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첫 단추를 잘 지키신 손원일 제독--치과임상7월호
- 화동
- 2015.06.2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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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첫 단추를 잘 지키신 손원일 제독----------------------김평일
1949년 6월,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전투함조차 전혀 없는 기본 해군무장을 개선하고자 자신으로부터 말단 수병에 이르기까지 월급을 10%씩 공제해 전투용 함정을 구입하자는 애국운동을 벌였다. 당시 해군 장병들과 해군 군인 가족들의 나라 사랑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이 성금을 더 내기 위해 고철을 수집해 팔기도 하고, 군인 가족들은 알바까지 정성을 모아 15,000달러를 모금했다. 손원일 제독은 이렇게 모금한 돈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하며, 전투함 한 척을 구입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고에서 45,000달러를 지원하니 총6만 달러가 마련되었다. --이에 우리 해군은 미국 롱아일랜드의 킹스포인트에 있는 해양대학교의 실습선, ‘화이트헤드 소위호’를 구입하고 하와이 진주만에서 3인치 포, 괌에서 포탄 100발을 구입, 배이름은 ‘화이트헤드 소위 호’에서 백두를 따서 백두산호(701함)라 명명 하니 대한민국 해군의 첫 현대식 전투함 이었다.
대한해협해전은 701함(백두산호-당시 함장 최용남 중령)의 첫 전투였다. 6.25전쟁 개전 당일 해군 지휘부는 북의 동해안과 부산에 대한을 기습에 대응하라는 작전명령에 내려 701함은 진해를 떠나 울산으로 항해 하던 중 일몰 직후인 오후 8시 12분, 갑판 사관 최영섭 소위(현85세)는 약 7㎞ 되는 수평선상에서 검은 연기를 목격했다. 함장은 전투배치 명령을 하달했고, 괴선박에게 국기 게양, 국적 제시, 출항지, 출항시간, 목적항을 밝히라고 국제발광신호로 요구했다. 그러나 30분에 걸쳐 계속된 요구에도 괴선박은 응답이 없었다.
이 해전은 유엔군이 참전하기 전의 우리군 독자 작전으로 6.25전면전 19시간만인 6월26일 0시 30분 첫 함포부터 교환으로부터 1시간 반 동안의 전투였다. 막대한 기뢰장비 등에 600여 병력으로 무장한 북 인민 해군 수송함과 교전으로 적함을 폭파침몰 시킨 대승이었으나 전사 2분 부상 2분의 안타까움도 있었다.
무장 후 돈이 아까워 대포알 대신 통나무 토막으로 포탄 장전 연습만 계속했다는 701함은 35발 발사로 적함을 침몰시켰다. 아껴 남긴 65발 우리 3인치 포는 마지막에 격발 장치 고장으로 적함의 최후 발악에 무대응이었고 여기서 전사 2 부상 2이 나온 것이다. 모든 승조원이 죽음을 준비하여 수의 대신 세탁한 새 내복을 알아 입고 저승에서 만날 각오로 마지막 이별주를 냉수로 건배 했다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대한 해협 해전의 승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러시아 붕괴 후 공개된 구소련 외교 문서 중 김일성의 한글 서명이 있는 전쟁물자 청구 목록 문서 사진에 수천발의 기뢰가 포함 되어 있는 문서의 사진이 6.25 65주년 특집 공중파 방송에 보도 되었었다.
스탈린의 한반도를 14번째 주 까레이스끼 주로 만들기 위한 첫 단추 겸 안전 단추는 부산거점이다. 수천발의 기뢰를 부산 앞바다 매설에 성공한다면 유엔군은 우리를 구할 수 없었다. 남침의 피해로 고통 받은 대한민국은 우선 식량으로부터 미국에 의존했었다. 어마어마한 전쟁물자는 말 할 것도 없고, 참전 16개국의 병력과 의료진이 속속 부산으로 입항하여 대한민국을 살렸는데, 이 부산 앞바다가 기뢰밭이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낙동강 전선에서 끝났을 것이다.
손원일제독의 선견지명이 6.25전쟁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셨는지 존경의 마음을 바친다. 우리 해군은 모토인 충무공의 후예로써 스탈린의 더러운 손가락으로부터 우리 첫 단추를 잘 지켰다. 삯품으로 푼돈을 모아 100발의 대포알을 사들이게 한 군인가족들의 노력이 눈물 겹다. 충무공의 후예들은 수의로 새 내복을 갈아입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간다는 각오로 냉수 이별주를 마신 승조원들 --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키신 충무공의 명량 대첩의 정신이 그대로 전승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