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__드론. 글치기 세대. 모택동 주자파 숙청. 문화대혁명

=

633__드론, 글치기 세대. 모택동 주자파 숙청 홍오류 흑오류 갈라치기 신분 세습 문화대혁명---10ok

뚱보강사 이기성

 

 

    633__드론. 글치기 세대. 모택동 주자파 숙청. 문화대혁명

 

 

1인칭시점(FPV) 무선 비행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북한 무인기에 대응할 방법이 딱히 없다면, 그냥 충각을 달고 들이받으면 된다. FPV(First Person View)는 영상 송수신 장치를 통해 사용자가 해당 장소에 가지 않아도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1인칭 시점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주로 RC, 드론 등에 사용하며 고글을 통해 더욱 현실감 넘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RC(Radio Control)는 전파나 적외선을 이용하여, 일정 범위 내에서 원격으로 조종하는 완구이다. 충각은 선박의 선수와 선미에 장착하여 적 선박과 충돌할 시 상대 선박을 부수는 데 쓰인 무기이다. [페친] 유재일 디지털 크리에이터가 글을 올렸다. FPV 드론병 병과를 만들어서 훈련시키면, 시속 100km 짜리 충각으로 충분히 가능하고, 북한 무인기보다 월등한 출력으로 개발해서 그물포획도 가능하다고 본다. 무선 비행기 동호회에만 물어봐도 저거 잡는 것은 일도 아닌데. 근접해서 쇠구슬만 뿌려도 프로펠러 다 부술 수 있는데... 지금부터라도 대응방법이 대칭적으로 이뤄졌으면 하네요.

 

[페친] 이종호님도 한 말씀... 정찰드론 예산 141억 중 140억 삭감한 민주당... 2017년부터 드론 훈련 올 스톱하고, 군대 개판 만든 문재인... 니들이 북한 무인기 대응을 비판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 20221227, <<기적의 3분토론 공감>>의 저자 김석수님도 [페북]에 한 말씀... 군이 방금 속보로, 어제 드론을 격추시키지 못해 송구하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럴 필요 없다. 그간 정신무장해제 당한 군이니 그럴 수 있다. 지금 군을 질타하는 목소리는 우리 내부 자중지란을 일으키려는 김정은 심리전에 말려드는 꼴이다. 두루미 크기의 드론을 격추시킨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이 드론을 보내면 격추시켜야 한다는 데 머물지 말고, 우리도 북한으로 드론을 날려 보내면 된다. 정찰드론이 날아오면 똑같이 평양에도 정찰드론 보내고, 공격드론이 날아오면 우리도 공격드론으로 대응하면 된다. 쿨하게 대응해야 오히려 상대가 당황하는 법이다...

 

 

     글쓰기 세대와 글치기 세대

 

글을 쓰는 세대(글쓰기 세대)와 글을 치는 세대(글치기 세대)가 갈라진 것은 1980년대 TRS-80 PC, 애플II 등 개인용컴퓨터(PC)가 나오고부터이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아직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글이 죽었다고 한탄을 한다. 글을 쓰기만 하는(펜이나 연필로) 아날로그 시대에서, 글을 치는(자판을 두드리는) 디지털 시대로 들어오고, 이제는 글을 치고 글을 쓰는 아나털(아날로그-디지털) 시대로 변화 발전한지 한참 되었는데...

 

[경남도민신문]아침을 열며- 문자의 죽음이란 제목이 눈에 띈다. 글쓴이는 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이다(20221219). 이젠 거의 아무도문자(글을) 읽지 않게 되었다. 읽지 않다 보니, 쓰지도 않게 되었다. 물론 읽기도 쓰기도 0은 아니다. 지금도 엄청난 책들이 시중에 쏟아져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책이라고, 글이라고, 다 글은 아니다. 좀 과장하자면, 없느니만 못한 것들이 거의 태반이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그걸 읽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 ‘읽지 않음은 우리시대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이 이라는 것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이었던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세태를 문자의 죽음(글의 죽음)’이라고 인식하는 게 절대 과장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낌새가 좀 수상하기는 했다. 문자의 콜록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블로그라는 것이 유행하다가 슬그머니 퇴조하더니, 요상한 축약어와 함께 트위터라는 짧은 글이 그것을 대체했고, 페이스북이라는 것이 사진/영상과 함께 등장하더니 문자는 보조역할로 위축되었다. 한편에서는 유튜브와 틱톡의 영상들이 막강한 권력자로 등극했다. 대세인 스마트폰에서도 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 1990년대 저 프랑스의 데리다가 에크리튀르그라마톨로지니 하는 말로 소위 문자언어음성언어에 대해 변호하고 강조한 것도, 어쩌면 그가 그 문자언어의 몰락을 예감한 역설적 징조였는지도 모른다.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문의 퇴조도 영상언어가 전횡하는 이런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출판업의 쇠락도 마찬가지다. ‘독서라고 하는 인간의 문화적 행위가 석양처럼 저물어간다. 아니 이미 저물었다. 지금은 바야흐로 언어의 밤이다.

 

우리 시대는 과연 다음 시대를 염려하고 있는 것일까?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다음 시대는 우리가 없을 테니 상관없는 것일까? 천만에. 다음 시대엔 우리의 자식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물어보든 자식들은 대개 자기 자신보다 더욱 소중하다고 답한다. 그 아이들의 시대가 지금보다 그리고 과거보다 더 못하다면 누군들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마오()의 통치 기술

 

오종문님이 [페북]마오(, 모택동)의 통치 기술, 너희는 서로 미워하라! 나는 재미 본다!” 글을 올렸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예수님과 정반대로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서로 미워하고 죽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우리 사는 이 사회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반목, 기성세대와 젊은 층의 갈등, .서 갈등 지역감정, 남녀혐오, 동성애 찬성과 반대, 반미와 친미... 이런 사회 갈등들이 극으로 치닫는 현상을 바라보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칼 맑스,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중공의 마오져뚱, 북한의 김일성, 그리고 그들을 존경하며 따르는 자들... 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는, 단연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평생 죽는 날까지 철권을 휘두른 독재자 마오져뚱(모택동, 1893~1976)이다. 마오! 1949년 중국을 세운 뒤 1976년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군권(军权)을 놓지 않고 중국을 주물렀던 인물! 마오져뚱의 통치 기술은 인민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 틈을 타서 자신은 정권을 잡고 심판자 위치에 서서 정권을 유지한다.

 

--- 마오져뚱의 갈라치기 = 서로 싸움붙이기... 단계: 일반 인민과 인민 싸움 붙이기. 인민들 가운데 지주와 자본가를 빈농과 노동자의 적으로 규정하고 악한 자로 몰아 죽인다. 그리고 자신이 이끄는 공산당이 정의의 간판을 들고서 사유재산을 폐지시키고, 모든 토지와 자본을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 단계: 어린 학생들과 고위 공산당원 싸움 붙이기, 공산당원과 공산당원 서로 싸움 붙이기, 모든 인민 서로 싸움 붙이기.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1) 사유재산이 없어지자 생산성이 급락, 전국에 4500만 명 이상의 아사자(饿死者)가 나온다. 2) 초창기에 공평하게 토지를 나누어주었어도, 불과 몇 년 만에 다시 빈농과 부농 현상이 저절로 발생. 3) 일부 공산당원들이 부패하고, 공산당원들의 권력이 비대해져서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 이에 마오져뚱은 그 모든 책임을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일부라도 도입하자는 공산당원들인 '주자파(走资派, 자본주의를 향해서 달려가는 무리들)'에게로 돌렸다. 많은 사람들을 주자파로 몰아 대규모로 숙청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1966~1976)이다.

 

 

     교수, 선생님들 홍위병들에게 맞아죽다

 

--- 문화대혁명... 이 때 1020대 젊고 철없는 학생 홍위병들을 선동해서, 나이 많은 고위 공산당원들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다시 중공 인민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든 것! 먼저 입 바른말 하고 글을 써대는 지식분자들이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마오()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이

인민의 적으로 몰렸다. 베이징대 교수들과 베이징 시내 중학교 교장 선생들부터 홍위병들에게 맞아죽었다. 중국 대학은 10년 동안 문을 닫았다. 졸업생들을 배출하지 못했다. 중국 의대에서는 10년 이상 의사를 길러내지 못했다. 환자가 병원에 오면, 의사가 없으니 병원 수위가 배를 갈라 수술하기도 했다. 그러다 수많은 인민들이 죽어나갔다. 희생자들의 숫자는 대략 300~700만 명으로 추정된다!

 

--- 홍오류(红五类)와 흑오류(黑五类)로 구분하기... 가난한 놈과 부자 놈,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갈라치기... 책이나 읽는 지식인들아! 너희들이 무산계급의 고생을 알기나 하느냐? 그러면서 대학교수는 도로공사장으로, 의사는 황무지 농장으로, 바이얼리니스트는 탄광으로 보내졌다. 그 다음은 인민들끼리도, 또 그 자식들끼리도 서로 싸우도록 싸움을 붙인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보자면... 모든 인민들 신분을 홍오류(红五类)와 흑오류(黑五类)로 나눈다. 홍오류(红五类)란 혁명군인, 혁명간부, 노동자, 빈농, 중간 이하의 가난한 농민이었고, 흑오류(黑五类)란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나쁜 놈, 우파였다. 홍오류(红五类)와 흑오류(黑五类)로 나뉜 인민들은 또다시 서로 물고 뜯고 싸웠다. 싸우다 죽이고 죽었다. 그리고 홍오류(红五类)와 흑오류(黑五类)로 구분된 신분은 세습되어야 한단다! 이것이 당시 중국 사회에서 정의와 불의를 나누는 기준이었다.

 

이렇게 신분을 갈라놓으니, 인민들이 서로 잘도 싸우는데, 대를 물려가며 싸웠다. 학교 교실 안에서도, 한 동네에서도, 한 직장 안에서도, 인민들은 서로 옆 사람을 향해서 공격했다. 이렇게 인간의 심리에 내재해 있는 미움을 정치에 이용해 먹는 것이 마오져뚱 통치기술의 핵심이다.

 

다음 단계... 단계: 너희들은 서로 미워해! 모든 인민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마오는 절대 권력을 누리면서, 심판자 위치에 서서 정의로움을 과시했다. 홍위병들의 세력이 커나가고 사회문제가 심각해지자, 마오는 홍위병들에게 "썅샨쌰샹(上山下乡)"을 명한다. 모든 학교는 무기한 휴교하고, 홍위병들은 시골 오지 깊은 산골로 들어가, 황무지를 개간하라! 마오교(毛教)에 심취해있던 홍위병들은 끽소리도 못하고, 모두 산골오지로 들어갔다. 마오는 그렇게 홍위병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다.

 

--- 인민들 싸움 붙이고, 그 와중에 뒤에서 권력 잡은 놈이 누구지? 뒤로 은밀히 재미 보는 놈들이 누구지?...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우리나라 국민들의 갈등 배후에 그 웃는 놈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마오()를 존경하고, 닮고 싶은 놈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마오() 사후 미국으로 망명한 마오의 주치의 리즈수이가 폭로한 책 <<마오져똥(毛泽东)의 사생활>>을 고려원에서 출판했다.

 

<<모택동의 사생활>>, 저자 리즈수이’, 역자 손풍삼, 고려원, 1995.

22년간 모택동의 주치의로 일했던 저자가 그간의 일기를 바탕으로 밝힌 모택동의 실체. 여성 편력, 인간적 면모 등 사생활과 내면세계를 생생히 전하고 있다. 저자 리즈수이(李志綏)1919년 베이징 태생. 증조부가 중국 황제의 주치의를 지낸 바 있는 훌륭한 의사 가문 출신이다. 서부 중국 유니온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시드니에서 체류하던 중, 1950년 공산당의 부름을 받고 중국에 돌아와 마오쩌둥의 측근들을 진료하는 의료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1954년부터 마오쩌둥의 사망 시기인 1976년까지 22년 간 마오의 주치의로 일하면서 두터운 신임을 얻어,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겸 상담자로 지내 왔다. 그는 마오의 독재 정치에 희생된 수많은 영혼과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진실을 밝히고자 이 글을 썼다고 말한다. 1988년 시카고로 이민해서 살고 있다.

 

<<모택동의 사생활>> *******목차*******

옮긴이의 말, 저자의 말

*****1毛澤東의 죽음

1장 마오의 죽음

*****219491957

2장 붉은 이상을 품고

3장 혁명의 심장부에 첫발을 내딛다

4장 주치의로 부름을 받다

5장 마오 주석과의 첫 만남

6장 심야의 대화

7장 황제를 위한 댄스 파티

8장 임포텐츠를 호소해 오다

9장 마오의 신경 쇠약 증세

10장 흐루시초프와 주 더는 믿을 수 없어!

(이하생략)

*****319571965

20장 백화제방·백가쟁명의 올가미

21장 반우익 운동의 진의

연 보

 

[참고] 유재일 디지털 크리에이터

https://www.facebook.com/yoo.charlie

[참고] 이종호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11139906215

https://www.facebook.com/photo?fbid=1799123967135583&set=a.1286011575113494

[참고] 김석수, 기적의 3분토론 공감 저자. 2022-12-27.

https://www.facebook.com/seogsu

[참고] [경남도민신문]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2022-12-19.

http://www.gn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37122&fbclid=IwAR0A4-JlD2ZfjICB31auYoHY32ME8W6-IyVNRtEm9a4Crqkd7TGc9ad0q-0#0BNb

[참고] 오종문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662355876

https://www.facebook.com/photo?fbid=5257012664364093&set=pcb.5256972744368085

[참고] 고려원 <<모택동의 사생활>> -1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8735

<<모택동의 사생활>> -2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8736

 

---


    ---오종문 <세뇌(洗脑)교육에 대하여> - 2 -

    2. 인자하신 할머니 교수님과 책거리 파티 

    오종문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662355876

     한 학기 동안 할머니 교수님께서 강의하시는 도중에 교수님은 자신의 인생역정을 군데군데 드러내셨다. 이 분은 두 고비의 험산 준령을 넘어오신 분이시다. 인민대약진운동(人民大跃进运动, 1958-1962) 시기에 소녀시절을 보냈고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1976) 시기에 청년기를 보내셨으니 중국 근대사의 살아있는 증인이시다.  
    그 배고파서 수천 만 명이 굶어죽던 시절,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두 영양실조로 허덕이던 깜깜했던 그 고통의 시기 대약진운동(大跃进运动)을 넘어갔더니 몇 년 후 수백 만 명을 때려죽이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밀어닥쳤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교수님은 그 옛날 자신이 겪은 중국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교수님은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1976) 당시 중국 대학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리얼하게 설명해주셨다. 
    그 당시 마오주석(毛主席)은 모든 대학생들에게 인민의 태양이셨단다. 중학생(한국의 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은 모두 마오주석(毛主席)과 중국의 붉은 정권을 지키는 홍위병(红卫兵)이 되기를 자청했다. 홍위병(红卫兵)들은 자본주의를 향하여 달려가는 사악한 자들인 주자파(走资派)들과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집단이라고 스스로들 생각하고 있었다. 
    홍위병(红卫兵)들은 팔에다 빨간 완장 하나 차고 손에 몽둥이를 들고 길거리에서 무엇이든지 낡은 것들을 다 때려부쉈다. 길거리의 낡은 간판부터 때려부쉈다. 
    이른바 포쓰죠(破四旧)운동이었다. 네 가지의 낡은 것 곧 구사상(旧思想)、구문화(旧文化)、구풍속(旧风俗)、구습관(旧习惯)을 때려부수고 새로운 중국을 세운다는 운동이었다. 구사상(旧思想)을 담고있는 낡은 고서(古书)들은 불태워졌고 옛날 절간들은 파괴되었다. 절간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회당, 천주교회당, 이슬람 사원(寺院) 등도 파괴되었다. 모든 종교는 아편이었다. 
    낡은 것들을 쌓아놓는 곳이 있다. 바로 박물관이다. 박물관 안의 골동품들이 홍위병(红卫兵)들의 몽둥이에 박살이 났다. 
    낡은 사상을 가진 대학 교수들 중학교(한국의 중고등학교) 교사들도 수난을 당했다. 길거리 시위 집회에서 자기 학교 교장선생님을 공개적으로 때려죽였다. 홍위병(红卫兵)들이 현장(县长) 찾아가서 행패를 부려도 말릴 사람이 없었다. 
    국가 주석 류샤오치 집에 들이닥쳐 류샤오치를 주자파(走资派, 자본주의를 향하여 달려가는 놈)라면서 마오주석 어록집 '샤오홍슈(小红书)'로 때렸다. 덩샤오핑의 집에 쳐들어가서 덩샤오핑의 아들을 들들 볶았다. "네 아비가 주자파임을 인정해라."  견딜 수 없어 그 아들이 2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다쳐 평생 불구가 되었다.  마오주석께서 이 모든 혁명은 무죄이며 반란에는 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거밍우~죄 짜오판요우리(革命无罪, 造反有理)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홍위병(红卫兵)들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것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길거리에 새로 유행하는 파마 머리를 한 여성이나 잘 닦은 새 가죽구두를 신은 남성은 다니지를 못했다. 그런 것은 사회주의의 원수인 자본주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홍위병(红卫兵)들에게 신발을 빼앗기고 머리채를 잡히는  봉변을 당했다. 
    동네에서 조금만 있어 보이는 집이면 홍위병들이 찾아가서 그 집 세간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었고 반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맞아죽었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홍위병(红卫兵)들은 여러 파벌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당시 홍위병들은 몽둥이 뿐 아니라 총기를 가진 친구들도 꽤나 있었다. 그들은 각 대학교에서 ~전투대(战斗队)라는 이름을 걸고 자신들이야말로 마오져뚱 주석(毛泽东主席)을 보위하며 마오주석(毛主席)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들이라 여겼고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학교 홍위병(红卫兵)들을 멍청이 '훈딴(混蛋)'이라 부르며 패싸움을 벌였다. 그렇게 죽어나간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어린 홍위병(红卫兵)들은 심지어 인민해방군부대 정문에 찾아가서 장군 나오라고 큰소리 땅땅 쳤다. 

    그러자 온 중국이 혼란에 빠져들었고 마침내 마오주석(毛主席)은 홍위병(红卫兵)들에게 쌰빵(下放)을 명하셨다. 쌰빵(下放)이란 곧 황무지 개간을 위해서 산에 들어가 개척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살라는 '썅쌴샤썅(上山下乡)'이었다. 

    그래서 많은 홍위병(红卫兵)들이 험한 산에 올라 그곳을 개간하다가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으로 죽어갔단다. 그 때 동북지역의 넓고 큰 황무지 베이따황(北大荒)이 개간 되었고 운남(云南)과 귀주(贵州) 사천(四川)의 수많은 산간 지역도 개간되었단다. 그러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고생했고 죽어갔다. 
    후에 마오져뚱(毛泽东)이 1976년에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쌰빵(下放)당했던 젊은 지식인들이 하나 둘 도시로 돌아왔다. 그들을 가리켜서 청년지식인들, 라오쯔칭(老知青)이라 한다. 여기에서 라오(老)라는 글자는 늙었다는 뜻보다 친근함을 드러낸다.  이제는 중국 전역에 걸쳐 라오쯔칭(老知青)이라는 간판의 식당 호텔 서점등이 많이 있다. 그런 간판을 내 걸었던 창업자들은 대부분 문화대혁명 시기(文革时期)에 쌰빵(下放)당했던 지식청년들이다.  

    ======
    <세뇌(洗脑)교육에 대하여> - 2 -
    2. 인자하신 할머니 교수님과 책거리 파티 
    중국어 공부가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고급반 과정에 접어들면서 부터이다. 남들은 초급반 때는 실력이 늘다가 중급반부터 실력이 정체된다는데 필자는 오히려 고급반으로 가면 갈수록 공부에 빠져들어갔다. 
    고급반은 배우는 학생들이 적고 수준들은 높아서 일반 20~30대 젊은 라오스(老师)들보다는 운남대(云南大学)나 운남사범대(云南师范大学) 인문계를 은퇴한 노교수들이 한 학기씩 맡아서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업시간에 정해진 교재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신문이나 잡지를 읽어가면서 배우는 칸빠오즈반(看报子班)에 속하면 교재를 학생들이 교수님과 상의해서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시간에는 중국의 역사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교육 환경 모든 분야에서 중국 지성인들의 거침없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그 고급반 강의들이 제일 재미있었다.  
    오늘 소개할 교수님은 운남대를 은퇴하신 할머니 교수님이시다. 그 교수님 성함은 짜오홍(赵虹, 물론 가명이다), 첫 인상이 인자하신 할머니 그 자체이시다. 활짝 웃는 얼굴에 세월의 흔적으로 남은 주름살마저도 매력적이셨다. 인문계 어문학 계통으로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시다. 학생들의 질문들을 금방 이해하셨고 명쾌하게 설명해주셨다.   

    그 교수님 강의에는 특별한 교재를 정해놓지 않고 신문 잡지 인터넷에 올라온 여러 가지 잡다한 소식들을 주제로 학생들이 먼저 예습해서 발표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그 당시는 기능이 좋은 전자사전이 많지 않아서 희귀한 글자 하나 만나면 고려대학교출판사에서 나온 두꺼운 사전을 뒤적거리면서 그 글자를 찾는데 10분 20분도 넘게 걸리던 시절이었다. 
    중국어 전체에 글자가 총 몇 자나 될까? 중국인들도 아는 사람이 없다. 학자에 따라서 글자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정해야 하는 기준이 다른데 그런 글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기를 중국어 글자가 대략 30,000 자(字)나 된단다. 그 중에 약 반절 가량 되는 15,000 자(字)는 인명(人名)이나 지명(地名)이나 고문(古文)에서나 나오는 글자들이고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나머지 많이 쓰이는 글자 15,000자 가운데 소학교 6년 교육 과정에서 약 5,000자(字) 배우고 추쫑(初中) 3년 과정에서 약 5,000자(字) 배우고 까오쫑(高中) 3년 과정에서 또 약 5,000자(字) 배운다. 그래서 중국에서 소학교 6년 과정 마치고 나와도 신문을 자유롭게 읽기는 어렵다. 이것이 중국어가 가진 특색이자 단점이다. 

    우리 외국인 유학생들이 신문 잡지나 고문(古文)을 공부할 때 잘 쓰이지 않는 글자를 만나 막히면 난감하다. 그 글자를 어떻게 읽는지 알아야 사전을 찾아서 그 뜻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그 발음을 모른다. 그래서 부수를 찾고 총획수를 찾아 어렵사리 번역하면 그 다음에는 4가지 성조(声调)에 따라 반복해서 읽는 연습을 해야 다음날 수업 시간에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이야기가 곁길로 새나갔으니 다시 할머니 교수님 이야기로 돌아가자. 한 학기 동안 할머니 교수님께서 강의하시는 도중에 교수님은 자신의 인생역정을 군데군데 드러내셨다. 이 분은 두 고비의 험산 준령을 넘어오신 분이시다. 인민대약진운동(人民大跃进运动, 1958-1962) 시기에 소녀시절을 보냈고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1976) 시기에 청년기를 보내셨으니 중국 근대사의 살아있는 증인이시다.  
    =======

1,132개의 글

    글 번호제목작성자작성일조회
    공지 관리자11.09.16122
    1132뚱보강사24.04.1857
    1131뚱보강사24.04.1790
    1130뚱보강사24.04.1679
    1129뚱보강사24.04.15189
    1128뚱보강사24.04.12112
    1127뚱보강사24.04.06173
    1126뚱보강사24.04.05251
    1125뚱보강사24.04.04144
    1124뚱보강사24.04.04129
    1123뚱보강사24.04.02163
    화살표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