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원고지정과 타이포그래피와 폰토그래피

 

뚱보강사 칼럼

106. 원고지정과 타이포그래피와 폰토그래피

 

모녀가 영화관에 갔다. 한참 영화에 빠져 있는데 딸이 엄마의 귀에 대고 소곤댄다. "엄마, 아까부터 옆에 있는 남자가 자꾸 내 허벅지를 만져." 엄마가 조용히 딸에게 속삭였다. "그으래? 그럼 나랑 자리 바꾸자!"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라는 용어는 몹시 생소하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출판업계와 인쇄업계에서는 타이포그래피라는 말 대신에 ‘원고지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타이포그래피라는 단어는 디자인업계에서 전래된 용어이다. 어원적으로 타이포그래피는 타이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타이프(type)는 활자. 손으로 쓰는 대신에 활자로 쓰는(치는) 기계가 타이프라이터이다. 나무활자(목활자)이건, 금속활자(연활자)이건, 도자기활자(세라믹활자)이건 활자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것이 타이포그래피의 원래 의미이다. 폰토그래피(fontography)의 어원은 폰트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폰트(font)는 인쇄용 본문 활자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금속활자보다는 디지털 활자(digital type)일 경우에 폰트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 한글 활자의 사용 역사는 약 600년이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문자(고한자) 조판 역사는 2000년 이상이 된다. 그러나 어려운 고한자(녹도문자/갑골문자)와 쉬운 고한글(정음문자/가림토문자)의 두 종류 문자가 단군조선(고조선) 시대에 이미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니까 우리의 한글 활자 역사는 고한글인 가림토문자로부터 계산하면 4514년이 된다(BC 2181년에 단군조선 3세인 가륵단군이 정음 알파벳 38자를 만들어 가림토문자라 불렀다).

 

고한자는 환국시대(BC 7197~BC 3898)에 사용하던 문자인 녹도문자가 다음에 개국한 배달국시대(BC 3897~BC 2333)를 거쳐 단군조선 시대(BC 2333~BC 108)에 들어와서 더 개량되고 발전되어 갑골문자로 탄생한 것이니까 고한자의 역사는 훨씬 더 길 것이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에는 건국 초(기원전 37년)부터 문자가 있어서 역사를 기록한 유기가 1백 권이 있었는데, 서기 600년 영양왕 11년에 이문진이 1백권을 5권으로 요약하여 간행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사용된 문자가 한자이던 아니던 간에 책 100권을 조판하여 제작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2049년 전 고구려 건국 초기에 100권의 역사책을 발간하였다면, 편집자는 100권의 책을 원고지정 하였을 것이고, 이것을 요새말로 바꾸면 100권의 책에 대한 타이포그래피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말로 타이포그래피를 정의한다면, ‘문자디자인’이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인쇄용 본문 활자를 디자인하는 폰토그래피는 ‘활자디자인’이나 ‘활자용 문자디자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떤 책을 출판할 것인가를 정하고 원고를 준비하고 나면, 원고의 조판 체제, 즉 어떤 글자꼴(서체)의 활자, 어떤 크기, 1행(한 줄)의 길이는 얼마(몇 자), 줄과 줄 사이는 어느 정도로 띌 것인가, 1페이지에 몇 줄을 조판할 것인가, 제목은 어떤 식으로 조판할 것인가 등을 정하는 것이 편집(디자인) 단계에서 할 일이다. 편집에서 하는 이런 일의 대부분이 바로 타이포그래피의 영역에 속한다.

 

한국 출판업계와 인쇄업계에서는 ‘원고지정’을 ‘할부(와리쓰께)’라고도 부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편집자가 제일 처음 배우는 일이 교정 작업과 원고지정 방법이다. 그러나 개인용컴퓨터를 잘 취급하는 젊은 편집자나 젊은 디자이너가 출판계에 입문하여 자리를 잡자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원고지정’ 대신에 ‘타이포그래피’라는 용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편집자의 3대 역할에는 필자의 역할, 독자와 평론가의 역할, 디자이너의 역할이 있다.

 

이 중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바로 원고지정 작업을 하는 일이고, 이 원고지정 작업이 디자인업계에서 문자디자인(타이포그래피)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원고지정을 하기 위해서는 레이아웃을 미리 잡아야 하는데, 이 레이아웃 과정을 디자인업계에서는 편집디자인이나 북디자인 작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원고지정, 문자디자인)는 ‘활자 제작과 디자인’ 그리고 ‘조판 방법과 조판된 상태의 디자인’에 관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한글 활자로 조판하거나 한글 글자를 사용하여 단행본, 교과서, 잡지, 신문 등 출판물이나 포스터, 카탈로그, 카드, 팜플렛, 브로슈어 등 소책자를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배치하고 구성하는 모든 작업을 말한다.

 

폰토그래피(fontography, 활자디자인)는 본문 인쇄용 활자의 디자인을 의미하는데, 타이포그래피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한다면, 넓은 의미의 타이포그래피에 폰토그래피가 포함된다. 특히 로만 알파벳을 사용하는 출판물에서는 폰토그래피와 타이포그래피의 차이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책자용 타이포그래피나 출판물 본문용 타이포그래피나 52개의 알파벳(대문자와 소문자)만 그리면 모든 문장의 단어를 완성할 수 있다.

 

반면에, 한글 타이포그래피와 한글 폰토그래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소책자(small printed matters)용 타이포그래피에서는 그 포스터나 카드에 등장하는 음절 10개나 20개만 그리면 문장을 완성할 수 있지만, 한글 출판물용 타이포그래피 즉 한글 폰토그래피는 최소한 1600개 이상의 음절(한글 글꼴 한 벌)을 그려야 한글 문장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 타이포그래피에서는 좁은 의미의 타이포그래피(소책자용 타이포그래피)와 폰토그래피(출판물 본문용 타이포그래피)가 구별되는 것이다.

 

책의 본문을 조판할 때의 한글 타이포그래피 요소를 살펴보면, ① 한글 활자의 구조 및 종류와 형태(서체와 크기는 물론 자소간의 속공간 등), ② 활자의 느낌과 표정(서체의 색상 등), ③ 조판된 결과의 글자 블록(글무리)의 구조 표현(자간, 행간, 단 길이, 단 간격, 조판 형식 등), ④ 본문용 서체, 제목용 서체, 장식용 서체의 적절한 사용과 조화 문제, ⑤ 각종 조판용 약물과 디자인 요소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등 여러 요소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한글은 시청각적 글자이므로 한글 활자를 디자인하거나 활자 배열을 할 때에는 그 음률과 철학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은 자유로운 비화성음인 자유음(free tone)이며, 로만 알파벳의 평균율(equal temperament) 대신 인간적인 생체 리듬을 반영하였기에 인쇄된 글자에도 그러한 정서적 요소가 요구됨은 필연적 사실이다.

 

예를 들어, 자음이든 모음이든 그 자소를 표현함에 시작과 중간, 끝의 성격이 서로 달라 그 조화와 배합에 있어 마치 그림을 그릴 때처럼 미의식의 시각 조형화 작업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 음절과 문장은 독특한 서법으로 발전하여 서예, 서도라는 특별한 정신문화적 대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참고] <타이포그래피와 한글디자인>, 이기성, 한국학술정보(주)

[참고] 이기성/고경대, ‘출판디자이너의 일’, <출판개론>, 서울출판미디어, 2006

[참고] 사람의 머릿속 생각을 남에게 알릴 수 있도록 표현하여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출판이다. 글자로 치면 머릿속 글자(글자 이미지 생각)와 외부용 글자(활자로 인쇄한 글자)처럼 머리속의 것과 머리 바깥 외부의 것은 다를 수 있다. 머릿속 생각을 글자로 표현하면 시, 소설, 수필, 논문 등 글이 되며, 도형이나 명암, 원근 등으로 표현하면 한국화, 수묵화, 수채화 등 그림이 되고, ‘도레미파’ 나 ‘궁상각치우’로 표현하면 음악의 악보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 자주 쓰이는 활자 관련 용어 정리

① 활자 = type, ② 글자 = 문자 = letter, ③ 글자꼴 = 글꼴 = 글씨체 = 서체 = 활자체 = 활자꼴 = typeface, letter form, ④ 본문체 = 바탕체 = 명조체 = body text type, serif ⑤ 타이포그래피 = 원고지정 = 할부(와리쓰께) = 문자디자인 = 폰토그래피(활자디자인) = typography, fontography, ⑥ 자소(자음 자소, 모음 자소) = 낱내 = alphabet, ⑦ 음소(자음 음소, 모음 음소) = phoneme, ⑧ 음절 = syllable, ⑨ 폰트 = 디지털 활자(digital type) = font, ➉ 현대 한글 음절 수 = 1만 1172개

.

타이포_1.JPG


 

타이포_2.JPG


 


화살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