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병인양요와 무역개방 압력

 129_병인양요와무역개방압력---7 2014/3/13


129. 병인양요와 무역개방 압력


도민준은 400년 전에 딴 별에서 왔지만, 1년 반 동안 홀아비로 지내던 뚱보강사를 구해준 천사는 16년 전에 나타났다. 지난 주말에 천사 마눌님과 함께 양헌수 장군과 어재연 장군이 활약한 강화도를 찾았다. 자유무역협정이니 뭐니 하면서 우리의 농업, 수산업, 축산업을 위협하는 이 시기에 강화도와 대동강에서 우리나라를 지켜낸 용감한 선조들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는 대원군 시절에 프랑스와 미국이 군함을 타고 와서 불평등 무역개방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발생한 전쟁이다. 프랑스에게 미국정부가 1867년 3월, 미국은 셔먼호(제너럴 셔먼호)사건, 프랑스는 병인 천주교박해로 인해 피해를 보았으니 미국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조선을 공격하고자 제의하였을 때, 프랑스 정부는 우리는 이미 조선 원정을 통해 응징 보복을 했기 때문에 새삼스러이 공동 원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미국 제의를 거절한 예가 있다. 요즘 야스쿠니 신사의 전쟁범죄자들에게 참배하고, 위안부 문제도 부인하고, 독도도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아베 총리를 보면 혹시 어떤 나라에서 공동으로 우리나라를 원정하자는 제의를 받았기에 이렇게 날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1866년 프랑스는 조선과 수교 관계가 없다는 점과 조선은 정치적 독립국가라는 점 등을 들어 프랑스정부의 직접 개입 없이 현지 사령관인 로즈 제독의 주재 하에 조선을 군사력으로 응징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1866년 9월 로즈의 제1차 원정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본격적인 전쟁준비용 사전 원정이었다. 로즈는 군함 3척을 이끌고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 양화진 · 서강까지 올라와서 세밀한 지세 정찰과 수로를 탐사하여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10월 5일에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제2차 조선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 함재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 향도 및 수로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 · 최인서 · 심순녀 등을 대동하였다.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우리는 자비로운 프랑스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하고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는 강경한 응징 보복의지를 보였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화력면에서 절대 열세였지만 뛰어난 전략으로 덕포에서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을 탈환하고, 올리비에 대령이 앞장 선 근대식 병기로 장비한 프랑스군을 무찔렀다. 정족산성 패전을 계기로 로즈함대는 원정을 포기하고 강화도를 철수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직지심체요절과 휘경원 원소도감의궤를 포함한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우리의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로즈의 조선 원정은 11월 21일 제2차 원정이 끝날 때까지 2개월에 걸친 장기 침략이었다. 그러나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조선에 대한 응징적 보복이 성공하였다고 프랑스 정부에게 보고하였다.


1866년 8월 미국 상선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에서 난동을 부리다 불타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통상 요구라는 것은 불평등조약에 응하지 않으면 무력을 앞세워 제압하는 방식이었으므로 평양 대동강 부근에서 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한 것은 명백한 강압적 협박이었다. 말로만 상선이지 셔먼호는 대포 2문을 보유하고 있었고 승무원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항해도중 우리정부의 문정관을 접할 때마다 군함이 아니라고 변명하였다는 사실은 중무장을 갖추고 있는 군함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미국과 프랑스가 불공정무역을 강요하는 ‘군함외교’를 시도하여 조선을 식민지적 상품시장으로 만들려고 할 때, 조선은 고종이 즉위하여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던 시절.


셔먼호는 백령도를 거쳐 8월 21일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경내에 들어왔다. 미국 셔먼호 측은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해 문제를 삼으면서 프랑스 함대가 오고 있다고 협박하면서 통상을 압박하였고, 심지어 평양감사가 교역을 거부할 경우에는 서울로 쳐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평양감사는 조선은 천주교와 야소교(기독교)가 모두 국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고, 대외무역도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밝히며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대신 요청하는 백미 1석, 소고기 50근, 닭 25마리, 계란 50개, 장작 20묶음을 지급하고 중앙정부의 지령이 있을 때까지 현장에서 대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셔먼호는 조선 측의 요구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수심측량을 하면서 대동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 만경대 한사정에까지 도달하였다. 이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제지하던 순영 중군 이현익과 부하 박치영 · 유순원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신태정이 셔먼호에 접근하여 이현익 등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석방조건으로 쌀 1,000석과 금 · 은 · 인삼 등을 요구하는 날강도적인 행각을 보였다.


이에 평양성 내의 관민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에서는 조총과 대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대었다. 흥분한 관민들이 돌팔매 · 활 · 소총으로 맞서 대항하자, 셔먼호 측은 뱃머리를 돌려 하류 양각도까지 후퇴하였다. 때마침 대동강 수위가 내려가서 군함 셔먼호는 양각도에 선체가 걸려 항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셔먼호 승무원들은 강도 · 약탈 · 총포격 등의 침략적인 행동을 자행하여 우리측 관민 사망 7명, 부상 5명이 발생하는 유혈사건이 발생하였다. 박규수는 백낙연 등과 협조하여 총공격을 가하여 셔먼호를 소각시켜버리고, 2문의 대포를 노획했다.


미국 군함이 조선의 영해에 허락도 받지 않고 대동강까지 들어와 불법으로 측량을 한 행위는 명백한 주권침해였고, 자신들은 순수한 물물거래를 위해 왔다고 주장하였지만 처음부터 프랑스인 신부 학살사건을 추궁하였고, 조선의 장수를 납치하고 식량을 약탈하는 등 무력충돌을 불사하였었지만, 미국은 이 대동강에서의 패전을 핑계 삼아 1871년에 미국 함대를 시켜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 신미양요이다.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일본 나가사키를 출발해 5월 19일 남양만에 도착, 6월 10일에는 강화도 초지진을 점령하고 덕진진과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광성진 수비군 거의 전원이 전사했다. 그러나 미군도 6월 11일 광성진 전투에서 피해를 크게 입고, 결국 7월 3일 미군은 우리 해역에서 후퇴했다.


미국 로(F. Law) 공사는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와 함께 기함 콜로라도호 등 5척의 군함에 병력 1,230명을 이끌고 1871년 5월 남양 앞바다에 와서 조선정부에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미국은 즉시 공격을 감행하여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군은 대포 등 중무기로 무장을 한 반면 어재연 장군이 이끌던 조선군은 변변치 않은 소총으로 대항했다. 조선군 대부분은 호랑이를 사냥하던 포수 출신들로서 용맹함이 뛰어났다. 강화수로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인 광성진에서 조선군은 총과 칼이 떨어지고 나서도 흙과 돌로 맞서는 등 굽히지 않은 자랑스러운 전투를 펼쳤으나 326명의 조선군은 결국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이어 고종 12년(1875)에는 윤요호사건이 발생한다. 윤요호사건은 일본이 미국에게 22년 전(1875년에서)에 당한 군함외교를 흉내 내어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 사건이다. 일본 군함 윤요호가 1875년 9월에 조선해안을 탐측하고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였다. 이때 해안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 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한 후 조선 수군을 공격하여 인적, 물질적인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의도적으로 일으킨 '포함외교'의 한 형태이며, 일본 제국주의가 대륙을 침략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강화군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당시 선조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어씨종친회와 함께 쌍문비각(어재연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에서 해마다 광성제를 지내고 있다. 광성제 봉행 후 '광성보 전투 재현' 행사도 벌이고 있다. 강화군 덕성리에 있는 광성보 구역에는 1871년(고종 8) 광성진에서 벌어졌던 미해군 육전대와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인 신미순의총이 있다. 당시 군사를 이끌던 어재연 장군과 동생 재순, 군관, 사졸 등 53명의 전사자 중 어재연 형제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나머지 51명의 시신은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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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천주교회사』,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 분도출판사, 1980

Basic 중학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6.11, (주)신원문화사

『근대한미교섭사(近代韓美交涉史)』, 김원모, 홍성사, 1979

「로즈함대의 내침과 양헌수의 항전 1866」, 김원모, 『동양학(東洋學)』 13,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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