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_ 추억의 1960년대 –쏘강과 마판
- 뚱보강사
- 2016.12.05 21:41
- 조회 759
- 추천 0
159_추억의 1960년대 –쏘강과 마판
고등학생수가 100만 명을 넘다가 2016년에는 60만 명, 2028년에는 28만 명으로 줄어든다니까 대학교들이 신입생 확보하려고 난리다. 1980년대는 ‘교수 초빙’이고 ‘학생 모집’이었는데, 지금은 ‘교수 모집’이고 ‘학생 초빙’이다. 허기사 고등학교 교무실 문짝에 ‘잡상인과 교수 출입금지’라는 안내문이 붙은 지도 10년은 넘은 것 같다. 교무실에 고3 학생을 자기네 대학으로 보내달라고 약속도 없이 찾아오는 교수가 많다보니...
1. 활판 인쇄 쏘강 ---
장왕사 활판공장의 최장수 대표는 도서출판 요산문화사 대표로, 옵셋공장의 신정식 대표는 신정사 대표, 장왕사의 정종화 편집국장은 고려서적 대표를 지내고 동주인쇄사를 운영 중이다. 1960년대 장왕사 활판공장에 가면 지형 굽는 냄새가 구수했다. 유독하다는 납끓는 냄새도 나고. 화·금은 고기 굽는 날. 전통적으로 매주 화요일, 금요일은 삼겹살 먹는 날. 납활자를 만지니까 납중독을 해독하려고 돼지고기를 먹는 날이다.
납활자 시대는 문선/정판부에서 납활자를 한자한자 골라내서 게라에 담아서 조판사에게 가져다주면 단어 사이에 띄어쓰기 공목을 넣고 줄사이에 인테루(레드)를 넣어 행간을 만들고, 쉼표 마침표 따옴표를 넣어 문장을 만들어 한 페이지씩 판을 짜낸다. 하루종일 20 페이지를 짰다면 이를 한 페이지씩 실로 테두리를 묶고서 등사기로 인쇄해서 교정용 꼭지를 만들어준다. 편집에서는 이걸 가져다가 초교, 재교를 보고... 수정이 끝나 OK가 되면 지형부로 넘어간다.삽화가 들어갈 자리에다 볼록판을 얹고 잉크를 닦아내고, 신문지 같은 종이를 여러 겹을 올려놓고 열과 압력을 가해 지형을 만든다. 지형에다 끓는 납을 부어 연판을 만들고 활판인쇄기에 올려 인쇄를 한다. 주조부에서는 벤톤자모 조각과 주조기에 납물을 부어 새활자를 만드는 일을 한다.
인쇄가 끝난 조판된 페이지들은 해판이 되어 잉크를 닦아내고 끓는 납속에 들어가 녹는다. 재판을 찍으려면 출판사에서 지형을 갖다 주면 연판을 만들어 인쇄를 한다. 그런데 몇 자를 수정해야 한다면 어쩌나? 다시 조판을 할 수도 없고. 이때는 쏘강(상감)을 한다. 연판에서 틀린 글자를 드릴로 뚫어서 빼내고 맞는 납활자를 그 자리에 박고 납땜을 한다. 연판은 두께가 활자 길이보다 작으니까 납활자의 나머지 긴 부분은 톱질로 잘라낸다. 이걸로 인쇄하면 수정이 완료된 책이 인쇄된다. 그런데 내년에 또 인쇄를 한다면? 그래서 이번에 고쳐진 연판으로 다시 지형을 뜬다. 이게 연판지형이다.
종로2가에 있던 장왕사에서 근처 을지로로 나가면 매년 10만 부가 넘어 나가던 중학 가정 1,2,3의 아트지 중간속표지(단원도비라)와 교과서 표지를 인쇄하던 신정사가 있고, 근처에 10포인트 활자가 있어서 장왕사 단행본을 조판하던 유풍인쇄가 있고, 종로에 나가면 안국동쪽으로 을유문화사와 평화당인쇄사가 있었다. 평화당 역시 10포인트 활자를 구비하고 있었다. 평화당의 동판인쇄용 하이델베르기 인쇄기는 성능 좋기로 유명했으므로 장왕사 교과서의 원색그림(구찌회)을 인쇄했다. 을지로에는 활판인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경사장의 돗판 공장(볼록판집)이 있었다. 활판 조판이 끝나려면 반드시 삽화를 촬영한 돗판이 있어야 하므로 여기서 대기하는 날이 많다. 당시는 카바이트를 태워 퍽하고 빛을 주던 시절. 사진 찍을 때는 1~2초만 퍽 하지만 돗판은 30초씩 퍽하고 빛을 내뿜으며 카본막대가 타들어가니 눈이 아프다. 아마 이때 내 시력이 나빠졌나 보다.
광화문 네거리 국제극장(지금은 없어짐) 뒷골목으로 가면 법문사 출판사와 활판인쇄소가 있었다. 서대문 이화여고 옆 신일인쇄사나 법문사나 만리동 광명인쇄나 같은 납활자 5호 자모를 사용했다. 경복궁 옆 적선동으로 가면 민중서관이 있었다. 민중서관은 출판사와 인쇄소가 같은 자리에 있었다. 경기고등학교 신문 ‘주간경기’를 조판하고 인쇄하던 곳. 고등학교 신문반 때 매달 와서 교정보던 민중서관. 서대문 충정로 미동국민학교 옆에 동신인쇄사라는 대형 활판인쇄소가 있었다. 장왕사의 가정 1,2,3, 사회 1,2,3의 6권은 항상 10만 부 이상 팔렸으므로 10만 부를 인쇄하려면 연판으로는 안 된다. 5만 부 이상 인쇄하려면 반드시 구리로 연판을 도금하고 인쇄해야 한다. 동신인쇄사는 구리도금(동메끼)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대량 활판 인쇄에 적합했다. 동신인쇄사 근처에 신우제책소와 한양제책소가 있어 인쇄 후 바로 접지와 정합(조아이)이 가능했다. 1970년대만 해도 서대문은 땅값이 올라 대나무 빗으로 종이를 접는 접지는 연신내(지금의 명지대 부근)에서 32P 접지와 50P 국판 교과서 접지를 많이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사를 갔지만 동아출판사와 사조사도 서대문에 있었다. 국판 크기 교과서를 국전지에다 인쇄하면 32P 터잡기가 나오지만 4·6전지에다 인쇄하면 3으로 잘라 50P 터잡기가 가능하여 한 권당 10만부씩 인쇄하는 장왕사 교과서의 경우에는 용지값이 매우 절약되었다.
2. 찡크판과 마판 ---
활판에서 쏘강과 연판지형이란 단어는 추억을 부르는 친구 이름과 같다. 옵셋에서는 찡크판과 마판이 그렇다. 1980년대 만 하더라도 충무로 인쇄골목에 가면 “따르릉 따르릉 비키세요” 소리가 나면서 자전거가 지나간다. 자전거 뒤에 커다란 철판이 둥글게 말려 있다. 철판에 스치면 손을 베거나 옷이 찢어지기 쉽다. 한 번 사용한 찡크판을 마판 시설을 갖춘 공장에 가서 표면을 곱게 연마하여 재사용할 수 있도록 다시 가져다주는 자전거의 따르릉 소리였다. 옵셋 인쇄를 하기 위한 인쇄판을 아연(zinc)으로 만들었으므로 찡크판으로 부른다. 물론 2000년도부터는 찡크판보다는 값비싼 고급 알루미늄판을 더 많이 사용하지만. 찡크판은 튼튼해서 판굽기(야끼) 작업을 여러 번 재사용할 수 있다. 판굽기는 찡크판에 약물을 발라 터잡기된 필름을 대고 강한 빛으로 빛쬐기를 하고 현상 인화하는 표면처리 작업이다. 한 번 사용한 찡크판에 모래나 유리알 알갱이를 올려놓고 흔들어서 인화된 글자를 찡크판 표면에서 갈아내고 평평하게 해주는 작업을 마판이라 한다. 마판을 해주는 기계에는 굵은 모래와 작은 유리알부터 눈깔사탕만한 크기의 유리공이 많이 들어 있는데, 스위치를 넣으면 찡크판을 전후 좌우로 흔들어주고 위에서는 물이 계속 보충된다. 초등학교 때 장왕사 옵셋공장에 놀러가면 커다란 유리공을 몰래 갖고 나왔는데, 보통 1cm 지름의 구슬치기용 유리구슬보다 몇 배나 큰 왕구슬이니까 동네에서 최고 인기였다.
3. 지도 활자와 인쇄 --- 지리부도의 검인정본 제출
1960년대 검인정교과서 제출 규정은 중학 사회과부도와 고등 지리부도, 고등 역사부도는 등사판으로 인쇄한 3색본을 1차 심사본으로 요구했다. 3색본은 한 페이지에 흑색, 적색, 청색의 잉크로 3번 인쇄한 책을 말한다. 가정, 지리, 작문 등 일반 교과서의 검정본은 흑색 1도여서 교수가 원고를 가져오면 편집에서 내용 교정과 맞춤법 교정을 보고 윤문을 한 다음, 필경사가 쇠줄판에 대고 초를 입힌 원지에 철필로 글자를 써서 등사기로 인쇄를 하고 철심을 박는 호부장으로 제책하여 백표지를 씌워 제출했다. 고등학교 은행부기, 상업실천, 상업부기, 경영대요 등 적색글자로 쓰는 전표나 장부가 삽입되는 경우에는 흑색 잉크 부분을 먼저 등사하고 핀트를 잘 맞추어 적색 잉크로 추가 등사하였다. 생물 교과서에 들어가는 동맥, 정맥, 세포막 설명 등은 1차 검정 시험에 합격한 뒤에 2차 검정시 원색 페이지 부분에다 옵셋 인쇄로 인쇄하여 추가한다.
지리부도의 저자는 교수저자 외에 제도저자가 별도로 있다. 지리부도의 지명은 보통 2만개로 편집을 하는데, 이 글자를 제도저자 혼자서는 다 쓰질 못하고 필체를 전수한 제자들이 먼저 쓰고 제도저자의 수정을 받는다. 그런데 1960년대는 문교부에서 지리부도, 역사부도, 사회과부도 모두 1차 제출본은 옵셋 인쇄가 아닌 등사판 인쇄본을 요구했으므로 필경사들이 초를 입힌 원지에 글자를 쓸 때에 제도저자의 필체를 따라야 했다. 지리부도는 지명, 국가명, 산이름, 강이름, 바다이름, 산업도의 내용용 서체가 다르다. 또 글자의 색도 다르다. 지명은 흑색, 국가명은 적색, 강과 바다이름은 청색이다. 한 페이지에 흑색, 적색, 청색 3번을 잉크를 바꿔가면서 등사기로 인쇄해야 하므로 핀트를 맞추기가 매우 힘들다. 수도 표시의 조그만 빨간 동그라미가 수도 서울이 아닌 인천이나 수원에 인쇄되기 쉽다. 또, 글자는 필경사가 쓰지만 해안선 모양, 강모양, 철도모양, 도로망을 초를 입힌 약한 원지에 그리는 것은 제도사와 필경사의 합작이 필요했다. 등사할 때는 표면이 고운 아트지 대신에 모조지(백상지)를 사용해야 등사잉크가 번지지 않고 잘 말랐다.
일단 문교부의 검인정 시험에 합격하면 2차 제출본은 3색 옵셋 인쇄이므로 본격적인 제판기술이 문제가 된다. 지리부도는 8색본, 역사부도는 6색본이 문교부 규정이므로 한 페이지의 필름은 8장이나 6장이 된다. 일반 칼라사진은 흑적청황(CMYK)의 4장인데 지리부도는 그 두 배이다. 장왕사에서는 흑, 적, 청, 담청, 육색, 담다색, 다색, 초록의 8색으로 편집하였다. 2차 제출본이 3색본이라고 흑, 적, 청 글자판의 3판만 인쇄하여 제출하면 감점을 많이 받는다. 흑색 도시명 글자판, 적색 국가명 글자판, 청색 강이름과 바다이름의 글자판만을 인쇄하면 안 된다. 적색판이면 적색글자와 수도표시 적색 동그라미, 화산 표시, 국경선 표시 등 적색으로 나타나는 것까지 함께 인쇄되어야 한다. 지리부도는 청색이면 청색 글자판 하나만이 아니고 청색 줄(라인)판, 청색 망점(하프톤)판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청색라인도 30%, 50%, 70%, 100%의 4단계 굵기를 사용하고, 라인의 각도도 45도, 90도, 135도, 180도의 4단계를 사용할 수 있으니 글자냐, 직선이냐, 망점이냐에 따라 17가지 종류의 청색 색판을 모두 합하여 한 장의 청색판 필름으로 지리부도에서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지리부도는 자동으로 CMYK의 4도로 색분해하는 방식으로는 고품질의 지도를 만들 수 없다. 관광안내 지도나 행정구역 지도 같은 간이 지도는 4색 원색분해로 인쇄가 가능하다. 제대로 된 지도책은 제도저자가 수동으로 6도, 7도, 8도 등으로 분판 지정을 해주면 제자들이 각 판을 제도하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지리부도에서 흑, 적, 청, 담청, 육색, 담다색, 다색, 초록의 8색 대신에 엷은 육색보다 더 진한 황색으로 넣거나, 담다색 대신 분홍 복숭아색을 사용하여 흑, 적, 청, 담청, 황, 복숭아색, 다색, 초록의 8색을 사용할 수도 있다. 3색 인쇄 검정본 지도 사진과 8색 인쇄 2차 검정본 지도 사진은 ‘출판개론, 2003’ p.142와 p.143에 있다.
지리부도의 편집제작과 일반 교과서의 편집제작 과정에는 차이점이 있다. 가장 큰 것이 활자의 제작과 조판 방식이다. 지리부도 활자나 금속 활자의 원도는 둘 다 제도에 의한 것으로 마루펜(mapping pen)이나 오구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지리부도의 조판은 해안선이나 도로를 그리고 그 옆에 바로 글자를 제도하여야 함으로 활자 조판과는 다른 과정이다. 금속 활자의 조판은 문선과 조판(채자, 식자, 정판)을 거쳐 현판인쇄나 지형을 떠서 연판인쇄를 하는 순서였다. 일반 제도사와 달리 지도제도사는 아주 드물었으므로 일반 정밀제도사들에게 해안선과 등고선을 제도하는 법을 가르쳐서 지도제도에 입문시켰다. 1960년대와 1970년의 지도는 원고내용을 트레이싱페이퍼에 제도하였는데 선을 주로 그린 제도팀의 도면이 전문 지도제도팀으로 넘어오면 제도저자는 해당 위치를 찾아서 지명이나 강이름을 써넣는 작업을 하였다. 1960년대는 초청장이나 청첩장 같은 것은 석판에 해먹으로 글자를 써서 인쇄를 하였고 한 장짜리 지도 역시 직접 글자를 써넣었다. 옵셋의 원조인 석판인쇄는 석판석 면에 지방성 잉크로 글자를 쓰고 질산 산성의 아라비아 고무액을 도포하여 건조시키고 아라비아 고무액과 잉크를 제거하여 판을 만들면 글자 부분만 인쇄가 된다.
그러나 지도책 같이 도면이 복잡하고 여러 페이지인 것은 석판 인쇄 방식으로 제도하기가 어려워서 반투명한 트레이싱 페이퍼에 선(line) 제도를 먼저 끝내고 지명 글자를 제도하여 필름 촬영을 하였다. 해안선과 등고선, 철도, 도로 등 선 제도가 완료된 도면에 추가된 글자가 틀렸거나 위치가 잘못되었을 때는 수정을 하기가 힘들어 다시 선 제도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으므로 아무 것도 제도하지 않은 빈 트레이싱페이퍼에 돔보(핀마크)를 그리고 위치를 찾아 글자를 붙여서 글자판을 완성하였다. 선판(line 판)을 촬영하여 첫째 음판을 만들고 글자판(지명판)을 촬영하여 두 번째 음판을 만들어서 돔보를 맞추어 2중밀착을 시켜서 한 개의 양판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선판이나 글자판을 촬영할 때 음판에 생기는 조그만 빛구멍을 완전히 막아야 제대로 된 양판을 만들 수 있으므로 음판에 생긴 빛구멍을 붓에 먹을 칠해 수정음판을 만드는 일이 시간이 걸리고 힘든 일이었다. 음판 필름 베이스 성분 때문에 먹칠한 부분이 트거나 떨어졌으므로, 5cm 이상 커다란 검정 부분은 먹이 붙어있질 못하므로 X레이필름용 까망포장지나 빨간색 광차단지를 잘라 붙여야하는 추가작업이 필요했다. 먹보다는 오페큐가 조금 낫기는 했으나 붓 칠하는 시간은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수정된 2장의 음판으로 노출을 두 번 주어 다중밀착을 하는 것이 비용과 시간이 많이 소요됨으로 전문지도제도사들은 선판을 양판(positive film)으로 만들어 양판의 망면에 거꾸로된 글자를 써넣을 수 있었으나 이런 전문가는 도장을 새기는 장인 이외에는 극소수였다. 제도저자 김영작 옹은 한글은 물론 가타가나와 한자까지 거꾸로 쓸 수 있었다. 종이와 달리 양판에는 글자가 잘 안 써지므로 글자 쓸 부분을 미리 벤젠이나 사람의 침으로 닦은 후 말려서 써야 한다. 사진 인화지를 수정할 때 사용하는 송진가루는 양판에 사용하면 안 된다. 양판에 미리 칠하는 벤젠, 침 등은 회사마다 비법이 따로 있고, 글자를 쓰는 먹이나 잉크에도 오페큐를 섞거나 암모니아, 맥주 등을 섞는 특이한 노하우가 전해져왔다.
양판에 글자를 쓰는 것이 매우 힘들었으므로, 달걀 흰자를 이용하여 유리판에다 글자를 습판으로 만들어 습판글자를 선판의 양판에 붙이는 작업 과정으로 발전했다. 편집에서 지도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만 뽑아내서 제도글자팀에게 종이에 써달라고 하여 이를 습판으로 제작하고, 선판(line판)의 양판(positive판)에 글자별로 오려서 붙였다. 트레이싱페이퍼나 습판이나 라이트테이블 위에서는 거의 투명하게 보이므로 작업이 가능했다. 단지 습판이 마르면 안 되므로 지명 글자붙이기를 완료하면 신속히 교정과 수정 단계를 거쳐 완전한 양판을 만들어야 했다. 습판 글자가 바짝 마르면 붙어 있질 못하므로 빠른 작업이 필요했고, 습판은 곰팡이가 나는 등 장기간 보존이 불가능했다. 이런 습판의 단점을 보완한 건식 스트리핑 필름(stripping film) 기술이 발명되었다. 지도 제작 방식 역시 선판의 양판에 습판 글자대신에 스트리핑 필름 방식의 양판글자를 붙이는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이제부터 글자는 제도사가 쓰는 것이 아니고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를 납활자로 조판하여 아트지에 인쇄한(전사스리) 것을 스트리핑 필름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선판을 트레이싱 페이퍼에 마루펜으로 그려서 촬영하여 음판을 만드는 방식에서 발전하여 음판에다 직접 제도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음판제도 방식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음판의 선부분을 깎아내는 방식인데, 음판베이스 위에 스트리핑 필름을 코팅하여 코팅된 부분의 일부를 열을 가해 녹여내는 방식이다. 일본의 기모토 회사에 주문해서 빨간색 음판(스트립코트 필름)을 수입하였다. 열제도기(heating pen)는 5volt 직류로 바늘사이에 흑연을 넣어 가열하는 방식으로 장왕사에서 개발했다. 다색의 색판의 돔보를 맞추기 위하여 핀바이스(쇠막대기의 양측에 도톰한 혹을 붙임)를 제작하고 핀바이스에 맞추어 색판 필름마다 홈크기만한 구멍을 뚫어 고정시키고 제도를 하고 교정을 보았다.
지리부도의 편집은 세밀도 1페이지짜리와 전도 2페이지짜리로 구분한다. 또 지형도와 산업도로도 구분하여 편집을 한다. 지형도는 8도를 전부 사용하고 산업도는 6도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형도 중에서 세계부분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전도 등 대륙도는 2페이지가 완전하여야 한다. 가운데 철사를 박는 호부장이나 등에 풀칠을 하는 떡제본은 사용 불가능하다. 가운데가 완전한 2페이지가 되려면 실양장이나 풀양장으로만 가능하다. 실양장은 가운데 부분에 바늘 구멍이 생겨서 부적당하므로 4p 풀양장으로만 제본이 가능하다. 홀수 페이지가 한 페이지짜리 그다음 짝수와 홀수가 두 페이지 짜리, 그다음 짝수가 1페이지 짜리 순서로 정해야 한다. 반드시 1, 2~3, 4, 5, 6~7, 8, 9, 10~11, 12, 13, 14~15의 순서여야 한다. 그러므로 지형도인 경우는 모두 8도이지만 산업도인 경우에는 6도이므로, 지형도와 산업도가 혼합되는 부분에서는 색도수에 매우 주의하여야 한다. 지리부도를 10만부 인쇄한다고 하면 6도인 페이지를 8도 인쇄하는 인쇄대수에 포함시키면 2도씩 20만 통의 불필요한 인쇄비와 인쇄 시간을 부담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4·6배판을 16p 전지로 인쇄할 것인지 8p 반지로 인쇄할 것인지도 고려하여 인쇄대수를 지정하여야 하고, 물론 터잡기(하리꼬미) 인쇄대수의 앞면, 뒷면 페이지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터잡기를 할 때 이용하는 아스테지 같은 베이스 필름의 온도와 습도 변화에 따른 신축과 필름(negative film과 positive film 둘 다)의 신축, 또 인쇄용지의 신축이 단면 8도씩 양면 16도를 인쇄하는 지리부도에게는 커다란 문제였다. 120아트를 사용하는 본문 용지는 판을 넣지 않고 한번 공인쇄(가라도시)를 하고 터잡기는 매번 인쇄판(찡크판) 구울 때마다 다시 하였다. 장마 시기에는 8도의 절반인 4도를 인쇄 후 5도째에 종이와 색도판의 핀트가 안 맞으면 인쇄기를 잡아놓고, 그 자리서 다시 터잡기를 하여 인쇄판을 구어 인쇄하기도 하였다. 새 색으로 바꿀 때마다 4색기나 2색기 앞에서 색교정을 보는 것은 당연하였다. 당시는 밤 12시에 통행금지가 있어 신학기가 다가오면 인쇄기 옆에서 밤을 새는 것이 일상이었다. 인쇄실 기계는 2부제나 3부제로 24시간 돌아가지만 터잡기팀은 2부제로 밤 10시면 퇴근하므로 새로 구운 인쇄판과 인쇄물이 핀트가 안 맞으면 직접 터잡기실로 올라가 색판 필름이 줄어들었으면 가위로 잘라서 늘리고 비틀어졌으면 바로잡아서 스카치테이프로 붙이는 작업을 하여 약칠한 찡크판을 구워서 인쇄기 앞에 대령하였다. 30년간 터잡기와 고바리(필름작업)를 하다보니 양판 수정은 물론 음판 수정도 그리고 인쇄용 찡크판에서 불필요한 점(요고레)은 수정할 수 있었고, 이일수 사장의 평화당이나 광명인쇄의 옵셋 인쇄부와 사진부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지리부도나 사회과부도, 역사부도의 색판의 망점 교정을 보고 수정을 요구하면 글자 교정과 달리 한 번에 원하는 것처럼 수정되기가 힘들다. 필름이 농도가 너무 엷으면 음판에서 망점을 키우고, 농도가 너무 진해서 줄이려면 양판에서 망점을 약하게 줄이려고 당하이보와 적혈염(red prussiate of potash)을 항시 애용했다.
지도 편집과 제작에서 글자는 해먹으로 석판에다 직접 쓰다가 트레이싱 페이퍼에다 마루펜으로 해안선을 그리고 글자도 쓰다가, 글자를 따로 써서 습식방식인 습판으로 만들어 선판에 붙이다가, 따로 쓴 글자판과 선판을 촬영하여 음판을 만들어 2중밀착을 하다가, 선판의 양판에 건식방식인 스트리핑 필름 글자를 붙이게 되었다. 1970년대는 일본의 데이고꾸쇼윈 출판사와 니노미아 출판사의 지리부도가 제도부분과 채색부분에서 수준이 높았다.
지도책의 8색 인쇄에서 가장 골치 아프던 종이와 필름의 신축 문제는 1990년 이후 필름 기술이 발달하여 신축 문제는 거의 발생하지 않고 8p나 16p를 앞뒤 양면(오모테우라)을 터잡기하여 통필름으로도 뜰 수 있게 되었다. 2000년대에는 디지털 기술로 CTF에서 CTP까지 발전하였다.
1................지형 4ps(cf.#165- ppt)
1970년대까지 도서출판 장왕사와 평화당인쇄, 광명인쇄등
한국 출판계와 인쇄업계에서는 일본의 토요잉크에서 매년 발행하는 색견본집이 지리부도 등 다색칼라 인쇄물 인쇄할 때 인쇄색의 기준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미국의 매킨토시 컴퓨터가 디자인계에 도입되고
미국 미술대학에 유학한 디자이너가 귀국하면서부터
팬톤 색견본이 보급되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국과 일본인의 색감과는 약간 거리가 있어서
처음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특히 빨강색의 차이는 대단히 심했다. ===== =====
미국 색채 전문 회사인 '팬톤(PANTONE)' 색채연구소는 1963년에 설립됐다.
창립자인 로렌스 허버트는 보는 사람에 따라 색상의 스펙트럼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표준 색상' 찾기에 골몰했다.
1964년 디자인 시장을 위한 팬톤 색 일람표(PANTONE Color Specifier)를 개발했다.
2310여가지 색상을 채도와 명도별로 나열해 정리했다.
이는 전세계 디자이너, 미술가, 제조업자들이 사용하는 색채 언어의 시초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