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4__ 운동권. 좌파 빨갱이와 "매카시즘". 간첩 히스. 조선공산당

=

754__운동권- 좌파 빨갱이와 매카시즘- 조선공산당 기념행사-간첩 히스 --10ok

뚱보강사 이기성

 

 

       754__ 운동권. 좌파 빨갱이와 "매카시즘". 간첩 히스. 조선공산당

 

 

친노좌파가 호남을 노예화하여 대한민국의 질곡으로 작용하는 현상을 비판한 정치 담론집 [호남과 친노] 저자인 주동식 인터넷신문 [3의길] 전 편집인이 운동권, 좌파, <<강철서신>>NL주사파, <<깃발>>은 제헌의회(CA)’에 대해 글을 올려주었다. 나는 좌파일 때도 주사파와는 정반대 노선이었다. 주사파가 등장해 학생운동을 장악하고 있을 때 나는 막 공장에 들어가 열심히 적응하는 상황이었다. 강철서신(NL주사파)이나 북한 방송 청취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풍문으로 들었소' 수준으로만 알고 있었다. (뚱보강사 칼럼 ‘#581__ 자유민주주의와 국민, 주사파 정리. 김경수와 드루킹‘#278__ 문맹과 문해, 가짜 진보에서 주사파에 대해 조금 알아본 바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 후배가 연락을 해왔다. 학교가 주사파 문제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주사파가 학교 운동권을 급속히 장악해가고 있다는 것. 내 후배들은 판단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상태라고 했다.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후배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를 찾아온 후배에게 역으로 부탁했다. 이 문제와 관련된 문건을 전부 가져다 달라고. 얼마 뒤 후배가 문건을 한 무더기 가져왔다.

 

--- 문건은 <<강철서신>>과 그 반대편 입장의 <<깃발>> 등이었다... <<강철서신>>NL주사파, <<깃발>>은 제헌의회(CA) 입장이었다. 참고로 나는 주사파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북한에 대해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직접 도서관의 자료를 뒤지며 김일성의 정체를 찾아보기도 했고, 그 결과 '김일성 가짜설이야말로 사기'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랬던 내가 후배가 가져온 문건을 정독하면서 입장이 미묘하게 변했다. 일단 강철서신은 대중성이 강했다. 쉽게 읽혔고 적절한 호소력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 찜찜한 게 남았다. 그건 한마디로 말해 과학적 엄밀성의 부재였다.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비록 실패했다 해도 그 기본 스탠스는 이 세계를 과학적 합리성에 근거해 해석하고 그 원리에 근거해 이 세계를 바꿔보겠다는 태도이다. 비록 그 해석이나 변화 방법론이 결과적으로 틀렸다 해도 그 과학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태도는 남아있다. 그래서 ML주의는 엄격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쉽다. 강철서신의 기본 입장은 그런 과학성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다. 과학적 합리성이란 인간의 주관을 거부한다. 과학의 법칙은 인간의 관념과 완전히 별개의 원리로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철서신은 제목과 달리 그런 강철의 원리, 과학성에 대한 거부가 기본 명제였다.

 

그러니 과학성에 대해서 이질감과 거부감을 느끼는 후진적 학생 운동 대중에게 먹혀들기 쉽다고 봤다. 한마디로 과학적 법칙의 엄격성과 강제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ML주의의 과학성과 철학을 이해하기 어려운 자들에게 통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깃발'은 서술도 쉽지 않고 딱딱한 내용이었지만 나는 적어도 과학성을 추구하는 태도에서는 강철서신에 비해 원칙적이라고 봤다. 그래서 후배를 만나 '강철서신은 적어도 과학은 아니다. 그냥 대중 선동에 최적화된 문건일 뿐'이라는 식으로 정리했다.

 

[참고]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파): [블로그] egeyouri, 1987년 서울대는 주사파가 석권했다가 88년부터 비주사가 성장하여 88~93년 정도까지 주사+비주사 연합이 진행되다가 94년 이후에는 비주사 NL이 독자화된다. 94년 총학생회(회장 강병원, 현 민주당 국회의원)과 이후 진보학생연합(이탄희.박주민) 등이 이 계열이다. 서울대에서 비주사 NL이 득세하면서 88년을 계기로 학생운동 주도권이 88~89년 고대, 91.93년 한양대, 96~97년 전남대가 중심에 선다. 주사파의 대중적 명칭은 자민통이었다. 86년 주사파가 도입된 후 한민전 방송 문건은 거의 공개적으로 유포됐다. 전대협 조통위는 수령님 찬양노래를 불렀다. 주사파의 사상 레벨이 중층화되면서, 정청래나 김경수처럼 거대한 주사파 네트워크 일원이었으면서 자신은 주사파가 아니라고 주장들 한다.

 

[참고] 운동권 PD1980년대 중반 성립되어 NL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운동권을 양분하던 두 조류 중의 하나이다. 민중 민주주의 혁명(People's Democracy Revolution, PDR)의 주장을 차용하며 형성되었기에 PD(민중민주파)로 불리었다. 민족 문제를 중시해 북한과 힘을 합쳐 미 제국주의를 축출할 것을 핵심 과제로 보았던 NL과는 달리,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를 계급 문제로 보고 노동운동과 연계해 자본주의를 극복할 것을 주장했다. 1980년대까지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추종했으나, 소련 해체 이후에는 다양한 사회주의 흐름으로 이론과 실천 방식이 분화됐다. 심지어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한 사람들, 이론 연구에 집중한 사람들, 다양한 신좌파 이론들을 받아들인 사람들, 심지어는 아예 보수로 전향한 경우도 있다. 현재는 정의당 등의 진보정당이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단체, 다양한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나무위키).

 

이후 내 출신 학교 운동권은 둘로 쪼개졌다. 원래부터 갈등이 있었는데 NL주사파의 등장 이후로는 좀더 첨예화된 노선 투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원래부터 좀 멍청하고 타협적이던 애들이 싸그리 NL주사파로 정리했다고 느꼈다. 후배들도 그랬지만 나는 CA(제헌의회) 그룹을 거쳐 노해동(노동자해방투쟁동맹) 그리고 사노맹을 지지했다. '깃발'을 작성했던 ND노선이었다. 별로 대단한 활동을 한 것은 없다. 원래 삐딱했던 성향이라 그런지 이 조직과도 갈등이 있었다. ND그룹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이태복 선배가 창간한 주간 노동자신문 경험을 끝으로 나는 운동권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하지만 적어도 운동권 활동을 하던 시기도 그렇고 지금도 NL주체사상은 과학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쉽게 팔아먹으려는 보급형 버전이랄까, 그렇게 판단한다. 그런 나에게 주체사상이라니... 나를 욕하더라도 좀 기본적인 팩트 체크는 제대로 하고 욕하면 좋겠다. 하긴 니들이 주체사상과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구분할 능력은 되겠냐?

 

 

     매카시, 매카시즘, 대부분 진실

 

매카시즘과 베노나 프로젝트... [티스토리]emfworld가 올린 글이다(2021211). 좌파 빨갱이들은 뻑하면 "매카시즘"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언제 이런 말을 쓰냐하면 종북주의자로 의심받는 놈들이 종북질을 했는지 사람들이 따질라 치면, 어김없이 애먼 사람 때려 잡는다"매카시즘" 이라고 공세를 펴는 거죠. 이해찬이도 용공 광풍을 조장하는 악질적 매카시즘이라고 했었고, 박지원이도 과거 박근혜 정부시절 정부 여당이 민생현안을 종북 문제로 덮으려는 것은 굉장히 매카시즘적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저들의 이런 주장은 전혀 근거도 없고 무식한 말이다. ‘매카시즘이란 말은 19502월 미국 공화당의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국무부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로를 통해, 미국 내 반국가 간첩세력을 고발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미국 내 구소련을 동경한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고, 이들 중 일부가 실제 간첩활동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에 따른 고발 바람이 일었고 미국 전체가 이념적 갈등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힌 사람들 중에는 억울한 사람도 당연히 있었겠죠. 그래서 매카시즘이라는 말은 그 이후 근거 없이 상대를 이념적으로 낙인을 찍는다라는 나쁜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1995, 미국 국가안보국이 소련의 암호교신을 도청했던 베노나 프로젝트를 공개하면서, 소위 억울한 순교자로 알려졌던 사람들이 진짜 간첩이었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 버렸다. 얄타회담을 기획했던 엘저 히스 국무부 차관보도, IMF 창설에 관여한 해리 덱스터 화이트 재무부차관보도 소련의 간첩이었던 것이 밝혀졌다. 소련에 한반도를 맡기는 게 좋겠다고 했던 국제정치학자 오웬 렌티모어도 물론이다. 매카시 리스트는 대부분 진실이었던 것이다.

 

 

     베노나 기밀문서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는 당시 소련과 미국 사이의 팽팽한 국제외교 관계를 다루고 있다. 베노나 프로젝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군 등 추축국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시작된 영국과 미국의 군사 계획이었다. 2차 대전 직후 미군은 호주에 설치해놨던 도청기지에서 기밀정보의 상당수가 영국에서 소련으로 넘겨지고 있다는 걸 알아낸다. 그러나 소련의 암호가 너무 정교해서, 도무지 해독을 할 수가 없어서 미국이 한창 고민 할 때, 다행히도 핀란드정부가 소련군 암호를 해독할 열쇠를 건네준다.

 

미국이 넘겨 받은 건 소련군 암호 책자의 일부였는데,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핀란드군이 정찰 중에 암호를 태우고 있던 소련군 암호병을 사살했는데, 그때 미처 태우지 못한 암호책자의 일부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던 것. 미국은 이 암호책자를 입수하자 미국 내의 모든 암호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소련군의 암호 해독작업에 들어갔고, 수개월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암호해독에 성공한다.

 

 

     미국과 영국 내  간첩 200여 명

 

미국과 영국 내 200여 명의 간첩들이 모든 정보를 소련으로 넘긴 사실... 미국과 영국 내에서 활동 중이던 소련 간첩들은, 놀랍게도 그때 당시 미국 국무부의 요직에 앉아 있었던 엘저 히스, 핵무기 기술을 넘겨준 로젠버그 부부, 캠브리지 5인방 간첩(Cambridge Five) 킴필비, 도날드 매클린, 가이버지스, 앤소니 블런트, 존 캐인크로스 등... 여러 인물들이 소련이 심어놓은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욱 놀라운 게, 그때 미국 정부요직에 앉아있던 소련 간첩들을 하나씩 지명하던 매카시의원이 작성한 리스트 대부분이 실제로 소련의 간첩인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폭로당시 매카시 의원은 소련간첩들을 지목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제보와 정황에 불과했고, 증거를 대지 못해서 많은 공격을 받았었다. 당시 미국정부 전체를 빨갱이 광풍으로 몰아가는 매카시즘 이라면서 매도를 당했는데, 이것이 매카시즘이라는 용어의 어원이 된 계기이다. 심지어 엘저히스, 캠브리지 5인방, 등 여러 간첩들의 혐의가 베노나 문서를 통해 이미 증명 되었음에도 매카시 의원의 명예가 회복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이유는 존 에드거 후버 CIA국장의 판단으로, 이 명단을 먼저 공개할 경우 소련에 대한 앞으로의 도청이 불가능해질 것을 우려해, 당분간 비밀로 부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카시 의원과, 맨 처음 앨저히스가 간첩이라고 주장한 휘태커 챔버스의 명예는 후에 베노나 문서가 모두 공개될 때서야 회복되게 된다.

 

 

     얄타회담 기획  엘저 히스는 소련 간첩

 

우리 건국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의 일화도 있는데, 당시 이승만은 소련의 한국 점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이 한국의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미국의 정책에 반영시키기 위해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지 한 달 후인 194212, 이승만은 미 국무부를 방문했고, 여기서 헐 국무장관의 보좌관 간첩 히스(엘저 히스)와 만난다. 이날 이승만은 엘저 히스에게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야만 일본 패망 후 소련의 한국 점령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히스는 미국의 전시(戰時) 동맹국 소련을 공격하는 것은 안 된다. 한국 문제는 일본 패망 후 결정할 문제라면서 이승만의 제안을 거절하고 반대하자, 이승만은 앨저 히스를 " 국무부의 소심한 월급쟁이" 라고 공격했고, 앨저 히스가 국무부의 요직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엘저 히스가 매카시의원, 휘태커 챔버스에게 공격당하면서도 국무부에 그렇게 오래 남아있었는데, 일단 집안이 좋고, 존스홉킨스대학,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한 일류 엘리트였고, 간첩이라고 공격받으면서도 루즈벨트, 애치슨의 사랑을 받는 인재였다는 점에서 오래 살아남았다. 심지어 루즈벨트는 엘저 히스는 자신이 잘 알고 아끼는 인재라면서 그가 받는 의혹을 무마시켜주기까지 했다. 실제로, 이 간첩들이 미국에 끼친 악영향은 대단해서, 엘저 히스는 국무부의 요직에 있으면서 유엔의 창설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는데, 소련 간첩이었던 엘저 히스가 만든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사실 유엔창설은 소련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소련 간첩 엘저 히스는 이렇게 당시 한반도의 독립에 대한 결정과, 분단후의 정책, 6.25 전쟁 때까지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기밀들을 닥치는 대로 소련에다 갖다 넘겼다. 또한 영국의 영국판 강남좌파 빨갱이 캠브리지 동성애 게이 5인방도 영국의 MI6의 미국연락관으로 있으면서, CIA FBI와 자유롭게 접촉하며 모든 정보를 소련에 넘겼다.

 

6.25전쟁 때의 중공군 개입이 가능했던 것도 이들의 작품 이었는데, 미군과 유엔군이 절대 중공 국경을 넘지 않는다는 기밀정보를 소련을 통해 중공측으로 넘겼고, 중공은 이 정보를 입수, 미군의 중공 본토 공격의 걱정 없이, 이른바 조미항전 전쟁의 참전을 결정하고 압록강을 넘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중공본토 원폭공격을 주장하다, 트루먼에 의해 사령관에서 해임된다.(이때 맥아더 장군도 간첩의 존재를 눈치챘다고 한다) , 이들 미국 영국 간첩단들은 한반도 분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간첩들 정보 덕에 맘 놓고 넘어온 중공군

 

이렇게 엘저 히스가 소련의 간첩이라는 사실을 모르고도, 엘저 히스를 한눈에 폄하한 이승만의 감각은 대단하다 생각한다. 당시 미국 정가의 견해는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 반면,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은 적이며 견제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김구나 김규식처럼 좌우합작을 주장하고,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지지했으면 우리나라는 100퍼센트 공산화되었을 것이고, 지금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역사, 반세기만에 선진국반열로 뛰어오르는 역사는 사실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마 지금쯤 집집마다 김일성 삼부자의 사진을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하며, 북한처럼 위대하신 장군님의 교시나 외우고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좌파들은 매카시즘이라고 하면, 모든 것이 은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김정은 체제에 대해서나, 북한 핵에 대해, 북침이냐? 남침이냐?를 정치인에게 묻는 것은 사상검증도 아니고, 이념공세도 아니다. 사상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반인륜적이며 패륜적 범죄와 간첩죄까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혹시 주위에 매카시즘 어쩌고 하면서 음해라는 좌파 빨갱이가 있다면, 이 역사를 들려주시길..

 

 

     루스벨트를 속인 국무부 간첩  엘저 히스

 

고급 간첩 연구...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을 속인 국무부 엘리트 엘저 히스... 나는 공산주의자라고 외치고 다니는 간첩은 없다!... 유엔 창립 시 미국의 실무 책임자였던 엘저 히스는 소련 간첩이었다. 한국의 히스는 누구일까? 20161011일 조갑제 기자의 글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의 세계 질서를 관리하기 위하여 만든 두 기구가 IMF와 유엔이다. IMF와 유엔이 다 소련에 포섭된 미국 엘리트 간첩의 주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는 당시 미국 관료 및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친소련화 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소련 정보기관이 2차 대전 때 미국과 동맹 관계가 된 상황을 십분 활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IMF 창설의 미국 측 책임자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유엔 창립의 미국 측 실무 책임자 앨저 히스의 정체를 폭로한 사람은 주간지 타임의 외신부장이던 간첩 위터커 챔버스였다. 그는 1924년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 공산당에 들어가 당의 문학잡지 편집자로 일하던 중 당의 지시를 받고 1934년부터 지하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활동이란 게, 미국 내 소련 간첩망의 일원으로 비밀문서나 정보를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미국 정부 내의 간첩들이 건네주는 문서를 사진으로 찍어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고, 원본을 돌려주는 식이었다. 1930년대 후반 그는 불안해졌다. 소련으로 불려가 숙청될까 겁이 났다. 19384, 그는 미국 공산당을 탈퇴하고 주간지 타임에 취직하였다. 기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여 외신부장이 되었는데, 반공적인 글을 많이 썼다.


소련 간첩 챔버스는 소련 측이 자신과 가족에게 보복을 해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19398, 원수지간이던 히틀러와 스탈린이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맺자 자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미국도 위기를 맞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소련 간첩망의 활동상을 직접 설명하려고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국무부 차관보 아돌프 벨레가 대신 나왔다. 챔버스는 벨레의 자택에서 그가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벨레는 기록은 했으나 FBI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소련 간첩에 관련된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FBI가 간첩 챔버스를 처음 인터뷰한 것은 1942년이었다. 그 뒤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1945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에 포섭되었던 미국인 간첩 엘리자베스 벤틀리가 전향, 의회에서 미국에서 활동중인 소련 간첩망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급사한 전임자 루스벨트 대통령과는 달리 소련과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미국/소련 관계도 악화되던 시기였다. FBI는 다시 챔버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미국 의회도 조사를 개시하였다.

 

     간첩 히스가 소련에 넘겨준 문서


194883, 전향한 간첩 챔버스는 미 하원 미국활동조사위원회에 출석, 여러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폭로하면서, 앨저 히스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817일 캘리포니아 출신 초선 하원의원 닉슨은 히스와 챔버스 두 사람을 조사위원회로 불러 대질 신문하였다. 간첩 히스는 챔버스를 약간 아는 사이라고 했으나, 공산주의자였다는 주장을 부인하였다.

 

당시 44세이던 히스는 카네기 재단의 대표로 있었지만, 그 전엔 국무부의 엘리트 관료로 명성을 남겼던 이였다. 하버드 법대 졸업생인 히스는 대법원 판사의 서기로 일하다가 변호사를 개업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추진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워싱턴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국무부에 정착, 요직을 거쳤다. 1945년 초 얄타 회담 때 루스벨트 대통령을 수행한 국무부 팀의 일원이었다. 그 직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조직을 위한 준비 회의 사무총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FBI는 챔버스와 벤틀리가 제공한 정보를 기초로 하여 히스를 內査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국무부는 그를 사임시켰으나, 존 포스터 덜레스(나중에 국무장관)의 도움을 받아 카네기 재단의 대표로 일하게 되었다.


히스는 챔버스에게 면책특권이 보장된 의회에서 그런 주장을 하지 말고 바깥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해보라고 도전하였다. 챔버스가 그렇게 하자, 명예훼손 혐의로 제소하였다. 1948114일 챔버스는 재판 증언에서 히스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소련 간첩이었다고 폭탄 발언을 하였다. 열흘 뒤 챔버스는 물증을 제시하였다. 그는 미국 공산당을 떠나기 전에, 히스 등 미국인 간첩들이 자신을 통하여 소련 공작원에게 건네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스가 국무부의 비밀문서들을 육필로 요약한 메모, 타이프라이터로 옮겨 적은 문서 등이었다. 그는 이 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호박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숨겨두었다가 다시 꺼냈다. 언론에 의하여 호박 문서로 불리게 된다. 챔버스는, 이것은 히스가 193712월부터 19382월 사이에 소련 측에 넘겨준 문서 중 샘플이라면서 타이프를 친 이는 히스의 부인이라고 폭로하였다. 전문가들은 히스의 필적이 맞는다고 감정하였다.

 

     유죄 선고 히스 44개월 복역


미 하원은 이런 물증 등을 근거로 하여 별도로 히스를 위증죄로 고소하였다. 간첩죄의 시효는 이미 끝난 뒤였기 때문이다. 194961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챔버스는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처음엔 히스가 공산주의자이지만 간첩은 아니라고 했다가 이를 번복한 점이 신뢰를 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증언 태도도 불량하게 보였다. 히스의 변호인은 날씬하고, 핸섬하며, 논리적인 피고인을 모범적인 미국시민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변호인은 히스가 비밀문서를 작성하는 데 썼다고 챔버스가 주장하였던 타이프라이터를 증거물로 제출하였다.

 

히스는 이것을 193712월에, 즉 챔버스가 문서를 받았다고 주장한 날짜 이전에 가정부에게 주었다고 알리바이를 주장하였다. 이 가정부와 아들은 법정에서 히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였으나 말에 조리가 없었다. 78, 배심원단은 기소 찬성 8, 기소 반대 4로 평결하였다. 만장일치라야 기소가 가능하다. 미국 정부는 재판을 다시 하기로 하였다. 1117일에 시작된 재판에서 검사는 히드 매싱이란 증인을 내세웠다. 매싱은 소련 간첩이던 시절에 히스가 자신의 조직원이던 노엘 필드라는 또 다른 국무부 간첩을 그의 조직으로 빼내 가려 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두 번째 재판에서 히스는 유죄 선고를 받고 44개월간 복역한 뒤 1954년에 석방되었다. 히스 사건은 이게 1막이었다.

 

     챔버스 1952<<증인>> 제목의 회고록

 

미국의 이른바 진보진영(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총칭하는 표현)은 히스가 우파에 의한 마녀 사냥의 희생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히스를 미국 판 드레퓨스로 만들려 했다. 히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혀내면 우파뿐 아니라 온건 좌파에게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계산하였다. 수많은 음모론이 난무하고 취재 및 저술활동이 전개되었다. 챔버스는 1952년에 증인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 내용은 흥미진진하였다. 공산주의자를 거쳐 간첩이 되었다가 반공주의자로 표변, 폭로자로 낙착된 자신의 방황과 고뇌와 번민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었다.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히스도 1957년에 <<여론의 법정에서>>라는 회고록을 썼다. 미국 의회 조사위원회와 법정 자료를 너무 많이 인용하여 재미가 없었다. 자신의 성장과정이나 국무부 생활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억울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감정이 없는, 건조한 이야기만 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 냉전이 끝난 뒤 정체가 드러나다... 히스의 결백을 주장하는 책이 세 권 더 나왔으나, 설득력 있는 반증은 없었다. 한편 하원의원 시절 히스를 법정에 세운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히스는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닉슨이 같은 수법으로 자신을 옭아매었다고 주장하였다. 세론도 히스에 유리하게 돌았다. 히스는 자신을 냉전의 순교자로 그렸고, 대학교에서 인기 초빙 강연자가 되었다. 1975년 매사추세츠 주 변호사회는 히스를 다시 가입시켰다. 그의 무고함을 뒷받침하는 듯하였다. 이 무렵 알렌 바인스타인이란 역사 연구가가 등장한다. 그는 히스가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시작하였다. 챔버스와 히스를 잘 아는 80명을 인터뷰하였다. 東歐와 이스라엘에 가서 전직 소련 정보기관원들도 만났다. 히스에게 불리한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히스의 변론자료를 얻어 읽어보니 검사에 의한 증거 조작설을 부정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1976년에 <<위증>>’이란 제목의 책을 냈다. 히스를 틀림없는 소련간첩이라고 못 박았다.

 

1984, 레이건 대통령은 이미 사망한 챔버스의 反共 활동을 기려 그에게 자유의 메달을 주고, 챔버스가 자료를 숨겼던 농장은 국가역사지구로 지정되었다. 199610월 미국의 CIANSA(국가안보국)1930, 40년대의 소련 암호 해독 자료를 공개하였다. 이게 결정타였다. 1945330일자의 소련 암호 電文은 이런 요지를 담고 있었다. <알레스(Ales·암호명)1935년 이후 소련 군사정보 기관을 위하여 일하는 미국 간첩인데, 얄타 회담에 참석하였다가 모스크바를 방문, 당시 소련 외무장관 비신스키를 만났고, 이 자리에서 비신스키는 알레스의 활동에 감사하였다.>... 얄타 회담 이후 모스크바로 간 미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를 수행한 이가 히스였다. 히스의 정체는 냉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확정되었다.

 

히스가 간첩이란 사실이 확정되면서 미국 공산당의 정체에 대한 논쟁도 정리되었다. 미국의 자칭 진보파는 미국 공산당을 일종의 자발적 民權(민권)운동 단체인 것처럼 변명하고, 보수파는 이 당이 자진하여 소련의 하수기관으로 전락하였다고 공격하였다. 히스의 무고함을 40년 이상 주장해오던 진보파의 패배로 미국 공산당의 순수성도 부정당하였다.

 

 

     원외정당인 노동당 조선공산당 기념행사

 

네이버 [블로그] 새벽이슬에 조선공산당 창당기념행사어이없다는 글이 올라왔다. [뉴데일리] 조문정 기자(2023-04-18)가 보도했다. 서울 한복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식 기념행사라? 북한과 휴전선을 두고 대치중인데.... 조선공산당 창당기념행사2023417일 오후 1, 서울 복판에서 못 믿을 일이 벌어졌다... 서울 롯데호텔 앞에서'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 건립 기념행사'. 1925417일 오후 198년 전 '조선공산당'과 시간까지 맞춰. 행사주최 노동당 '조선공산당 선언' 낭독'인터내셔널' 제창. 북한 국회의장 허헌·문화상 허정숙·김원봉 등 소개묵념까지. 6.25 주범 박헌영, 소련 지시로 '공산당' 주도주최측 "감회 새롭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질서를 양대 축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을 설치하고, 그 앞에서 '조선공산당 선언'까지 낭독하는 일이 벌어졌다. 원외정당인 노동당(옛 진보신당연대회의)98년 전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던 중국음식점 아서원(雅敍園) 터인 서울시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앞(을지로1180-6)에서 417일 오후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 건립 기념행사'를 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시작된 417일 오후 1시로 시간까지 맞춰 행사를 시작했다.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 표석'2021621일 이들 노동당이 서울 중구청에 신청, 올해 329일 롯데호텔 앞에 설치됐다. 표석의 제목은 서울시 중구 문화재위원회 표석분과의 요청에 따라 '광복단결사대 활동지'가 들어간 '광복단결사대 활동지 및 조선공산당 창당대회 터'로 정해졌다.

 

표석에는 "이곳은 1920824일 미 의원단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 아래 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이 조선총독 및 일본 고관을 처단하려 모였던 아서원 자리이다. 1925417일 여기서 열린 창당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돼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고 적혔다. 노동당 관계자들이 행사와 관련해 입을 열었다. 이종회 노동당 공동대표는 "우익들에게 훼손당할까 봐 자리조차 숨겨놓은, 이름 모를 '빨치산 선배들'의 비석을 보면서 '그 삶이 내 삶이구나'라고 생각했었다""(표석을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이 공동대표는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와 미등록 정당 표방단체인 '사회변혁노동자당' 대표 등을 역임한 바 있다.

 

6.25 주범 박헌영은 19504월 스탈린에게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의 20만 남로당원이 봉기해서 인민군의 진격을 도울 것"이라며 '남로당원 20만 명 봉기설'을 주장해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과 함께 '6.25 남침'을 전격 추진했다. 그는 인민군 중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 후 세력을 공고화한 김일성에 의해 1956719일에 미국의 첩자로 몰려 처형됐다. 한편, 이날 노동당 인사들은 기자에게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주의는 북한, 러시아식 사회주의와는 다르다"며 강변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날 점심을 위해 찾은 곳은 북한 김일성의 친동생인 김영주가 다녀갔던 '용금옥'(서울 중구 다동)이라는 추어탕 전문점이었다. 이날 행사는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인터내셔널가()' 제창으로 마무리됐다. '3대 세습 권위주의 독재 정권'인 북한도 지난 2021년부터 당 대회에서 인터내서널가를 불러왔다. 일반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조선공산당 터 표석''극대노'"즉각적인 경위조사"를 지시... 오세훈 "'표석 설치' 결정과정 문제점 보고받고 개선 추진"... 서울시 "문화재정책과장 전결로 설치해, 국장·시장은 몰라". '공산당 표석', 노동당이 중구청에 신청올해 3월에 설치. "민족주의적 단체 이용한다"는 조선공산당 '미화' 논란. [뉴데일리] 조문정 기자(2023-04-18).

 

 

[참고] 주동식, 인터넷신문 [3의길] 전 편집인, [호남과 친노] 저자.

https://www.facebook.com/teraluxju

[참고] [티스토리] emfworld, 2021. 2. 11.

https://identity.tistory.com/33?fbclid=IwAR2QgOVHD_CJuUsk7oz-BZnlU-TmVoDgieFgmjhDwVYoSe-FQFnDQnBM8fc

[참고] 네이버 블로그, egeyouri.

https://blog.naver.com/egeyouri/223243900626

[참고] 칼럼 ‘#581__ 자유민주주의와 국민, 주사파 정리. 김경수와 드루킹’,

뚱보강사, 2022.09.06. 조회 176.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827471

[참고] 칼럼 ‘#278__ 문맹과 문해, 가짜 진보’, 뚱보강사, 2021.05.05.

조회 323. https://kg60.kr/cmnt/2342/boardInfo.do?bidx=767931

[참고] 나무위키

https://namu.wiki/w/PD%28%EC%A0%95%ED%8C%8C%29

[참고] 조갑제, 2016-10-11.

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8742&C_CC=BB

[참고] [블로그] 새벽이슬

https://blog.naver.com/lds8000

[참고] [뉴데일리] 조문정 기자, 2023-04-18.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4/21/2023042100207.html

 

---



1,160개의 글

    글 번호제목작성자작성일조회
    공지 관리자11.09.16126
    1160뚱보강사24.06.2070
    1159뚱보강사24.06.16150
    1158뚱보강사24.06.14130
    1157뚱보강사24.06.13126
    1156뚱보강사24.06.11179
    1155뚱보강사24.06.09206
    1154뚱보강사24.06.07169
    1153뚱보강사24.06.06157
    1152뚱보강사24.06.05152
    1151뚱보강사24.06.02159
    화살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