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__본국무예 신화와 역사 임성묵 창힐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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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g=문자의시원-임성묵 총재-‘본국무예’-P26-49차례와 본문시작까지--

뚱보강사 이기성

 

 

    635__본국무예 신화와 역사 임성묵 창힐 문자

 

 

[불교공뉴스] 손혜철 기자가 도서출판 행복에너지에서 출간된 신간 본국무예(本國武藝) 책을 소개했다(2022627). 본국무예책의 편저자는 임성묵(1961~) 대한본국무예협회 총재이다. 경향신문, 세계일보에서 활동한 박정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본국무예책을 추천했다... 임성묵 총재는 갑골문으로 천부경(天符經)무예를 연구했던 방식으로새로운 해석을 했다. 또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된 가림토와 창힐(BC 4666~4596)문자를 해독하여, 창힐문자의 내용이 견우와 직녀의 신화로서 은하수와 북두칠성의 운행한 것을 기록한 것임을 밝혀냈다. 가림토와 갑골문이 북두칠성의 운행을 보고 만들었다는 문자의 제자원리를 임성묵 총재가 발견한 것은, 그간 북두칠성과 샤머니즘 문화의 복원을 주력해온 나로서도, 매우 놀라운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서출판 행복에너지가 발간한 본국무예책의 서평: 2008년부터 전통무예진흥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우리의 전통무예는 중국무술과 일본무도, 서양스포츠에 가려져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국무예발간은 후대를 위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학계는 물론 무예계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무예계의 현실을 들어보면, 정부의 지원도 없고, 학계에서도 전통무예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저자 임성묵 총재는 집요할 만큼 한··일 무예서를 탐독하여 수련하면서, 모든 무예종목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무예 종목들이, 실제는 하나로 연결된 무예 체계로 구성됐다는 것을 찾아낸 것은 무예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연구다. 본국무예20여 년간 한··일 무예서를 연구해오면서 완숙의 경지에서 쓴 역작이다. 본국무예는 옛 무예서가 단순한 술기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당시 신화와 의례를 비롯해서 세계관이 압축된 문화복합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번 본국무예는 잃어버린 한국무예의 역사와 정체성을 밝히는 큰 등불이 될 것이다.

 

전통무예를 복원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같은 책을 보고도 각기 다른 동작으로 복원되는 이유는, 기존에 배운 무예의 선입관의 영향과 한자와 그림에 대한 깊은 이해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대개가 평면의 2차원적 사고에 머물렀다면, 임성묵 총재는 입체적이고 3차원적 사고로 접근했다. 문인(文人)이 자연과 인간의 보편적인 법칙을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다면, 무인(武人)은 기운생동을 몸으로 깨닫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무예를 복원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자에서 동사를 중심으로 동작을 찾아야 한다.

 

최초의 무예서는 갑골문과 금문으로 죽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옛 무예를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는 갑골문과 금문 중심으로 연구해야 한다. 잃어버린 상고시대의 정신문화를 찾기 위해서는 임 총재와 같은 새로운 접근방식의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전통무예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전란(戰亂)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무예 관련 자료들이 소실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전통무예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임성묵 총재가 찾아낸 무비문에는 창, , , , , 기사 등 여러 종류의 무예는 물론 대동유술의 기법을 기록한 비전해법과 택견의 동작까지 있다. 그 속에 그려있는 무인은 상투를 한 조선 사람으로 한국 무예사에 소중한 역사 자료가 될 것이다. 이번에 출간한 본국무예는 훗날 무예문화 창달은 물론 무예의 역사서로서 후손들에게 길이 남아 문무합빈(文武合斌)으로 무예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우게 할 것이 분명하다.

 

 

     임성묵 총재. 가림토, 창힐문자 해독

 

임성묵 총재는 갑골문으로 된 능은본(農隱夲)의 천부경(天符經)을 무예를 연구했던 방식으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었다. 또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된 가림토(加臨土)와 창힐(倉頡, BC 4666~4596)문자를 해독하여 창힐문자의 내용이 견우와 직녀의 신화로서 은하수와 북두칠성의 운행한 것을 기록한 것임을 밝혀낸 것은 문자학적(文字學的)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임성묵 총재가 가림토와 갑골문이 북두칠성의 운행을 보고 만들었다는 문자의 제자원리를 발견한 것은, 엄청난 성과이다.

 

임성묵 총재는 잃어버린 전통무예의 역사와 실기를 복원하기 위해 무인의 삶을 걸었다. 이를 위해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조선세법과 본국검을 복원하여 2013815일에 본국검예 1. 조선세법본국검예 2. 본국검법을 출간하고, 쌍수도와 왜검류를 복원하여 2018121일에 본국검예 3. 왜검의 시원은 조선이다를 출간했다. 무예도보통지의 나머지 권법과 쌍검 창법의 복원을 위해, ··일의 여러 고무예서를 비교 연구하던 중에 뜻하지 않게 잃어버린 우리의 고무예서를 찾게 되면서, 우리의 무예가 고조선-상나라-고구려-발해를 거쳐 전승된 사료를 찾았다는 기쁨보다는 우리의 슬픈 역사를 보게 되었다.

 

신화를 잃어버리면 역사도 잃어버린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종국에는 나라를 잃는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고토를 찾는다. 전통무예를 접하게 되면 누구나 자랑스러운 역사와 함께 잃어버린 역사와도 마주 서게 된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저자가 무예를 통해 바라본 우리의 역사는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와 많이 달랐다. 2020103일 개천절 행사에서 정세균 국무총리는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신화적 관점을 극복하겠다.”라고 선언했지만, 이것이 실현되려면 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다.

 

 

     고조선은 실존의 역사

 

홍산문화와 사고전서 등을 연구하는 재야사학자들 덕분에, 고조선이 실존의 역사임이 밝혀지고 있다. 요하문명권에 살던 동이족 일파가 건국했던 상()이 망하면서, 기자(箕子)를 따라 유민들이 백이와 숙제가 있던 요하의 고죽국(孤竹國)으로 이동했다. 隋書(수서唐書(당서)와 송()삼국유사에도 고조선과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중국 손작운(孫作雲)산해경을 동이의 고서(古書)로 규정하였고 해내경(海內經)을 아예 조선기(朝鮮記)라고 부른다. 중국 정사에 고조선은 은나라 이전에 북경(연변)에서 건국했다는 기록도 있고, 사마천의 조선열전에도 만이(蠻夷)의 세력이 옛 연과 제까지 미쳤다(朝鮮蠻夷及故燕)”는 기록과, 역사가 왜곡되기 전의

문해자패수는 낙랑누방에서 나와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東入海(패수출낙랑루방동입해)”라는 명확한 기록이 있음에도 우리 강단의 사학자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처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차고도 넘친다. 오늘날은 그 옛날 김부식과 일연이 볼 수 없었던 사료들을 볼 수 있다. 그 속에는 강단사학계가 그렇게 부정하는 고조선과 북부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도 당과 신라 관점에서 썼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후, 세조·예종·성종은 어명을 내려 고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도증기·통천록·지화록등과 같은 고서를 민가에서 거두어들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도 한민족의 고대 사료가 상당수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많은 단군조선 관련된 사서를 없앴지만 세종실록지리지檀君古記(단군고기)上帝(상제) 桓因(환인)庶子(서자)가 있으니, 이름이 ()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天符印(천부인) 3개를 받아서 太白山(태백산) 神檀樹(신단수)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檀雄天王(단웅천왕)이 되었다. 환인의 손녀에게 ()을 마시고 人身(인신)이 되게 하여, 檀樹(단수)()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檀君(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朝鮮(조선)이라 하니, 조선, 尸羅(시라高禮(고례南北沃沮(남북옥저東北扶餘(동북부여()()이 모두 단군의 다스린 지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 나카 미치요, 세키노 타타시의 역사 왜곡

 

--- 일본 학자의 역사 왜곡... 세종실록지리지檀君古記(단군고기)내용을 1894년에, 도쿄 제국대학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교수는 檀君考(단군고)에서, “삼국유사에 나온 檀君史籍(단군사적)은 한국불교의 說話(설화)에 근거하여 架空(가공)仙譚(선담)”이라 하였고, 단군조선의 建國史話(건국사화)설화에 바탕을 둔 불교 이야기로 조작하여 단군설화로 만들었다. 이어 케이오의숙(慶應義塾) 출신 나카 미치요(那珂通世)삼국유사에 나온 내용을 두고, ‘僧徒(승도)妄說(망설)을 역사상의 사실로 삼은 것이라고 하여 사화를 허구로 만들었고, 이어 1897朝鮮古史考(조선고사고)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 승도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라고 하였으니, 단군사적을 이른바 단군신화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이 주권을 상실한 결과, 조선총독부는 尋常小學國史補充敎材(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를 통해 한반도 북쪽은 중국이, 남쪽은 임나가 다스린 것으로 조작하여 소학교에서 가르쳤다. 일본 역사학자 세키노 타타시(関野貞)는 낙랑 유물을 평양에 묻고 한사군 평양 설을 조작했지만, 사후 그의 일기장에서 조작에 사용하기 위해 낙랑 유물을 샀던 기록이 발견되면서, 한사군이 평양에서 대륙으로 이제서야 이동하게 됐다. 해방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고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지금은 해방된 주권국 이 아닌가?

 

--- 일본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세 가지의 논리를 세웠다... 첫째, 단군의 역사성 말살, 둘째, 한사군의 한반도설, 셋째 임나-가야설이다. 이 역사 조작에 참여한 이병도와 신석호는 해방 후, 승승장구하여 역사학계의 태두가 되었고, 그 제자들이 식민사관을 가르친 덕분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지 못한 결과 중국은 동북공정을 쉽게 완성했다. 언젠가 이 역사로 인해 중국이 북한을 점령할 명분으로 삼을 것이고,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남한을 점령할 명분으로 삼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1908년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1931조선상고사를 연재하고, 백암 박은식 선생은 1915韓國痛史(한국통사), 1939년 서계수 선생은 朝鮮世家譜(조선세가보)를 썼다. 이런 조선사 열풍에 맞서 조선편수회에서 조선사38권을 쓴다. 오늘날 초중고대학교의 현실은 조선상고사를 단 한 곳도 가르치지 않고, 여전히 조선총독부의 세 가지 지침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역사 교육의 현실이다. 참으로 비통하지 않을 수 없다.

 

중원의 興亡盛衰(흥망성쇠)한 역사는 실제로 中華(중화)가 중원에 세운 나라는 없다. 중국 연표의 시작도 동이족이 세운 ()()으로부터 시작된다. 중국은 ()() 덕분에 역사상 유례없는 광활한 영토를 갖고 있다. 과거의 모든 역사는 왕조사다. ()(1115~1234)을 건국한 아골타의 시조는 신라인 김한보이고, 後金(후금)을 건국한 누르하치는 ()의 초대 황제다. 천우신조로 청의 건륭제는 四庫全書(사고전서)를 편찬한다. 여기에는 고려나 조선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중국·한국·일본·베트남 등의 서적들이 있어, 잃어버린 고조선의 역사를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사마천의 역사 조작

 

고조선의 멸망에 따른 한민족의 이동, 북방민족의 분열과 중원정복이 오늘날 중국의 역사다. 우리의 사료가 중원에 남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사마천은 () 건국 100년 후, 서기전 135년 한 무제가, 서로는 흉노를, 동으로는 고조선을 남으로는 월을 침략하여 중원의 강역을 넓힐 당시에 태어났다. 사마천은 한 무제 이전의 중화 3천 년 역사를 만들기 위해, ()부터 ()까지의 계보가 필요했다. 그 당시에 三皇五帝(삼황오제)의 계보가 있지만, 사마천은 동이족인 태호 복희와 염제 신농을 삼황에서 뺐다. 치우와 싸운 같은 동이족인 황제 헌원을 중화의 시조로 만들기 위해, 황제를 계승했던 장남 소호 금천의 행적이 동이족임이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에, ‘소호 금천을 빼고, 차남 창의의 아들 재전욱(고양)이 황제를 계승한 것처럼 황제-재전욱-제곡-제요-제순으로 계보를 조작했다.

 

한술 더 떠서, 皇甫謐(황보밀: 215~282)은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 황제를 소호의 아들로 조작하여, 부자 관계를 아예 바꿨다. 황제의 부인은 누조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두 자식이 동이족이면 재전욱도 당연히 동이족 아닌가!

()의 시조 ()는 재전욱의 손자이고, ()의 시조 설()10은 소호의 손자이고, ()의 시조 后稷(후직)은 제곡의 장남으로 이 또한 소호의 손자다. 고구려의 시조인 고양 전욱도 황제계열이다. 사마천은 삼황의 역사를 지우고, 황제로부터 화하족의 역사를 조작했지만, 주변 관련 국가들의 사서들로 인해 조작이 드러나고 있다.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에 김유신은 헌원과 소호의 자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유신은 황제의 장남 계열의 자손이다. 중국은 동이의 역사를 숨길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동북공정이 완성된 자신감 때문인지 최근 산동성 임기시 동이문화박물관에서 태호복희·소호김천·치우·순임금네 명을 동이의 영웅이라고 밝히고, 큰 동상을 세웠다. 사기28 封禪書(봉선서)진나라 제후 양공이 자신의 조상인 소호에게 제사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동이족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사기조선열전에 연나라 장수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할 때 상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투는 고조선의 고유문화라고 여러 기록에 있다. 실제 진시황의 병마용갱의 토용들은 上斗(상두)를 했다. 上斗(상두)는 북두칠성을 숭배한 동이족이 해오던 머리 형태다. 머리카락을 묶을 때도 앞으로 네 번, 뒤로 세 번 돌린 뒤에 網巾(망건) 끈으로 묶는다. 이것은 북두칠성 7의 수를 상징한다. 칠언율시의 시문도 마찬가지다.

 

홍산문화(BC 4800~2900)는 고조선 문명의 전 단계로 보고 있는데, 여기에서 상투 머리를 고정하는 옥고가 발견되었다. 옥고 중원 내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최소한 신석기시대부터도 상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투가 무비문유구무비지의 그림에서 발견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비문()을 건국한 ()의 뒤를 이은 2대 왕 昭明(소명)이 남긴 ()이니, 잃어버린 고조선의 무예가 부활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 문화를 꽃피워 400년을 이어온 () 시조 劉邦(유방)은 어느 민족인가? 사마천도 高祖夲紀(고조본기)에 유방을 화하족이라 기록하지 않았다.

高祖(고조) 유방은 중국 영역 밖에 있는 沛縣(패현) 豐邑(풍읍) 中陽里(중양 리) 사람이다. 성은 (), 자는 (). 淮水(회수)泗水(사수)가 흐르는 淮夷族(회이족)이 살던 지역이다. 사기』 「고조본기유방은 패현의 뜰에서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라고 한다. 武神(무신) 蚩尤天皇(치우천황)은 사마천도 인정한 동이족의 무신이다. 황제가 중화의 시조이고, 치우가 원수라면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겠는가? 고려 제25(1287, 1290) 충렬왕도 두 차례 纛旗(둑기)에 제사를 지냈고,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뚝섬에 纛神祠(둑신사)를 세워 치우를 모셨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계사(1593갑오(1594을미(1595)’纛祭(둑제)를 지냈고 거영일기에 병오(1606) 경칩 일에 둑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삼군수군통 제영에서는 경칩과 상강일에 둑제를 올렸다. 한편, 장군들의 머리위에 쓰는 투구 위에는 작은 삼지창과 붉은 술이 붙어 있다. 이것은 치우기를 축소시킨 것으로, 한민족이 치우의 후예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무신 치우와 함께 한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史記는 고조선 역사를 뒤엎어 쓴 책

 

오죽하면 일본의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 같은 양심적인 학자는 史記(사기)는 고조선 역사를 뒤엎어 쓴 책이라 평가하겠는가! 공자의 고향 곡부는 오늘날 산동성이다. 그곳에 소호 금천의 ()이 있다. 棍法歌(곤법가)卲陵拳勢歌(소릉권세가)에 나오는 卲陵(소릉)’도 산동성에 있다. 공자는 자신은 은나라 사람이라고 유언했으니, 동이족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공자가 ()()에 망하자, 尊周論(존주론)春秋大義(춘추대의)의 명분으로 삼은 결과, 사마천은 공자의 尊華攘夷(존화양이)를 본받아 중화사관을 중심으로 역사를 썼다.

 

공자와 ()에 사대한 조선은 주체 사관을 버리고, 고조선의 사서를 스스로 수거하여 불태운 결과, 상고 조선의 역사가 사라져 버렸다. “고구려호태왕비에 고주몽이 북부여에서 나왔다.” ‘나라 초에 留記(유기)100권의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개국 초에 100권의 역사서가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삼국유사왕력조에도 고구려가 단군조선을 계승해왔음을 기록했다(鄒蒙壇君之子). 삼국유사에도 고조선조·북부여조·동부여조가 있으며 후한서』 「東夷列傳(동이열전)夫余(부여挹婁(읍루高句驪(고구려東沃沮(동옥저(三韓(삼한()에 관한 기록이 있다. 사라진 옛 고조선의 역사가 ()’. 고조선을 계승한 鮮卑(선비)()신분이 낮다·이란 뜻이다. 한나라의 국호를 짓는데 이렇게 나쁜 뜻으로 짓겠는가? 돌에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 ()=𡮁(). ‘내리쬐는 햇빛과 내리는 비를 막는 우산을 들고 있는 자형으로 내리다·계승하다라는 의미다. 碑石(비석)의 글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쓴다.

 

북부여는 단군조선이 망한 이후 건국된 나라고,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다. 초기 고구려 왕들의 성씨는 ()’ 씨다. 1대 고주몽은 성은 제욱 고양 씨의 성을 따서 高氏(고씨)이고, 이름은 朱蒙(주몽: 붉게물든이象解(상해: 해모습鄒牟(추모鄒牟 (추모中牟(중모都牟(도모)’. 解氏(해씨)()로 바꿨지만, 이름에 象解(상해: 해모습)가 있으니 高象解(고상해). ()를 높여 ()로 성씨로 삼아 하늘에 높은 해로 존중한 것이다. 2대 유리는 解明(해명)이고, 3대 대문신왕은 大解朱留王(대해주류왕: 큰 해가 붉도록 머물게 하는 왕)이고, 대무신왕의 아들 4대 민중 왕은 解色朱(해색주: 붉은해)이고, 5대 모본왕은 解憂(해우). ‘()’의 이두문이다.

 

견우의 상징인 소가 해와 신화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해의 상징인 삼족오를 고구려의 표상으로 삼았다. 신화 속에 역사가 있는 것은 신화가 역사이었기 때문이다. 신화는 오늘날로 보면 대중의 경전이다. 부여사의 비중이 이렇게 큼에도 우리 사학계는 고조선을 계승한 夫余史(부여사), 특히 북부여사는 아예 손을 놓고 있다. 강단사학에 의해 저술한 교과서를 가지고 배웠던 그간의 역사는 무엇인가?

 

1300년 전, 해동성국으로 칭송받던 발해는 사료의 부족으로 여전히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영토에서 세워진 황제의 나라다. 구당서에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대조영은 고구려에 붙은 말갈족이다는 신당서를 가지고 중국은 말갈인이라 주장한다.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글에 고구려 백제가 전성할 시기에 강병이 100만 명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후, 350만 고구려인은 그 땅에서 그대로 살았다. 이들이 발해를 건국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 빈번했던 조공무역을 근거로 중국은 발해가 중국의 속국이라 주장해왔다.

 

발해 무왕이 山東半島(산동반도)를 정복했는데, 발해가 중국의 속국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발해는 스스로 靺鞨(말갈)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 2004년 길림성 용두산에서 발굴된 발해 황후 묘비에 孝懿皇后(효의황후) 順穆皇后(수목황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왕비의 관도 고구려의 조우관과 같은 형식에 순목황후의 무덤도 고구려식 적석묘다. 皇后(황후)는 발해가 독자적인 皇帝(황제)의 나라라는 사료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 왕후의 묘를 발굴하지 않고, 한국 학자의 출입도 금하고 비밀로 하고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舊唐書(·구당서)백제 땅을 신라와 발해 말갈이 나누었다.” 양서백제는 다스리는 성을 고마라 하는데 이를 담로라 한다.” 양직공도(523~536)진나라 말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차지하고, 또한 백제는 요서 진평형을 차지했다(晉末駒麗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라고 기록했다. ()이 백제에 두었던 五都督府(5도독부)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곳은 웅진도독부와 신라의 계림도독부가 유일하다. 양직공도는 중국대륙에 백제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22담로는 오늘날 베트남까지 포함된다. 固麻(고마)’, 檐魯(담로)多勿(다물)처럼 의 이두문이다. 오늘날 조선족이 연변에 사는 것과 같이, 고조선은 망했어도 선조들은 그 땅에서 고조선 문화를 이어가며 살았다.

 

고구려인 설인귀는 당태종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선두에 섰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여러 무예서를 가져갔다. 그 속에 馬家鎗(마가창)도 있었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고조선의 무예서를 당나라가 가져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척계광은 이런 무예서를 기효신서에 수집하여 정리했다. 전쟁터에서 병장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무예는 강한 군인을 양성하고 무예문화와 스포츠 무예로 변모해 가고 있다. 기효신서는 동양무예서를 대표한다. 기효신서를 집대성할 당시는 1584년이다. 척계광이 창안한 鴛鴦陣(원앙진)도 남방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기존에 있었던 狼筅(낭선鎲鈀(당파長槍(장창籐牌(등패)’를 가지고 진법을 구성한 것뿐이다.

 

 

     모원의 武備志天符劍(천부검)

 

명나라 모원의(茅元儀)武備志(무비지)기효신서를 토대로 하고, 새로운 것을 수집하여 기록했다. 이때 조선세법도 기록하여, 천우신조로 天符劍(천부검)이 남게 되었다. 고무예서는 무예의 동작에 이름을 붙이고 동작은 시로 구성하여 설명했다. 기효신서에 기록된 권경勢名(세명)詩文(시문)을 분석하여 문화의 시원과 기법을 해독했다. 또한, 상나라 昭明(소명) 왕이 기록한 武備門(무비문)에서, 잃어버린 고조선의 무예인 각종 무기류와 조선의 수박(手搏), 전장에서 사용된 호신유술의 사료인 秘傳解法(비전해법)을 찾음으로써, 대동류의 신라 삼랑설이 허구가 아님을 반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琉球武備志(유구무비지)가 삼별초의 무예서임과 태껸의 술기와 같은 뿌리임을 밝혔다. 중국의 紀效新書(기효신서)에 의해 武藝圖譜通志(무예도보통지)의 정체성이 훼손되었던 역사를 반전시키고, 반세기 넘도록 일본무도에 의해 숨통 막혔던 한국 무예의 독자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역사의 시원도 반전시켰다.

 

기효신서에 수록된 권경 32는 중원에 전래됐던 맨손 무예를 수집한 문서이다. 중국의 태극권을 비롯한 여타 무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에서 계승되었던 권세는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권경속에 있었던 권법에 통합됐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권경은 중국무술이라 주장한다. 이런 탓에 무예도보통지권법手搏(수박)과 택견의 뿌리라고 주장하면 이를 믿지 못하고, 자학 사관에 빠져 오히려 중화 무술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과 무인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일 학자는 자국 무예의 주권과 무예 문화를 세워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문서를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있지만, 그들도 권경의 구성과 원문에 기록된 동작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문서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명확한 동작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해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 동양 무예의 영역을 크게 보면, 중국은 태극권·소림무술·영춘권을 중심으로, 일본은 '大東流柔術(대동류유술)에서 파생된 合氣道(합기도柔道(유도)琉球國(유구국)에서 전해 내려온 空手道(공수도)’를 중심으로 세계에 보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무예를 내세워야 할까? 바로 무예도보통지. 201710월 북한이 무예도보통지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렸다. 맨손 무예의 뿌리를 무예도보통지에 두면 한국무예의 가치는 중국·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역사적 가치와 품격을 갖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미군정에 의해 학교의 무도교육이 전면 폐지되었다. 1950년에 와서야 유도를 시작으로, 1958년 중학교는 유도·검도·스모, 고등학교는 유도와 검도가 격기(擊技)로 학교 체육 과목으로 부활한다. 20124월 일본 문부과학성은 학습지도요령을 개정해서 무도는 에도(江戶)시대부터 계승되어 온 일본 고유의 신체 활동문화이자 대인 운동이다.”라며 중등교육과정에 무도 교육(유도·검도·스모)을 필수교과목으로 지정했다. 학습지도요령의 해설에는 무도는 무기와 무술로부터 발생한 일본 고유의 문화로 설명하고 1993년부터 무도를 정식명칭으로 학교 체육으로 출발했다.

 

일본은 정체성과 관련된 문화는 ()’ 자로 개념화시켜 신도 사상을 넣었다. ‘무도·유도·합기도·검도·공수도·궁도·서도·다도는 천왕 중심의 神道(신도). 아베 총리가 요시다 쇼인 선생의 사상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라고 공언하는 것은 제국의 망령이 신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준비는 2006년 제1기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 때부터 평화헌법 개정과 집단자위권을 골자로 하는 극우파의 정치개혁 목적으로 교육기본법을 전면 개정했다. 중국은 () 자를 취하여 서법·다법이라 하고, 1990년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武藝(무예)武術(무술)로 개념화했다.

 

한국은 일제가 이식한 ()’자를 깊은 성찰 없이 수용한 결과, 오늘날 독자적 정체성을 세우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해방후 소전 손재형 선생이 눈치 채고, 1945년 해방공간으로부터 ()’자로 개념화하여, 書道(서도)書藝(서예)로 남북이 공동으로 바꿔 사용했다. 그 결과 武道(무도)武藝(무예), 茶道(다도)茶藝(다예), 劍道(검도)劍藝(검예), 弓道(궁도)射藝(사예)로 점차 바꿔가고 있다. 이처럼 글자 하나가 국가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개념은 또 다른 형태의 문화영토다. 한국무예계도 외래 무도 명을 버리지 못하면, 자주적 개념 독립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고조선의 무예를 계승

 

무예가 국가의 비밀이고, 가문의 비전인 시대는 지났다. 무예에서 정체성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겠는가? 무예 인문학 시대가 도래했다. 중국의 무술, 일본의 무도와 차별된 우리의 정체성이 담긴 개념이 바로 무예. 무예 속에 역사와 정체성이 있어야만 술기 속에 인문학을 담을 수 있고, 혼을 담을 수 있다. 고조선의 무예를 계승하면 우리 무예의 역사는 잃어버린 고조선과 연결된다. 이렇게 되면 한국무예는 중국과 일제의 망령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전통무예진흥법이 2008328일 제정된 지 14년이 흘렀지만, 오래전에 정착한 일본무도가 한국무예 종목의 대부분을 차지한 상태다. 고사 직전에 있는 전통무예는 길거리 공연문화로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정부 시책은 보여주기식 행정에 머물고, 오히려 외래무예를 지원 육성하고 있다. 대학교에 일본무도 학과는 있어도 전통무예 학과는 단 한 개도 없다. 일본을 반면교사로, 우리도 초··고등학교에서 체육 과목에 전통무예가 포함되도록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고무예를 연구하면서 훈련된 갑골문을 해석하는 것이, 뜻하지 않게 창힐문자와 천부경을 해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무예의 목적은 문자에서 동작을 찾는 데 있다. 자연히 명사보다는 동사적 개념을 한자에서 찾게 된다. 그동안 천부경에 대한 연구물은 명사를 중심으로 연구한 결과 반쪽 해석에 그쳤다. 천부경은 고조선 이래 무인들이 배워야 할 소양으로 선인들과 화랑들이 필수적으로 배웠다. 오늘날 무예는 기술과 기능적 관점에 매몰되어 그 속에 담긴 정신적 본질을 잊었다. 본국무예를 통해 무인 정신의 본질을 알리고자 서두에 천부경(. 天符經)을 소개한다... 이상 본국무예책 본문에서 가져옴...

 

 

[참고] 임성묵 저, 본국무예(本國武藝) *******[차례]*******

*****. 神國朝鮮(신국조선)

**1. ()의 나라

. 檀君(단군)歷史(역사). | . 半人半獸(반인반수)世界(세계)

**2. 天文(천문)北斗七星(북두칠성)

. 韓民族(한민족)七星信仰(칠성신앙) | . 北斗七(북두칠)構成(구성)秘密(비밀)

. ‘()’ 자에 담겨진 象徵(상징)과 한글 |

. 牽牛織女(견우직녀)玄武(현무)

. 五星翠樓(오성취루)天文(천문)으로 바라본 신라와 백제

*****. 文字(문자)始原(시원)朝鮮(조선)이다.

**1. 蒼頡文字(창힐문자)

. 蒼頡(창힐)鳥跡(조적)意味(의미) | . ()()의 관계

. 倉頡文字(창힐문자)北斗七星(북두칠성) | . 倉頡文字(창힐문자)解讀(해독)

. 이규보의 七月七日雨(칠월칠일우)

. 太上玄靈北斗夲命延生眞經注(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진경주)

**2. 鹿圖文字(녹도문자)

. 鹿圖(녹도)意味(의미)象徵(상징) | . 左右(좌우)象徵(상징)

**3. 加臨土(가림토) 문자

. ‘()’ 자의 意味(의미)

**4. 가림토의 원리는 ()’ 자다

. 가림토와 고대 그리스 악보용 기호와의 일치성

**5. 가림토 기호의 解說(해설)

. ‘은 견우 은 직녀 | . ‘의 기호 | . ‘ ’ 자형과 ‘ ’의 기호와 ’ | . ‘ · ’‘ · · ’의 기호 | . ‘ · · ’ 자의 기호 | . ‘ ’ 자와 자의 기호

**6. 鬪佃目(투전목)

. 鬪佃目(투전목)의 해독

*****. 天符經(천부경)

**1. 天符經(천부경), 高雲本(고운본)農隱本(농은본)

. 天符經(천부경), ‘()’ 자의 상징과 의미 | . ‘((()’의 상징

**2. 天符經(천부경)構成(구성)

**3. 天符經(천부경)解讀(해독)

. 一始無始(일시무시) | . 一新三極無盡夲(일신삼극무진본)

.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천일일지일이인일삼) | . 一積十鉅無匱从三(일적십거무궤종삼) .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천이삼지이삼인이삼) | . 大三合六生七八九(대삼합육생칠팔구) | . 運三四成玄五七(운삼사성현오칠) | . 一玅衍萬往萬來(일묘연만왕만래) . 用變不動夲(용변부동본) | . 夲心夲太陽(본심본태양) | . 昻朙人中天地一(앙명인중천지인) | .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

**4. ()의 실체를 찾아서

. 神風(신풍)風流(풍류) | . ‘()’𥛠()’ 자의 의미 | . (· )의 의미

*****. 武藝(무예)意味(의미)

**1. ()象徵(상징)

**2. ()()象徵(상징)

**3. ‘()’ 자에 담긴 象徵(상징)

**4. 武藝(무예)意味(의미)

**5. 고구려 고분벽화의 傳統武藝(전통무예)

. 騎射(기사騎槍(기창)(() | . 고구려의 角觝戱(각저희)手搏戱(수박희) | . 삼실총의 手搏舞(수박무)相撲(상박) | . 사라진 武人茶藝(무인다예)

**6. 高朝鮮(고조선)()

. 神劍(신검), ()() | . 劍訣(검결)歌訣(가결)大敍事詩(대서사시)

. 高句麗(고구려)雙手劍(쌍수검) | . 天府劍(천부검), 잊혀진 조선세법의 이름이여!

. 天符劍(천부검)方相示(방상시) | . 天府劍訣歌(천부검결가)

. 昆吾(곤오)洪帝(홍제) 桓雄(환웅)의 자손 | . 吾劍訣歌(곤오검결가)

*****. 朝鮮勢法(조선세법)

*****. 本國劍(본국검)

*****. 雙劍(쌍검)

*****. 잃어버린 朝鮮(조선)武藝書(무예서)

*****. 本國(본국)秘傳觧法(비전해법)抱勢(포세)

*****. 武備門(무비문)棍法(곤법棒法(봉법鎗法(창법)

*****十一. 夲國棍法(본국곤법)

*****十二. 夲國槍法(본국창법)

*****十三. 本國射藝(본국사예)

*****十四. 夲國拳(본국권)

*****十五. 夲國拳(본국권)의 실기 해제

*****十六. 武藝圖譜通志(무예도보통지)相撲(상박)

*****十七. 三別抄(삼별초)手搏(수박)

부록

 

[참고] [불교공뉴스] 손혜철 기자, 본국무예(本國武藝) 책 소개, 2022.

http://www.bzer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21886

[참고] 블로그 홍키호테,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보도자료

https://blog.naver.com/casj007/222791133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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