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__ 연해주 참변과 콜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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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보강사 이기성

 

 

351__ 연해주 참변과 콜차크

 

교황과 로마제국이 조작한 스토리텔링이 십자군 전쟁이라면 영국과 처칠이 조작한 스토리텔링이 콜차크이야기이다. 때마침 처칠과 콜차크에 대해 페친 [백호]님이 좋은 글을 올려주었다. 영국이 세운 콜차크 동상과 그를 그리는 영화는 우리에겐 어떤 의미인가? 설탕이 하얀 황금이던 시대, 영국은 사탕수수의 생산지 남미의 카리브해를 약탈 정복하고, 수백만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짐승보다 못하게 노예로 부린다. 영국은 목화의 최대생산지 인도의 벵골을 점령하고, 벵골의 면포 기술자들을 모아 오른손가락을 잘라낸다. 극악무도한 반인륜의 범죄로 인도 장인의 면포 제조를 중단시키고, 영국이 독점한다. 스티븐스의 증기엔진을 장착하여, 인도 캘리컷에서 대량생산하여 영국은 큰 부를 축척한다. 캘리컷(Calicut)은 인도 서남쪽 아라비아해에 접하여 있는 항구 도시인데, 처음에는 포르투갈의 영토였으나 이후 영국, 프랑스, 덴마크의 영토가 되었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상륙한 곳이며, 16세기 포르투갈의 동방 진출 근거지이었다. 예전에는 면포의 생산이 활발하였으나, 현재는 코프라(코코넛 오일)커피차 따위를 수출한다.

 

영국은 사탕수수, 인도의 목화에 이어 중국의 차를 욕심냈다. 유럽에서 차 문화가 일어나자, (은화)이 모자라는 영국이 정상 무역으로는 중국의 차와 비단, 도자기 등을 차지할 수 없자 프랑스를 끌어들인다. 영국의 빅토리아여왕(Victoria, 1819~1901)은 세기의 가장 더러운 전쟁으로 국제사에 공식기록된 아편전쟁을 일으켜 유럽 8개국을 끌어들여서 중국을 준 식민지화한다. 아편전쟁은 1840년과 1856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영국과 청나라의 무역 수지 불균형 문제로 발생한 전쟁이다. 계속 청나라로 유출되는 은화를 영국이 다시 회수하기 위해, 청나라에 아편을 살포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전쟁이다. 인도에서는 손가락을 자르고, 중국에서는 아편을 팔아서, 영국은 막대한 돈을 벌고, 유럽전역에다 빅토리아 가문의 씨를 뿌리고, 왕족 귀족 브르조아 특권 자본주의를 만들고, 자본자유민주주의로 포장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귀족특권층은 약탈한 자본으로 봉건착취시대를 이어간다. 빅토리아(재위 1837~1901)는 영국뿐만 아니라, 대영제국, 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인도의 여왕이었다.

 

 

처칠과 콜차크 제독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은 점령국 아일랜드의 총독가문으로 영국의 귀족 중 귀족이었다. 영국계로 유럽에 최특권층을 누리던 (해적출신이 근본인) 영국 귀족들의 최대 숙적은 토지공동소유,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출현이었다. 자신들이 누리던 모든 귀족 특권층이 사라지는 만민 평등사회는 철저히 막아야 할 최대의 적이었다.

 

그즈음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1789), 입헌군주제 헌법(1791), 루이16세 탈출의 바렌느 사건(1791), 국민공회라는 의회(1792.9~1795), 루이16세 처형(1793.1), 마리앙투아네트 처형(1793.10), 로베스피에르처형(1794), 총재정부 시절(1795~1799), 나폴레옹쿠데타(1799), 통령정부시절(1799~1804)을 거쳐 프랑스의 제1공화국 종말(1792.9~1804.5)을 고했다. 이어서, 나폴레옹1제정 황제 등극(1804), 나폴레옹 1차 퇴위(1814), 부르봉왕조 복고(1814~1830), 나폴레옹 2차 퇴위(1815), 루이 18(1755,1814~1824), 샤를 10(1757,1824~1830,1836), 7월혁명(1830), 오를레앙 왕가인 루이필리프1(1773,1830~1848,1850), 6월봉기(1832), 2월혁명(1848)으로서 프랑스 왕조의 복고는 끝이 난다.

 

1789714일부터 17947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인 프랑스혁명이후 국제노동자연합 인터내셔널(18649,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이 본토 영국에 세워지고 프랑스의 파리코뮌정부 출현은 영국여왕 가문들의 유럽자본지주 특권층을 긴장케해서 영국 정부는 그들을 잔혹하게 무력으로 진압해 가고 있었다. 191710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정부의 출현은 자칭 자본민주주의로 포장한 영국귀족 상류층이 주축이된 유럽 최상류층은 바짝 긴장하고, 초강력 진압에 나선다.

 

 

적백내전(러시아내전)

 

윈스턴 처칠은 러시아 백군을 점령하고, ‘콜차크를 제독(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세우고 체코, 일본, 미국, 캐나다, 프랑스를 끌어들여 노동자정부 볼셰비키를 진압키 위해 적백내전을 일으킨다. 러시아내전은 한국에서는 적백내전이라는 별칭으로 많이 불렸다. 내전의 주축이 볼셰비키 정부군과 대항군이 각각 적군(Красная Армия, Red Army), 백군(Белая Армия, White Army)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적색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백색은 혁명 이전의 질서를 의미한다. 10월 혁명 이후 혼란해진 러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볼셰비키가 정권을 탈취한 19171025일 시작된 내전이다. 실질적인 끝은 콜차크의 전러시아 임시정부가 붕괴한 19202월로 보지만, 백군 일파인 표트르 브란겔의 남러시아 임시정부나 몽골의 미친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같은 경우 1921년까지 버텼다. 공식적인 종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프리아무르 임시정부가 망한 19221025일으로 본다.

 

최후의 백군이 사라진 날은 19236~10월쯤이며, 일본이 북사할린에서 철수한 것을 기준으로 따지면, 1924년이다. 1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러시아 전역이 피해를 입다보니, 피해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당시, 러시아 총인구 약 9천만 명중 전사자만 백만 명 단위고, 아사자는 천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된다.

 

콜차크제독은 1919~1920년 백군으로부터 러시아 최고통치자로 인정받았으나, 정권이 전복된 뒤 볼세비키에게 처형당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발틱 함대의 함장이었고, 1918년 흑해 함대의 부제독으로 근무. 19176월 사임당하고 미국으로 갔다. 만주에 있는 백군을 통합하려했으나 실패했다. 191810월 옴스크로 가서 볼세비키 정부의 장관으로 취임. 19181118일 군부쿠테타로 집권했다. 그러나 19191114일 옴스크가 적군에 함락되자, 이르쿠츠크로 옮겼으나, 체포되어 처형됐다.

[참고] blog.daum.net/daekeuncho/4235

 

 

경신참변, 연해주참변, 파르티잔

 

이 과정에서 우리민족은 영국의 앞잡이 주구였던 일본군에 경신참변(1920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해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을 당하고, 또 연해주참변을 당하며, 연해주 파르티잔스크에서 영국 일본군에 대항하는 파르티잔(우리발음 빨치산)으로 일어나 항전한다. 빨치산은 유격전을 수행하는 비정규군 요원의 별칭으로,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스파냐어에서 나온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두산백과).

 

연해주에서 일본군이 한국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인 연해주 참변의 배경은 3.1 만세 운동 후 일본이 시베리아 연해주의 항일 세력을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의 식민 권력을 위협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백군이 무너지기 전만 해도 일본군은 시베리아에서 한인들을 적극 학살하지는 못했다. 복합적인 국제 문제 때문에 꺼려했다. 다만, 백군을 통해 간접으로 통제를 시도할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백군의 통제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연해주의 항일 세력이 거슬렸다.

 

19197월부터 일본 육군 수뇌부는 조선과 러시아, 중국 국경 지역에 있는 항일 운동가들을 대량 검거하려고 하였다. 일본 해군의 사이토 마코토(재등실 齋藤實)는 이것을 지지했다. 그러다 1919812, 이 사이토 마코토가 3대 조선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사이토 마코토는 부산을 거쳐서 서울(경성)로 갔다. 191992일 사이토 마코토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 때 사이토 쪽으로 수류탄 하나가 날라와서 터졌다. 사이토는 이 때 겨우 살았다. 수류탄을 던진 사람은 강우규 선생이었다. 강우규(1859~1920) 선생은 노인 동맹 단원이다. 그리고 그 노인 동맹이 바로 블라디보스톡에 근거를 둔 단체였다.

 

강우규 선생은 185962일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났다. 30세 때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이사하여, 한의술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여 장로가 되었고,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만주로 건너가 지린성[吉林省] 라오허현[饒河縣]에 정착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광동중학을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박은식(朴殷植김치보(金致寶) 등과 상의하여 조국에 돌아가 거사(擧事)할 것을 자원, 영국제 폭탄을 가지고 서울에 잠입하였다.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폭살하기로 결심하고, 191992일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에서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총독을 암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무라다 육군소장, 혼마치 경찰서장 등 핵심인물들이 중경상을 입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사이토 마코토는 928일에 시노다 지사쿠를 만났다. 지사쿠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막 돌아와서 평안남도 도지사로 승진한 상태였는데, 사이토가 지사쿠와 만난 다음 날, 사이토 총독은 하라 타카시 일본 총리에게 촉구했다. 러시아 극동 지역과 만주를 철저히 통제해달라는 촉구였다. 이런 전보는 곧바로 도쿄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전송됐다. 파병 온 헌병대는 조선에서 인원을 보충받았다. 191910월 말부터 일본군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일본은 연해주의 한인들을 더욱 직접 통제할 계획을 준비했다.(참고: 나무위키).

 

191911콜차크의 백군 진영이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 연해주의 항일 운동가들은 더더욱 적극으로 항일 운동을 하였다. 연해주 각지에서 한인들은 빨치산 부대를 더욱 적극으로 후원해줬다. 중국 만주 지역 한인 독립 운동 단체들은 연해주로 무기 수집대를 보냈다. 만주 지역에서 온 수집대는 연해주 마을을 돌면서 무기를 수집했다. 1920314,15,163일 간 블라디보스톡에서 노병회 대표자 선거를 하였다. 공산당 후보 중 김만겸과 박모이세이가 선출됐다. 미국 적십자사는 1920313일 아침 신한촌 소학교 생도와 간호부, 빈민들에게 의복 등 7백점을 기증했다. 또한 친일파 한인과 일본 밀정들은 살해를 당하거나 피습을 당하거나 행방불명됐다. 일본 상품 불매 운동도 전개됐다. 이 운동에 한인, 러시아인, 중국인이 함께 했다.

 

19203, 일본 제국 사령부는 연해주의 혁명 수비대에게 전면 공격할 준비를 시켰고, 이것을 군인들에게 비밀리에 명령했다. 항일 조선인들 제거 계획도 이 때 포함됐다. 시노다 지사쿠의 후임자이며 조선 총독부 관리인인 야먀자키 마사오가 이 계획을 세우는데 앞장섰다. 그래놓고는 331일엔 시베리아 일본군을 철병하겠다고 거짓으로 대외에 선언했다.

 

당시, 미군은 이미 철병을 선언한 상태였다. 1920120,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미군을 철병할 것이라 선언했고, 같은 해 41일 러시아 주둔 미군 사령관 윌리엄 그레이브스(William Graves)와 병사 2300여명은 블라디보스톡을 떠났다. 일본군 군사령관은 42일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정부에게 경고했다. 한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연해주 정부에게는 "일본군의 주둔에 필요한 제반의 사항 즉, 숙영·급양·운수·통신 등에 관하여 지장을 주지 말 것"을 요구했다.

 

연해주 정부는 일본군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했다. 45일에 조약문에 도장을 찍기로 했다. 러시아 붉은 군대(적군)는 각 부대에 경계 태세를 해제하라고 지시했다. 44일은 지휘관들 다수가 주말 휴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같은 날인 44일 밤, 일본 제국군은 붉은 군대를 습격하고, 군인들을 무장 해제 시키고 체포했다. 일제군의 습격은 48일까지 계속 됐다.

 

 

독립군 진압했던 충견 콜차크

 

1920년 영국의 주구(남의 사주를 받고 끄나풀 노릇을 하는 사람)였던 일본군에게 한국인이 대량 학살당한 경신참변, 연해주참변을 당했는데, 오늘에와서 우리민족의 독립군 파르티잔(빨치산)을 진압했던 연합군 총사령관 영국의 충견 콜차크제독을 다시 세우는 영국 처칠의 후예들... 영국인들은 콜차크제독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영화를 만들고, 동상을 세우며 훌륭한 인물로 포장한다. 러시아 빨갱이들 공산폭도들을 대적해 일어난 영웅이라고...

 

객관적 국제사의 진실은 우리 민족근대사의 일본식민지 시대를 이끈근본이되는 영일동맹과 그리고 독립군 토벌대장 콜차크제독. 수백만 명이 학살되며 무장투쟁으로 항전한 우리민족의 국제적 근현대사에서 과연 윈스턴 처칠과 그가 세운 연합백군 총사령관 콜차크 제독은 우리 한국인에겐 어떤 의미의 인물인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정신이다라고 하며, “역사를 잃는 것은 정신을 잃고, 정신 나간 나라를 만들까 두렵다고 말했다. 그러한 두려운 현장에서 우리들은 현재 정신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참고] 백호, 2021-07-08.

https://www.facebook.com/janghalimbaek

[참고] (출처) 드골정부의 프랑스 제 5공화국 3공화국, 파리코뮌,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비시정부, 4공화국- 프랑스역사 |작성자 연우.

https://blog.naver.com/hongyw/222263621966

[참고] 러시아내전.

https://blog.daum.net/daekeuncho/4235

[참고]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7%B0%ED%95%B4%EC%A3%BC%204%EC%9B%94%20%EC%B0%B8%EB%B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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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1919년 8월 한창걸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한인 부대를 재조직했다. 11월17일 밤 '콜차크' 백위파 정권에 반대하는 체코군 사령관 가이다 장군의 봉기에 가담해 기관포 대장을 맡았다.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797

    수찬 최초 한인 빨치산 대장, 제국주의 간섭군과 싸우다

    1919년 7월 일본·미국 등 제국주의 간섭군의 수찬 총공격으로 빨치산부대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적후활동을 위한 소부대로 편성되고 작전구역이 할당됐다. 한인 부대는 니콜라예프카 등으로 갔으나 식량이 떨어지고 탄약이 보급되지 않는 가운데 토벌이 가중돼 곤경에 빠졌다. 일시 활동을 중지하고 부대를 해산한 후 재조직화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인들 사이에 의견대립까지 불거졌다.

    1919년 6월 니콜라예프카에서 한인노동자대회가 소집됐는데, 쟁점은 투쟁 대상을 누구로 할 것인가였다. 모든 제국주의 간섭군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일본군 및 백군과 싸울 것인가. 한창걸 등 빨치산 지도자들은 전자의 입장을 고수한 반면 귀화 한인 중심의 부농과 대한국민의회 대표자는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내 열강의 힘을 빌려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한 대한국민의회 대표자들은 미군과 전투를 꺼렸다.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수찬 빨치산부대도 해산됐다.

    1919년 8월 한창걸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한인 부대를 재조직했다. 11월17일 밤 '콜차크' 백위파 정권에 반대하는 체코군 사령관 가이다 장군의 봉기에 가담해 기관포 대장을 맡았다. 그러나 폭동은 진압됐고 한창걸은 백위군에 체포돼 일본헌병대로 넘겨져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 2개월 후 1920년 1월30일 블라디보스토크 백위파 정권이 붕괴되고 연해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한창걸 등 한인 11명은 석방됐다. 한창걸은 300명 규모의 빨치산부대를 다시 조직해 시코토보로 이동해 제1 극동소비에트 연대의 1개 대대로 편재됐다.

    일본이 니항사변(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예프스크=尼港에서 적위군과 일본군의 전투 과정에 트랴피친 러시아 빨치산 대장의 명령으로 자행된 잔혹한 학살사건)을 구실로 연해주에 재출병해 ‘4월 참변’을 일으켰다. 1920년 4월4일 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54명,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76명의 한인을 체포하고 최재형 등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당시 수찬 한창걸 빨치산부대도 큰 타격을 입었다. 초기부터 같이 활동했던 이백구·강태준 등이 전사하고 부대는 다시 흩어졌다. 일본군이 기습공격 직전에 한인 부대를 무력화하는 치밀한 공작에 러시아군대가 미온적으로 대처해 한인 빨치산부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출처 : 매일노동뉴스(http://www.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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