모루(일본 도조 내각, 고이소 내각,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하토야마 내각에서 외무대신 역임. 일본 제국의 마지막 대동아대신), 기시 노부스케(일본어: 岸信介, 1896~1987 농상무성장관,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 역임)와 친분이 있었다. 언론에서 파시스트, 우익으로 불렸다. 석방 후에 사사카와 료이치는 고속정 경주 도박인 모터보트 경주법 제정에 힘을 쏟았고, 사단법인 일본 모터보트 경주회 설립에 관여했다.
사사카와 료이치, 가미가제 특공대 창안
‘일본재단’의 실질적 설립자인 사사카와 료이치는 존경하는 인물이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로, 1932년 1인 1기 1함 격멸을 제안하여, 2차 세계대전 말기 가미가제 특공대 개념을 창안한 자로 유명하다. 일본의 국수대중당(22세에 설립), ‘전일본 애국자 단체회의’(전애회의) 등에도 간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A급 전범용의자로 체포,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불기소 처분 후 출옥하였고, 사람을 마음을 사로잡고 조종하는 재능을 타고났기에 감옥에서도 아베신조 조부와 인맥을 쌓고, 그 후 국가에서 도박사업을 개인에게 준 ‘일본경정협회’를 만들어 엄청난 검은돈을 벌었다. 이 단체는 나중에 ‘일본재단’이 된다. 한편, 사사카와는 WHO에 기증한 100만 달러의 기금으로, 수상자에게 10만 달러를 지급하는 사사카와 보건상도 만들었다.
사사카와는 A급 전범임에도 반성 없이, 노벨평화상을 수상을 목적으로 로비하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1982년 국제연합평화상에 그쳤다. 일본재단과 연계되어 사사카와 료이치에 의해 설립된 많은 재단들이 국제적으로 존재하며, 이 재단들이 사사카와의 전범행적과 ‘일본의 전쟁범죄를 미화하는 역사왜곡’에 조직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며, 이를 허구의 사건인양 왜곡하는 내용의 "The Nanking Massacre: Facts versus Fiction, A Historian's Quest for the Truth"라는 책을 ‘일본재단’이 출자하여 설립한 도쿄재단에서 영역하여, 전 세계에 보급하였다.
한국에서 일본재단(사사카와 재단) 활동
일본재단(사사카와 재단)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보면, 겉으로는 ①인적자원의 개발, ②인도주의적 교류 등으로 접근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경우, 1995년 연세대가 일본재단으로부터 기금 100억 원을 받았고(12대 총장 송자, 1992.8~1996.7), 10년 동안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밝히지 않았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밝혀진 것이다. 당시 연세대 교수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연세대 총장이 독단적으로 일본자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고려대도 일본재단의 목표가 되어 1987년 일본재단에서 10억 원을 받아, 설립자의 이름을 딴 ‘사사카와 영-리더(Young-Leader) 장학금’을 만들 정도다.
일본재단(사사카와 재단)은 태생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이 만든 단체로서, 또 이 단체를 주도한 핵심인사들이 독도 문제와 현안 한일 문제 등에서 극우적인 편향성을 보이는 점, 그리고 일본내에서는 "새역사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재단(현재 회장은 사사카와 요헤이) 홈페이지를 보면, 연세대, 고려대 등에 대한 지원 및 수재의연금ㆍ복지단체 기부, 학회 지원 등 1973년부터 30여 년간 국내에 꾸준히 "기부"라는 명목으로 자금지원을 해오고 있는데, 사사카와 재단(일본재단)의 검은 속내가 보이는 대목이다.
일본재단의 연세대, 고려대 지원
전두환 정권(1980.9~1988.2) 때 국가조찬기도회를 주도하던 세력이 이명박과 박근혜 때에 ‘뉴라이트’로 옷을 갈아입고, 보수정권에 기생했다. 뉴라이트(New Right)는 대한민국에서 200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한 기존의 올드라이트(Old Right)와 대비되는 신우파를 말한다. 뉴라이트의 이론적인 배경을 제공한 서울대 경제과 교수출신 이영훈은 ‘이승만 학당’이라는 위장단체를 차려놓고 겉으로는 보수정권을 옹호하면서, 독립과 건국을 갈라치기 하고, 기독교 장로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1948년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를 건국사로 포장했다. 반대로 김구와 임정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사는 폄하하기 위해서, 김구는 좌파니 테러리스트니 폄하하면서 광분하고 있다.
---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과 좌절(1946~1947)...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는 1946년 7월 25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 우 정치인들이 연합하여 만든 기구였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원회가 휴회된 직후,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결과 1946년 7월 25일 김규식, 여운형의 주도하에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좌, 중도 좌, 중도 우, 우파를 포괄한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위원회의 목적은 남북협상을 통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통일 임시정부의 수립이었다. 좌우합작운동위원회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하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지 않은 좌, 우익세력의 반발, 미군정의 지원 중단, 여운형의 암살 등으로 인해 동력을 잃게 되었고, 결국 1947년 12월 6일 해체되었다. 김구와 이승만은 해방 후 단정과 좌우합작이라는 정치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한 분이다.
뉴라이트 극우종파와 다윗의 별
축복 받아야할 대한민국 ‘현대사를 왜곡’하는 두 중심축이 민족적 정통성을 북에 두는 ①좌경종북 세력과 독립과 건국을 갈라치기하는 ②뉴라이트 극우종파 분자들이다. 좌경세력으로 부터 보수정권이 친일 친미로 매도당하는 원인을 제공한 집단이 바로 ‘뉴라이트’이었다. 진시황 때의 간신 조고를 뺨칠 정도로, 두 얼굴을 가진 조국사태 때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태극기 집회가 문 정권 타도에 이르지 못하고, 추동력을 잃게 된 원인도 집회에 침투한 뉴라이트 때문이다. 그 실체적인 증거가 성조기와 함께 나타난 이스라엘 '다윗의 별'이었다. 성조기는 한미동맹을 상징한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별’이 참여해야할 어떤 명분도 이유도 없다.
친일 부역집단과 유사 유태인(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한국 역사, 특히 단군으로 대표되는 고대사와 민족주의 사상을 경계한다. 그래서 공동의 목적을 가진 친일 부역자와 유사 유태인들이 합작으로 ‘뉴라이트’라는 보수로 위장하고, 이승만을 제물로 삼고 우상화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식으로 우상화를 하지 않아도, 그분의 인생 50년에 걸친 독립운동과 1919년에 수립된 임정과 광복 후 1948년에 수립된 정식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타이틀 한 가지만 해도 충분하다.
현 시국을 보면 양심적이고 순수한 애국세력과 건전한 기독교인들조차, 보수와 진보로 갈라진 진영논리에 중독되어서, 저런 매국노들을 애국보수로 착각하고, 또 같은 교인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동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경제와 안보가 무너지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그러나 국민정신이 망가지면 나라가 망한다. 이때 나타나는 징조가 각종 사이비 이념이 나타나고, 사교단체가 난립하여 온갖 주장이 난무하고, 국론을 분열시킨다. 광우병 파동, 사드 전자파, 세월호 괴담, 천안함 폭침설, 미군 점령군 논란, 건국절 논쟁 등등... 국민 여러분들이 직접 겪고 본 그대로이다.
뉴라이트는 이념과 종교가 혼합된 전형적인 사교집단이다. 주사파 종북세력도 마찬가지로 김일성 주체사상, 남미 해방신학, 반자본주의 친 노동사상이 혼합된 사교집단이다. 세상을 오염시키고 사람을 병들게 하는 독버섯과 같아서 반드시 박멸되어야 한다. 망국적인 진영논리의 중독에서 하루속히 깨어나 바른 역사관과 시국관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다면 부족한 글이나마 쓴 보람이 있겠다.(Tak Kim [한사모]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세계한민족 공동체회의 대표 올림).
[참고] [조선일보] 이동규 교수, 2022.06.17.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6/17/N2BSOB5SJFEJBDSGNHP2SBNXC4/
[참고] [돌멩이TV] 최한욱 대표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555026575
[참고] Tak Kim [한사모] 한뿌리사랑 세계모임 대표,
세계한민족 공동체회의 대표. https://www.facebook.com/takkim1244
[참고] 사사카와 재단 = 일본재단
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EC%9E%AC%EB%8B%A8
[참고] 좌우합작위원회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500600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가장 먼저 ‘단정론’(단독 정부 수립론)을 제기하였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진행한 연설에서 “통일정부 수립이 어렵기 때문에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수립하자”라고 주장했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 세력들은 이승만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분단이나 분권의 경험이 없던 한국인들에게 단정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미군정과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단정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좌익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소련과 협의하여 한국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반소반공’ 의식을 가진 이승만, 김구 등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미군정은 좌우익을 연결할 수 있는 중도파 인물로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목하였다. 미군정을 이끄는 하지 중장의 좌우합작에 대해 제안을 받은 김규식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결국 허락하였고, 여운형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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