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7__ 세계 최초 신문 ‘기별’과 ‘조보’
- 뚱보강사
- 2026.03.2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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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__ 세계 최초 신문 ‘기별’과 ‘조보’
세계 최초 신문은 ‘기별’... ‘기별(奇別)’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부터 시작된, 관에서 발행한 관보(官報)로, 조정 소식을 전하는 ‘조보(朝報)’이다. -[부안독립신문] 2021년 10월 1일. [마실정담] 기별(寄別)-
조선 태종 13년, 기별 발행의 배경은 (1) 조선 초기 행정 체계 정비 필요,
(2) 중앙 정책을 전국에 신속 전달, (3) 태종의 중앙집권 강화 정책,
(4) 명나라 관보 제도의 영향, (5) 국가 정보 통신 체계 구축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별은 조선의 초기 “정부 뉴스 시스템”이었습니다.
① 조선 ‘기별(奇別)’의 실제 내용 사례
조선 태종 13년(1413) 무렵, 등장한 ‘기별(奇別)’은 중앙 조정의 소식을 지방 관청에 알리는 행정 정보 통신문이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은,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이나 관청 문서 속에서 그 내용이 간접적으로 확인됩니다. 대표적인 내용 유형을 실제 기록 형태에 따라 정리합니다.
1. 인사 발령 전달
예시 형태: “○○를 ○도 관찰사로 임명하고, ○○를 병마절도사로 삼는다.”
즉, 중앙에서 결정된 관직 임명·파직 소식을 지방에 알렸습니다.
2. 왕명·법령 공지
예시: “호패를 반드시 차게 하라. 이를 어기면 관청에서 엄히 다스릴 것이다.” 이는 호패법·조세 정책·군역 제도 같은 국가 정책을 전달하는 기능이었습니다.
3. 사건·범죄 보고 전달
예시: “경상도 ○○현에서 도적이 일어났으니 군사를 동원하여 진압하라.”
이런 내용은 지방 관청에 치안 상황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4. 재해 상황 보고
예시: “황해도 지역에 큰 가뭄이 있으니, 구휼미를 풀도록 하라.” 즉, 재난 대응 행정에도 활용되었습니다.
5. 외교·군사 정보
예시: “왜구가 남해 연안에 출몰하였으니 수군을 강화하라.” 당시 국가 안보 관련 소식도 포함되었습니다.
‘기별’의 실제 내용은 인사 발령, 왕명·법령, 사건·치안, 재난, 외교·군사 등 정부의 핵심 행정 뉴스였습니다.
② 조선 시대 최초의 신문
조보 · 기별 · 기별지 차이: 조선에는 오늘날 신문과 비슷한 정보 전달 문서가 여러 종류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별, 조보, 기별지가 있습니다.
구분
기별(奇別)
조보(朝報)
기별지
등장 시기
태종13년(1413)
조선 초기부터
조선 후기
성격
행정 통신문
공식 관보
민간 정보지
발행 주체
중앙 관청
승정원
민간 필사 업자
내용
정책·사건·인사
왕명·정책·인사
조정 소식
독자
지방 관청
중앙 관료
일반 양반
1. 조보(朝報) — 조선의 공식 관보
특징: 왕명과 인사 발표 기록, 승정원에서 작성, 매일 작성되는 경우도 있음
내용 예: “○○를 병조판서로 임명”, “오늘 경연에서 논의된 사항”
현대 기준 = 정부 관보 + 정치 뉴스
2. 기별(奇別) — 행정 통신 뉴스
기별은 조보보다 실무적 정보 전달이 많았습니다.
예: 지방 사건 보고. 재난 상황, 군사 동향
현대 기준 = 정부 내부 통신
3. 기별지 — 조선의 ‘민간 신문’
조선 후기에는 조보 내용을 민간 필사꾼들이 베껴 판매했는데, 이것이 기별지입니다.
특징: 필사본으로 제작, 양반층에 판매, 조정 정치 소식 포함
사실상 조선 최초의 민간 신문입니다.
조선 정보 전달 3단계
1. 기별 → 정부 내부 행정 뉴스
2. 조보 → 공식 정부 관보
3. 기별지 → 민간에 유통된 신문
기별 → 조보 → 기별지 흐름 속에서, 조선의 초기 언론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세종 시대의 언론 통제 정책
조선의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재위 1418~1450) 시대에도, 사실 언론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국가 질서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 유통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정책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특히, 조보(朝報)·기별지·사초 기록과 관련된 정책이 핵심입니다.
1. 조보(朝報) 유출 금지 정책
조선의 공식 정치 뉴스는 ‘조보’였습니다.
조보의 특징: 왕명, 인사 발령, 조정 논의 내용
이 기록은 원래 관료만 열람할 수 있는 문서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필사꾼들이 조보를 몰래 베껴 민간에 판매했습니다.
이것이 기별지입니다.
문제점: 정치 소문 확산, 권력 갈등 노출, 왕실 비밀 유출.
그래서, 세종은 조보의 민간 유출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실록 기록 요지
“조정의 일을 함부로 외부에 퍼뜨리는 것은 나라의 기강을 해친다.”
2. 조정 비밀 누설 처벌
세종은 대신들에게 국정 토론 내용 유출 금지를 명령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경연 토론, 군사 전략, 외교 문제 등은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되는 국가 기밀로 규정했습니다.
이를 어기면, 파직, 유배, 형벌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3. 사초(史草) 열람 금지 원칙
조선왕조실록의 초안인 ‘사초(史草)’도 엄격히 통제되었습니다.
특징: 사관이 매일 기록, 왕조 역사 기록의 기초 자료
세종은 다음 원칙을 유지했습니다.
왕조차도 사초를 열람하지 않는다
이,유: 권력자가 역사 기록을 수정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언론 통제이면서, 동시에 기록 독립성 보호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4. 유언비어·정치 소문 단속
세종 시대에도 ‘정치 소문(유언비어)’이 사회 문제였습니다.
대표 사례: 왕위 계승 소문, 대신 간 권력 싸움 이야기, 외교 문제 소문.
세종은 이런 소문이 돌면 수사 명령, 유포자 처벌을 지시했습니다.
5. 외교·군사 정보 보도 금지
당시 조선은 여진 문제, 왜구 침입, 명나라 외교 같은 민감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사 동향, 외교 협상 등은 민간에 공개하지 않는 원칙이었습니다.
세종 시대의 언론 통제 원칙은 “기록은 자유롭게 하되, 유통은 국가가 통제한다.” 였습니다.
조선에서 언론 자유가 가장 높았던 시기
한국 언론사 연구자들은 대체로 조선에서 언론 자유가 가장 높았던 시기를 ‘세종 시대(15세기 전반)’로 평가합니다. 물론, 오늘날의 언론 자유와 같은 개념은 아니었지만, 왕에게 직접 비판하고, 정책을 공개적으로 논쟁할 수 있는, 제도적 공간이 비교적 넓었던 시기였습니다.
1. 왕에게 직접 비판할 수 있었던 ‘간언 제도’
조선에는 왕을 비판하는 공식 기관이 있었습니다.
대표 기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이 기관의 관료들은 왕에게 다음과 같은 일을 했습니다. 정책 비판, 왕의 행동 지적, 대신 탄핵.
예를 들어, “전하의 이번 명령은 백성에게 부담이 됩니다.” 같은 발언이 공식 기록에 남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기록되었습니다.
2. 집현전 학자들의 정책 토론 문화
세종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학자 중심 정책 토론입니다.
대표 기관: 집현전. 집현전 학자들은 왕과 토론, 정책 제안, 법률 비판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예를 들면, 세금 정책 논쟁, 군사 정책 논쟁, 과학기술 정책 토론이 과정에서 왕과 신하가 공개적으로 논쟁하기도 했습니다.
3. 왕이 비판을 장려한 정치 문화
세종은 대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의 잘못을 숨기지 말고, 반드시 말하라.” 이 때문에 왕의 정책 반대 의견, 왕의 결정 비판이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세종은 신하의 반대 의견을 받아 정책을 수정한 사례도 있습니다.
4. 역사 기록의 독립성 보장
조선은 세계적으로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관이 왕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왕도 기록을 볼 수 없음, 수정 불가.
이 기록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이 제도 덕분에 왕의 실수, 정치 갈등, 정책 실패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높은 기록의 자유였습니다.
5. 왜 세종 시대 이후 언론 자유가 줄었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언론 자유는 점차 약해졌습니다.
대표 사례: 연산군 → 사관 탄압, 언론기관 폐지
사화 발생 → 정치 비판 위험 증가
그래서, 학자들은 “조선의 언론 자유는 세종 시대가 정점”이라고 평가합니다.
조선판 ‘가짜뉴스 사건’
조선 시대에도 오늘날로 치면 “가짜뉴스(유언비어·허위 소문)”에 해당하는 사건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를 요언(妖言), 유언비어, 참설(讖說)이라고 불렀습니다. 대부분 왕위 계승, 정치 권력, 반란과 관련된 소문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왕이 바뀐다”는 예언 소문 사건
대표적인 가짜뉴스 유형은 “왕이 곧 바뀐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특히 연산군 시기에는 이런 소문이 크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대표 사례: “왕의 운이 다했다.” “새 임금이 곧 나온다.”
이런 말이 퍼지면, 왕권이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에, 연산군은 유언비어 유포자를 엄하게 처벌했습니다.
결과 → 많은 사람이 국문(조사)과 형벌을 받았습니다.
2. “새 왕조가 생긴다”는 참설 사건
조선 시대에는 ‘참설(讖說)’이라는 예언이 정치 소문으로 자주 퍼졌습니다.
예: “○○ 성씨가 왕이 된다.” “새 나라가 생긴다.”
대표 사건: “정씨 왕조가 나온다”는 소문은 “특정 지역에서 새 왕이 등장한다는 예언”... 이런 이야기는 반란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국가가 강하게 단속했습니다.
3. 세종 시대 ‘궁궐 괴이 소문 사건’
세종 시대에도 소문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궁궐에 귀신이 나타났다.”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 왕조가 곧 망한다는 해석, 정치 불안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종은 소문 출처 조사와 유언비어 단속을 명령했습니다.
4. 임진왜란 직전 ‘일본 침략설’ 논쟁
1590년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사이에서도, 정보 논쟁이 있었습니다.
대표 인물: 김성일, 황윤길. 두 사람의 보고가 달랐습니다.
황윤길 → 일본이 침략 준비 중
김성일 → 침략 가능성 낮음
당시 조정에서는, 침략설을 과장된 소문으로 보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습니다.
💡 조선 시대 법전 ‘경국대전’에도, 유언비어 유포 처벌 규정이 있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신문은 무엇인가?” 논쟁
-(조보 vs 기별)-
“조선 최초의 신문은 무엇인가?” — 조보 vs 기별 논쟁
한국 언론사에서는 오래된 논쟁이 하나 있습니다. “조선 최초의 신문은 무엇인가?” 대표 후보는 두 가지입니다. ‘조보’와 ‘기별’...
1. 조보(朝報) — 가장 널리 인정되는 ‘조선 최초의 신문’
많은 언론사 연구자들은 조보를 조선 최초의 신문으로 봅니다.
특징: 조정의 공식 정치 뉴스. 왕명, 인사, 정책 전달.
중앙 관료에게 배포. 거의 매일 작성. 작성 기관→ 승정원
내용 예: “○○를 병조판서로 임명한다”, “오늘 경연에서 논의된 사항”,
“지방에서 올라온 보고”.
왜 ‘신문’으로 보는가?
정기적으로 발행, 정치 뉴스 중심, 여러 사람에게 배포.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조보를 “한국 최초의 관보형 신문”이라고 부릅니다.
2. 기별(奇別) — 더 이른 시기의 ‘뉴스 통신’
다른 학자들은 기별을 더 초기 형태의 신문으로 보기도 합니다.
기별 등장 시기 → 태종 13년(1413)
특징: 중앙 정부의 행정 소식 전달. 지방 관청으로 전달.
사건·재난·군사 정보 포함.
내용: 인사 발령, 지방 사건, 군사 상황, 왕명 전달
신문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
일반 독자가 없음, 행정 공문 성격이 강함, 정기 발행 체계 불명확.
그래서 일부 학자는 “행정 통신문”으로 분류합니다.
3. 조보가 민간으로 퍼지며 ‘신문’이 됨
조보는 원래 관료용 문서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필사꾼들이 조보를 베껴 양반들에게 판매. 이 문서를 기별지라고 불렀습니다. 이때부터 조보는 사실상 ➡ 민간 정치 뉴스 역할을 하게 됩니다.
4. 학계의 일반적 결론
대체로 한국 언론사 교과서에서는 다음처럼 정리합니다.
기별 = 초기 행정 뉴스
조보 = 최초의 신문
기별지 = 최초의 민간 신문
즉 흐름은 기별 → 조보 → 기별지로 발전했다고 봅니다.
5. 세계 언론사와 비교
참고로 세계 최초 신문은 보통 다음을 꼽습니다.
Relation aller Fürnemmen und gedenckwürdigen Historien (1605 독일)
조선의 조보는 ➡ 최소 15세기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른 뉴스 시스템으로 평가됩니다.
한편, “세계 최초의 신문 논쟁 TOP 5”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조선 조보, 독일 1605년 신문, 중국 邸報(저보), 로마 Acta Diurna,
일본 가와라반
기별(寄別)
디지털 크리에이터 곡산(曲山) 님이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너무 적게 또는 부족하게 먹었을 때 주로 쓴다. 기실은 '조만간에 기별이 간다'고 말했는데, 소식이 오지 않았을 때, 조만간의 약자만 써서 '간에 기별이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기별은 조보(朝報) 또는 난보(爛報), 조지(朝紙)라고 불렸던, 세계최초의 ‘일간지’다. 지금으로 치면, 신문으로 아침 조(朝)를 쓴 것을 보면, 아침에 배포된 조간신문과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처음 기록은 1413년 조선 태종 13년부터 보이고, 1892년 2월 고종 때 폐간되었다. 태종 때는 분발(分發)이 기록되어 있고, 중종 15년 3월 6일자에 제대로 기별이 보인다.
(참고) 경복궁 흥례문 기별청: 홍례문 안 서쪽 행각에 있다. 기별청은 원래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承政院)에서 반포하는 ‘기별(奇別)’을 작성하던 곳이다. 기별청이 이 곳에 해는 명확하지 않다. 1892(고종 29)년에 최초의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경복궁을 중건한 이후에 설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현재까지 세계최초의 신문은 독일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609년 렐라치온이라고 불리는 기록지가 세계최초의 신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경북 영천 용화사의 주지인 지봉스님이 어느 작은 경매사이트에서 구입한 문건 하나가, 세계 언론의 역사를 바꾸었다.
이 문건에는 날씨를 비롯, 가축의 전염병, 양반들의 비리, 정치인이 여색을 탐했다는 기록, 임금만이 볼 수 있었던 탄핵상소문을 속보로 배보시켰다는 등 여러 형태의 스캔들을 알린, 이른바 세상의 이모저모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의 렐라치온이 일주일에 한번 정도 발행되었던 주간지임에 비해, 기별은 일간지였다.
지금도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 당시도 시간에 많이 쫓긴 듯하다. 분발(分發)은 나누어 쓴 글이라는 뜻인데, 현재는 '서둘러 힘을 내자'는 뜻으로 주로 쓴다. 즉 서둘러 독촉함이 분발이 되었다. 우리가 무의식 속에 흔히 쓰는 단어는, 예전에 어떤 사고나 특별한 기억 또는 사건, 기록 등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언어는 그렇게 발전하면서 다듬어지고, 앞으로도 계속 다듬어지면서 변형된다. 세계최초의 신문(언론지)이라고 알고 있었던, 독일의 렐라치온보다 최소 30년 이상 앞서 있었던 우리나라의 민간언론지 기별.
기록의 다양성도 렐라치온보다 더 뛰어났으며, 세상의 비리를 파헤치고 시간에 쫓기면서도 진실을 알리려했던 우리조상들의 슬기와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다. 가장 진실에 가깝게 살려고 노력한 흔적이오, 뛰어남이다.
헌데, 지금은 어떠한가? 조상들의 뛰어남을 본받지는 못할망정, 언론인들이 '기레기'소리나 듣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참고) 기레기 의미: 기레기는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로, 허위·과장·자극 중심의 저질 보도 등으로 저널리즘 수준이 떨어진 기자나 그 현상을 비하적으로 지칭하는 표현입니다(위키백과 한국어).
다만 ‘기레기’는 모욕적 표현으로 분류되어, 사용 맥락에 따라 모욕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법원 판단도 확인됩니다. 합성어로 ‘기자’의 직업적 역할을 무시하고, 자극·과장·부풀림 등으로 신뢰를 떨어뜨리는 보도를 비판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기사 제목을 자극적으로 바꾸거나(클릭베이트), 이미 보도된 내용을 짜깁기·재탕, 사실 왜곡, 책임감 부족(정정·사과 소극) 등이 특징으로 언급됩니다.
우리 언론도 이제는 깨어나 진실을 알리는데 분발했으면 좋겠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조상님들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말이다. 진실을 알리려 노력하고, 자신이 쓴 글에 책임을 졌던, 조상님들이 지하에서 통탄하지 않도록...
기레기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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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부안독립신문] 2021년 10월 1일, [마실정담] 기별(寄別).
[참고] 챗지피티, 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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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디지털 크리에이터 曲山, 팔로워 395명 • 팔로잉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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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경복궁 흥례문 기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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