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print 미디어와 문신립독(독립신문)

 

뚱보강사 칼럼

101. print 미디어와 문신립독(독립신문)

 

치과병원에서 환자가 “이빨 빼는데 얼마에요?”하자 의사가 “100 달러입니다”라고 답한다. 환자가 “5분이면 되는데 100달러면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하자 의사가 “원하시면 천천히 30분에 빼드릴께요”(Well, I can extract it very slowly if you like).

 

강남에 사는 네 자매가 합동결혼식을 하고, 세 딸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고, 막내딸은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첫날밤을 지낸 큰 딸이 전화를 했다. "엄마, 우리 그이는 레간자다!" (레간자=소리 없이 강하다). 둘째딸 "우리 그이는 사발면이야. 어쩌지?"(사발면=3분이면 OK). 셋째딸 "우리 그이는 애니콜이야!"(애니콜=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부산으로 신혼여행을 간 막내딸은 "우리 그이는 새마을호야!"라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친정엄마가 직접 새마을호를 타고 부산에 갔다. 부산역에서 이런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용해 주신 승객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희 새마을호는 "일일 8회 왕복운행을 하고 있으며, 승객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 주말에는 15회 왕복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종이책이나 전자책은 print 미디어이면서 출판 미디어/방송 미디어/통신 미디어/소셜 미디어가 될 수 있다. 책을 만드는 출판은 미디어 프로세스/콘텐츠 프로세스/콘텐츠 프로바이드라고도 하며, 종이media/전자media를 사용하여 도서/잡지/신문/방송물 등 내용을 담은 저작물을 제작하고 유통시키는 행위이다. 출판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책(도서/잡지)은 독창적인 원고를 바탕으로 하는 창작물이다.

 

책(단행본, 교과서, 잡지, 신문/방송)이라는 최종 결과물(최종 매체)은 일반적인 상품에 비해 각 개인의 신체적 편리성보다는 정신적인 면에서 개인의 인생 삶에, 또는 사회 변화나 역사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옷이나 스마트폰 같은 일반 상품은 보편적으로 대량 생산화가 이루어지지만 책은 크기와 모양이 같더라도 하나하나가 다 새롭고 분리된 생산물인 바, 대량 생산이 어렵고 각각 별개 상품으로 기획/편집/제작/마케팅되는 것이다.

 

print media로서의 책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① 책은 생명이 길다(항구성). ② 책은 메시지의 전달범위가 가장 넓은 대중매체이다(대량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 ③ 책은 그 내용상에서 완벽성과 상세성을 기할 수 있다. 다른 언론 매체에 비해 충분한 사전 조사와 연구를 통해, 더 깊고 자세하게 전문적인 내용을 다룰 수 있다. ④ 책은 내용상의 사상성, 진보성을 지니고 있다. ⑤ 독자의 선택권이 거의 무한할 정도로 열려 있다. ⑥ 독자가 원하면 얼마든지 쉽게 다시 볼 수 있다. ⑦ 종이책은 단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점에서 라디오나 TV 같이 초기 설비투자가 필요 없는 가장 서민적인 미디어라 할 수 있다. ⑧ 책은 이동성이 크며 간편하고 휴대가 용이한 매체이다.

 

조선시대에 책은 발행자가 관청이면 관각본(官刻本), 절이면 사찰본(寺刹本), 민간/개인이면 사각본(私刻本)으로 분류했다. 민간 출판업자가 판매 목적으로 제작한 것은 방각본(坊刻本)이라 했는데, 최초 방각본은 1576년 조선 선조 9년에 간행된 <고사촬요(攷事撮要)>이다. 조선시대의 신분 서열은 ‘사 -> 농 -> 공 -> 상’이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하층 구조인 상업이 크게 발달하고 방각본 출판이 성행했다. 근현대 출판은 1883년(고종 20년)에 박문국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박문국은 신문/잡지/서적의 편찬과 인쇄를 담당했고, 그해 1883년 10월 1일에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가 창간된다.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1986년 4월 독립협회의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발간했는데,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으로 한글판/영문판 겸용 조판 신문이다. 서재필은 4면 중 3면은 순국문, 1면은 영문으로 문장을 썼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발간했으나 그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 아펜젤러를 발행인으로 하여 윤치호가 맡아 발행하다가 독립협회의 해산과 함께 폐간되었다. 독립신문의 본문은 순한글 세로쓰기로 되어 있고, 논설과 광고, 국내외 소식 보도면으로 구성되었다. 한글판은 서재필이 편집을 하였고, 영문판은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가 사실상의 편집자였다.

 

독립신문 창간호 사설을 보면 그 창간 목적이 구구절절 나타나 있다. “ 만일 백성이 정부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이 많이 있을 터이요. 우리가 이 신문 출판하기는 취리하려는 게 아닌고로, 값을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요. 또 구절을 떼여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

 

1896년 4월 7일자‘문신닙독(독립신문)’창간사를 소개한다. (1) 우리가 독립 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잇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의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것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우히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 함.

(2)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 있을 것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설명할 터이옴.

(3)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정을 퍼일 터이요, 사사로운 백성이라도 무법한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이옴.

(4) 또 한쪽에 영문으로 기록하기는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른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함. 그러한 즉 이 신문은 꼭 조선만 위함을 가히 알 터이요, 이 신문을 인연하여 내외,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조선 일을 서로 알 터이옴.

 

독립신문은 1897년 1월 5일부터 영문판이 분리되어 4면으로 구성된 The Independent가 발행되었다. 헐버트의 동생 아처도 한국으로 건너와 1년간 독립신문의 발행을 돕다가 귀국하였다. 윤치호가 경영을 맡은 이후에 1898년 7월 1일 주3회에서 일간으로 바꿨다.

 

1890년 대 이후 민영 출판사가 많이 생겨났다. 1907년 육당 최남선이 세운 신문관은 1908년 한국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가톨릭출판사는 1888년 서울 정동에서 교리서를 펴냄. 북감리교 선교회는 1888년 삼문출판사를 설립하고 영국 성공회 선교회는 1890년 서울에 인쇄기를 도입했다. 아펜젤러는 1889년 배재학당에 인쇄부를 설치, 한글 활자와 영문 활자를 주조하여 성서를 인쇄함. 주간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서재필이 망명하자 이어서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출처] 문신닙독, 위키백과, 독립신문 창간사, 1896년 4월 7일

[출처]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 편찬위원회, 2010.1.5, 한국사전연구사

독립신문은 처음에 격일간으로 주 3회 발행되었다. 체재는 가로 22cm, 세로 33cm판형에 전체 4면 가운데 3면은 한글전용《독립신문》으로 편집하고, 나머지 1면은 영문판《The Independent》로 편집하였다. 창간 당시에는 전기(前記)와 같이 한글판과 영문판이 붙어 있었으나 창간 다음해인 1897년 1월 1일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2개의 신문으로 발행하였다. 그러나 독립신문은 정부와 수구파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서재필은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떠난다. 그 후 정부는 독립신문을 사들여 1899년 12월 4일자로 폐간하였다.

[사진 출처] 독립신문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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