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쌍성총관부와 태조 이성계

#122  쌍성총관부와 태조 이성계

 뚱보강사 #122


쌍성총관부와 태조 이성계


몽골족의 원나라는 고려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260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가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으로 고치고, 중국 송나라를 멸망시켰다. 원(元)나라는 1271년부터 1368년까지 중국과 몽골 고원 영역을 지배하다가 명나라를 건국하는 주원장에게 쫓겨 북쪽으로 이주한 뒤, 1369년부터 유목민 국가로 1635년까지 267년 간 더 존속했다(북원). 몽골족 원나라를 중원에서 내쫓고 주원장이 세운 명(明, 1368년 ~ 1644년)은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277년간 존속했다.


고려 31대 공민왕부터 마지막 임금인 34대 공양왕까지는 망해가는 원나라와 신흥 명나라와 고려의 힘겨루기 시대였다. 공민왕(恭愍王)은 고려 제31대 왕(1330~ 1374)으로 재위 기간은 1351~1374년. 공민왕은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28대 충혜왕의 동생. 11살 때 원나라에 가서 교육을 받고, 원나라의 노국대장공주(원 위왕의 딸 보타시리)와 결혼한 후 22살에 고려에 돌아와서 왕이 됨. 왕위에 오른 뒤 원나라(1271~1368)를 배척하고 친원파인 기씨(奇氏) 일족을 제거하였고, 쌍성총관부를 폐지하였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당시 국명은 몽골제국)가 1258년(고려 고종 45년)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통치 기구였다. 거의 100 년간을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던 철령 이북의 땅을 공민왕이 수복하였다. 쌍성총관부 탈환 전쟁은 1356년(공민왕 5년)에 시작되었다. 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는데 활의 명수인 이성계(李成桂)와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이 공을 크게 세웠다. 고려 공민왕 시기부터 이성계 집안은 신흥 무장 세력으로 급부상한다.


우왕(禑王)은 고려 제32대 왕(재위 1374∼1388)으로 신돈(辛旽)의 시녀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간신 이인임(李仁任)의 유배로 정치적 지지기반을 잃고 강릉에 유배된 후, 아들 창왕(昌王)과 함께 이성계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창왕(昌王)은 고려의 제3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388~1389년. 1380(우왕 6)년 출생하여 1389(공양왕 1)년 죽음. 1388년에 이성계가 우왕을 폐위시키고 9살 나이인 창왕을 즉위시켰는데, 1389년 재위 1년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다. 1389년 11월에 우왕과 모의해 이성계를 암살하려던 사건이 발각되어 강화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유순에게 살해되었다. 1388년부터 1389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이성계가 섭정을 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34대 왕으로 1389년부터 1392년까지 재위. 출생은 1345(29대 충목왕 1)년, 사망은 1394(조선 태조 3)년. 공양왕을 마지막으로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망하였다. 공양왕 당시 조정은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했다. 친명파 이성계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정몽주 중심의 구세력은 이성계 세력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공양왕은 등극하고 4년만인 1394년에 이성계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공양왕의 휘(諱)는 요(瑤)이고, 제 20대 신종(神宗)의 7대 손이다. 처음에 정창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기사년(己巳年, 1389년 창왕 2년)에 이성계, 심덕부, 정몽주 등이 추대하여 왕이 되었다.


공양왕은 1389년 이성계·심덕부 등에 의해,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이성계 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받아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살해하였다. 재위 동안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친 몇 차례의 제도개편을 단행하였다. 유학의 진흥을 위해서 개성의 오부와 동북면과 서북면의 부·주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하였다. 또한 배불숭유론에 의한 주자가례를 시행해 집집마다 가묘를 세워 음사(淫祀)를 근절시키고, 출가자들을 환속시켜 군사에 보충하거나 본업에 충실도록 하였다. 또한 오교양종(五敎兩宗)을 없애고, 불사(佛寺)의 재산을 몰수해 각 관사에 분속시켰다.


1390년 도선(道詵)의 비록에 의해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하게 하였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나중 1394년 10월에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 1392년 이성계 일파를 반대한 정몽주가 살해되자, 조준·정도전·남은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공양왕은 폐위되었고, 고려왕조는 멸망했다.


고려의 공양왕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방치되었다가 간성군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로 옮겨졌다가 사사되었다. 조선 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한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35년(고려 27대 충숙왕 복위 4년) 10월 11일에 함경남도 영흥(당시 회령부)에서 이자춘과 최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전주지역에서 향리로 있다가 쌍성총관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고조부 때부터 아버지 이자춘 때까지 이성계의 가문은 원나라로부터 천호(千戶)라는 지방관의 자리를 얻어 이 지역 고려인과 여진족 위에 무력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고려 31대 공민왕은 중국에서 원나라와 명나라가 전쟁을 하는 혼란한 시기에 고려의 영토를 되찾고자 1356년 원이 점령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다. 그당시 쌍성총관부 지역을 고려가 탈환할 때 적극 협조한 인물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었다.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아버지와 함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데 가담하였다.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이 지역에 화주목을 설치한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고려의 벼슬을 내렸다. 1361년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었다.


고려의 고종(高宗)은 제23대 왕(재위 1213∼1259)으로 재위 기간 중에 거란·몽골(원)의 침입을 받았다. 1271년에 원나라로 국명을 바꾼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에 천도해서 항쟁했던 비운의 임금이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을 조판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고종은 최씨(崔氏) 일파의 무단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다가, 1258년 최의(崔竩)가 살해되자 정권을 되찾았다.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특히 123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몽골군의 침입을 받고 강화도로 천도하여, 28년간이나 항쟁하였다. 원나라(몽골)가 쌍성총관부(철령 이북)와 동녕부(서경)를 설치하게 된 시작은 1258년(고종 45년)에 원나라의 별장 산길과 보지가 동여진을 경유하여 장성 이남을 침공했을 때 고려의 조휘와 탁청 등이 철령 이북의 땅을 바치며 원나라에 투항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는 점령한 이 지역을 다스릴 기구로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다. 11년 뒤인 1269년에 고려의 최탄은 반란을 일으킨 후, 서경을 비롯한 북계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 6성을 원나라에 바쳤고, 원나라는 서경을 동녕부로 개칭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1356년(공민왕 5년)에 추밀원부사였던 유인우가 공민왕으로부터 쌍성총관부 탈환을 명령받고 출정했다. 이때 조돈과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내부에서 고려군과 내통하여 쌍성총관부의 성문을 열어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켰다(이성계 공로①).


이성계는 5년 후인 1361년 독로강(현재 강계지역) 만호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였다(이성계 공로②). 그해 겨울, 중국에서 침입해온 10만 명의 홍건적들이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자 이성계는 고려인과 여진족으로 구성된 자신의 사병 조직을 이끌고 수도 탈환에 참가하였다. 이성계는 홍건적의 두목을 모두 활로 쏘아 죽이고 수도 개경에 맨 처음 입성하는 큰 공을 세웠다(이성계 공로③). 그 이듬해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을 물리쳤다(이성계 공로④). 1364년에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공민왕을 폐하려고 침입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명 군대를 최영과 함께 무찔러서 고려 왕실을 지켜내었다(이성계 공로⑤).


이성계는 홍건족과 원나라 침략뿐 아니라 극심해진 삼남 지역의 왜구 침입도 막아냈다. 내륙까지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던 왜구를 황산에서 섬멸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이것이 1380년 9월 이성계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의 황산에서 왜구와 싸워 크게 승리한 전투인 황산 대첩이다(이성계 공로⑥).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 밤, 침전에 들어간 최만생과 홍윤 등은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는 공민왕을 시해했다. 이때 공민왕의 나이 45세였다. 공민왕 사후 우왕을 추대하여 중앙 정계를 주름잡고 친원정책을 펴던 이인임 세력을 최영과 함께 물리친 이성계는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항상 정계의 중심부에는 최영 장군이 직속상관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즈음 국제 정세는 원나라가 북쪽 몽골 지역으로 쫓겨 가고 1368년 주원장이 건국한 명나라가 중국 본토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명나라에 의해 중국 본토에서 몽골지방으로 쫓겨 올라간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북원’이라고 부른다).


중원을 차지한 명나라는 고려 공민왕이 1356년에 수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고 억지를 부렸다. 고려 32대 우왕과 최영 장군은 명나라의 이러한 요구에 반발했고, 명나라가 건국 초기라 불안한 정국이니 이를 틈타 요동까지 정벌하자고 나섰다. 그러나 이성계는 최영의 의견에 반대했다. 허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에게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요동을 정벌할 것을 명령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위화도에 주둔한 이성계는 큰 비를 만나고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자 조민수를 설득해 회군을 강행했다. 위화도는 신의주시 상단리와 하단리를 이루는 섬이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이 섬에서 요동정벌군을 돌려, 고려 수도인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군대를 개경으로 회군하여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최영 장군을 제거했다. 당시의 신진 사대부는 고려 말의 사회적 모순을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던 온건파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급진파로 나뉘어 있었다. 온건파는 정몽주와 이색이 대표, 급진파는 정도전이 대표였다.


이성계 장군은 정도전과 협조하여 고려에 무조건 충성을 주장하던 정몽주를 제거하고 4개월 뒤,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개경에서 공양왕에게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고, 이듬해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다. 고구려의 후예인 ‘고려’보다는 고조선(단군조선)의 후예라는 뜻의 ‘조선’이라고 국명을 채택한 것은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도 아우르는 더 넓은 고차원의 민족의식의 발로였다.


태조 이성계의 재위 기간은 불과 6년(1392~1398)밖에 되지 않았다. 태조는 말년에 자식들과 부인의 권력 다툼을 보고 권력의 무상함을 느껴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당시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은 세자 자리는 당연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정도전과 이성계의 후처인 강씨의 생각은 달랐다.


민주주의 방식으로 왕권과 신권(민권)의 조화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정도전에게는 너무 강한 이방원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이 부담이었다. 강씨 역시 전실 자식인 이방원이 세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강씨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가 다음 왕이 되기를 강력히 희망하였고, 결국 강씨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자리를 차지하였다. 격분한 이방원은 즉시 정도전과 맞서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자신의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을 급습해 죽이고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모두 살해하였다. 아버지 이성계 생존 시에 왕자의 난 참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표] 고려 말과 조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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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년 원나라(몽골) 쌍성총관부 설치(고종 45년)

1330년 공민왕(고려 31대) 탄생(1330~1374)

1335년 이성계(조선 태조) 탄생(1335~1408)

1351년 공민왕 등극(재위 1351~1374)

1356년 쌍성총관부 탈환(공민왕 5년)

1368년 원나라(1271~1368) 멸망, 주원장 명나라(1368~1644) 건국

1374년 공민왕 시해, 우왕 등극(고려 32대, 재위 1374~1388)

1376년 최영 홍산에서 왜구 토벌

1380년 이성계 왜구 토벌(황산대첩)

1388년 창왕(고려 33대, 재위 1388~1389) 등극

1389년 공양왕(고려 34대, 재위 1389~1392) 등극

1392년 정몽주 선죽교에서 피살

1392년 고려(918~1392) 멸망, 이성계(태조, 재위 1392~1398) 조선 건국

1394년 정도전 [조선경국전] 저술

1398년 조선 제2대 정종(재위 1398~1400) 등극

1400년 이방원 2차 왕자의 난. 조선 제3대 태종(재위, 1400~1418)

1418년 조선 제4대 세종(재위, 1418~1450) 등극

1429년 프랑스 잔 다르크 백년전쟁 후기 영국군 격파

1443년 세종대왕 훈민정음 창제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바하마제도의 산살바도르(서인도제도) 도착

1498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완성

[참고] doopedia.co.kr 두산백과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8,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 이성계, 김정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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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임은 1368년 좌시중(左侍中)을 거쳐 이듬해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고, 그 해 서북면도통사(西北面都統使)가 되어 원나라의 동녕부(東寧府)를 정벌하고,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살해되어 후사(後嗣) 문제가 일어나자 태후(太后) ·경복흥(慶復興)의 주장을 꺾고 우왕(禑王)을 추대했다. 정권을 잡고 친원정책(親元政策)을 취하여 친명파(親明派)를 추방, 지윤(池奫)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의 충복들을 요직에 앉히고, 매관매직을 하며 경복흥을 무고하여 죽이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그 횡포에 격노한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등에 의해 1388년 경산부(京山府: 星州)에 안치(安置)되었다가 곧 사망하였다....
    고려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태조 왕건으로부터 공양왕까지 34대 왕을 거치면서 475년간 존속했다. 
    고려는 유교적 이념을 수용하여 통치에 반영하였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마련하였다. 또한 과거제를 시행하여 계층 간의 이동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골품제에 의해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신라보다 개방적이었다. 무신정변과 몽골의 침입, 뒤이은 원나라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국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고려는 우아한 고려 청자와 세계적인 수준의 인쇄술을 자랑하는 나라로 세계에 알려져있다... 
    鄭昭盛(소설가, 단국대학교 명예교수) 문리대 64학번의 글을 참고로 퍼왔습니다.
    === 고려왕조와 포은 정몽주 === 
    내가 가지고 있는 세 종류의 대백과사전들에서 정몽주(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의 항을 찾아보면 한결같이, 정몽주가 이성계(1335, 충숙왕 복위 4-1408, 조선 태종 8년)를 죽일 마음을 먹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이 기록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내가 알고 느끼는 포은 정몽주는 가슴 속에 불타는 애국심을 간직한 고려왕조의 충신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그리고 문신이지만 그의 병략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를 따르는 많은 장수들을 확보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포은 정몽주의 경우, 당대 최고의 원로학자로 추앙받던 이색의 표현대로 동방이학지조라 불릴만큼 중국경서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대학자였다. 그것에 못지않게 병서와 군략에 뛰어난 창칼없는 무인이었다.
    포은 공이 대 여진전에 참여한 것은 1364(27세)년이었다. 과거에 장원급제(1360)하여 고려조에 출사하고 난 후 4년이 흘렀을 때였다. 국경지대인 화주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여진족 추장 삼선. 삼개를 무찔렀다.
    1380(45세)년에는 전라도 운봉에 웅거하면서 백성을 괴롭히던 왜장 아지발도 휘하의 왜구대부대를 패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이기고 개경으로 귀경하던 중 관향인 전주에 들러 오목대에서 승전연을 베풀던 이성계는 좌중에 전투에서의 포은 정몽주의 선전을 극구 칭찬하였으며, 어느면 그의 출중한 전술전략에 두려움까지 표하였다는 사서의 기록도 있다.
    실제로 젊은 시절의 포은이 겪은 수많은 벼슬 중에는 병의 계급에 해당하는 것도 눈에 띈다. 학자로서가 아니라 병사로서 고려사직에 봉사한 것이다. 그의 낭장겸합문지후니 위위시승이니 하는 벼슬은 병의 계급에 속하는 벼슬이다.
    하기야 고려의 과거제도에는 무인을 위한 분야가 따로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무인 벼슬은 문과에 합격한 사람 중에서 임명했다. 포은이 장수의 벼슬을 받았다고 해서 병장기를 들고 적장과 맞붙어 싸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운봉왜구 토벌 후 다시금 동북면으로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이성계가 출동했을 때 그는 역시 포은을 조전원수로 데리고 가 승전할 수 있었다.
    1372년(35세)에 정사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 조정에 파견된 적이 있었는데, 귀국길에 발해만에서 풍랑을 만나 정사 이하 12명의 사절들이 전원 수장되었다. 유독 포은만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이 사실은 포은이 운이 좋았다고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포은의 여러 가지 특성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즉 그는 젊은 시절 전장을 누빈 장수로서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그에게는 위기에 대처하는 남다른 기지와 민첩함과, 생명을 삼키려는 자연과 싸워서 극복할 수 있는 완력이 있었다는 시사라고 보아야 한다.
    이성계가 낙마하여 벽란도에 누워 있을 때, 포은은 과감하게 행동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당시 수문하시중의 벼슬을 살던 포은이었기 때문에 병을 풀어 이성계를 급습하여 포박하고 국문한다면 그의 일파가 기도하는 역성혁명의 죄상을 밝혀 참수할 수도 있었다. 속내를 감추고 개경 이성계의 집으로 문병을 간 것이 잘못이었다. 방원의 기민한 마수에 걸린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긴박한 순간에 대인풍의 포은은 위기감에 사로잡힌 방원의 급습에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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