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__동이족과 서량지 교수와 조공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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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__동이족과 서량지교수와 조공사기---9

뚱보강사 이기성

 

225__동이족과 서량지 교수와 조공 사기

 

미국의 대표적 심리치료사이자 영성 및 자기 계발 분야의 대표적인 루이스 헤이말을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인생을 즐기고 살고 싶으면, 즐거운 생각을 해야 한다.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성공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랑하며 살고 싶으면, 사랑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거나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한국 속담에도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고. 실제 낙관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일이 잘 풀리는 경우도 많다.

 

일본에선 거짓말을 많이 하면 진짜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독도 문제도 그렇고, 위안부 문제도 그렇고 비록 아베 정권뿐 아니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 승자가 유리하게 조작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조작된 것을 알면서도 그런 기록을 실제 역사로 믿는 사람들은 어찌 된 일인가? ‘한국 감사원까지도 4세기 한반도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없었다고 알고 있다니. 20201017일자 <이덕일 역사 TV>국립중앙박물관 가야사 왜곡 공익감사청구 회신이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일본이 만든 식민사관으로 한국역사 가야사를 왜곡하였다는 것. 중국 당국은 동북공정에서 동이족이 한국 한민족(韓民族)의 조상이 아니라 중국 한족(漢族)의 조상이라고 우기고 있다.

 

요즈음 미국의 심한 견제를 받는 중국도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면서 한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 일부라고 조작을 하고 있지만, 한족이 세운 통일왕국은 진, , , (, , , )밖에는 없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몽골인 선비족, 송나라는 터키인 사타족, 원나라는 몽골인, 청은 만주 여진인이 건국. 송나라 조광윤은 터키인(돌궐인)이지만 한인의 지지를 얻으려 스스로 한인이라 주장했을 뿐이다. 중국의 통일왕조는 > > > > > >>>이다.

 

김영님의 <민족과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신 김용섭 선생님을 기리며> 글을 인용한다. 소생은 70 학번으로 연대에 다니다 해병대를 제대하고, 1975년 서울대 사학과를 떠나 연세대 사학과로 오신 김용섭 선생님(이하 '선생님'으로 줄임)을 만났다. 선생님의 학문적 목표는 식민사관의 정체성이론과 타율성이론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의 자율적 내재적 발전논리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성제대에 뿌리내린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의 영향을 받은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서울대 사학과에서는 이런 작업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선배 교수들이 노골적으로 "민족사학을 그만하라"라고 협박하거나, 이병도처럼 일본 천리대학에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회유를 했다. (김용섭 회고록 역사의 오솔길을 걸으며(770~771). 선생님은 당시 그곳에서는 도저히 식민사학의 극복작업은 힘들다고 판단하고, 연탄가스 사고로 별세한 민족사학자 홍이섭 교수의 후임으로 연세대에 부임하셨다.

 

우리는 구세주를 만난 것이었다. 한국근대사를 지배사적 시각이나 정태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기층 민중인 농민의 입장에서 동태적으로 해명하시는 선생님의 강의는 유신체제와 군부독재 하에서 괴로워하던 우리들에게는 가문 날에 시원한 소나기를 만난 격이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나면 가슴이 뿌듯했고, 진리와 정의에 대한 용기가 솟아올랐다. 계속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에게는 학자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사회변혁 운동을 하려는 학생들에게는 친애민중적 시각을 고취해주셨다.

 

소생은 전공이 한국사학이 아닌 한국문학이었지만 국문학을 민족문학사적 시각과 민중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역사적 안목을 가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의 학문적 영향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학문은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만 실증적 자료와 논리에 근거해야 하며, 치열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실제로 1365일을 연구실에 나오셔서 연구하셨고, 우리 제자들의 질문과 고민을 언제나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이러한 학문적 열정과 제자 사랑이 쌓여 '김용섭 신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댓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지 역사라는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일연스님이 본 지도라든가 그 당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사군은 북한 평양지역이 아닌 요동반도에 있었다.”라고 잘라 말했다. 서울대학 국사학과, 연세대, 고려대 역사학 출신 교수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역사학회가 한국고대사학회다. 이 집단이 사실상 우리 고대사를 쓰고 있고, 국사 교과서도 이들의 입김으로 집필된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 한나라 식민기관 한사군이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포진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 역사의 시작부터 고대사까지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 이들 역사학의 뿌리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두고 우리나라 역사를 가짜로 써서 퍼뜨렸다. 일제 침략자의 눈으로 쓴 역사다. 정상일 리가 없다. 더구나 식민통치 수단으로 역사를 썼기 때문에 이들이 쓴 우리 역사는 일본제국의 한 지방사 수준으로 추락했다. 일본 역사보다 긴 단군을 그래서 전설이니 하며 역사가 아니라고 일본 학자들이 부정했다.

 

최승철님의 글. 도올 김용옥(2020.10.06.), ‘식민사관으로 우리 역사 보면 안 돼’. 도올 김용옥 선생은 <삼국유사>를 객관적으로 보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역사는 진짜 역사가 아니라고 외쳤다. 한마디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지 역사라는 것이다. 그는 그 당시 일연스님이 본 지도라든가 그 당시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사군은 북한 평양지역이 아닌 요동반도에 있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일본학자 고꾜야스히꼬(吾鄕淸彦)의 기록을 보면,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3국시대 동이족이 지배했던 동북아시아 지도 첨부). 이 지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는 물론 당시 동이족이 동북아시아 전체를 지배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다. 이에 놀란 중국 사회주의 당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에서 동이족(桓檀族)이 한민족(韓民族)의 조상이 아니라 한족(漢族;支那族) 조상이라고, 왜놈의 역사왜곡보다 더욱 극심한 중국식 역사왜곡을 진행 중에 있다.

 

오소운 목사

그러나 아무리 가랑잎으로 해를 가리는 식의 치졸한 방식으로 저놈들이 왜곡 역사를 만든다고 해도, 저놈들의 추악한 욕심만 드러낼 뿐, 역사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에 필자(오소운)는 세계 석학들의 논문 중에서 동이족이 우리민족의 조상임을 고증한 글과 그들의 업적을 모아 여기 올림으로써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바이다.

 

1. 서량지(徐亮之) 교수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10월초판)에서 이렇게 썼다. “4천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族)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漢族;支那族)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과 주()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東夷)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 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서량지 교수는 또 이렇게 썼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달력)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나라, ()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호수(天海)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 신농씨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 장개석(蔣介石) 총통

중국 총통 장개석(1887-1995)이 이시형 상해 임시정부 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나의 고향이 옛날 백제(요서지방;대륙백제) 땅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 이시형은 속이 상했다.

 

3. 임어당(林語堂)

중국의 석학이요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임어당(1895-1976)을 만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1902-1999) 박사 사이에 이런 말이 오갔다 한다.

(안호상)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는 한글전용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임어당)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 조상이 만든 문자를 우리가 빌려 쓰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무안을 당한 안호상은 이후 평생을 민족사관에 매진했으나 거대한 한단고기(桓檀古紀) 고대역사를 복원하지는 못했다.

 

4. 왕동령(王棟齡)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중국사(中國史)에서 이렇게 썼다.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 묘족(苗族:東夷族)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묘족(苗族)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인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桓檀族)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蚩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史記, 五帝本紀>.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그는 이런 글도 썼다. “4천 년 전 (중략)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에는 이미 묘족(苗族;東夷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묘족(苗族)은 오늘날 현재 중국변방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묘족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치우천황을 칭송하는 정통 구전가요가 올라 있어 원문과 함께 기술한다. <蚩尤挽歌> [묘족전통 구전가요(苗族傳統 口傳歌謠)]

千古奇才 橫空賢(천고기재 횡공현)

만고기재 하늘가른 현자이라네

可堪幷論 炎皇間(가담병론 염황간)

염제황제 둘과라도 어찌비하랴.

五兵刑法 君始点(오병형법 군시점)

오졸형법 임금친히 보살피시니

九黎生氣 衝云天(구려생기 충운천)

구려백성 사기충천 높이려했네.

席卷中原 華夏聯(석권중원 화하련)

화하연맹 중원땅을 쳐서이기니

血染江河 五千年(혈염강하 오천년)

오천년의 황화강물 피로물드네.

英名不因 涿鹿敗(영명불인 탁록패)

탁록패배 아닌것을 영웅이름만

老黑石山 百花宣(노흑석산 백화선)

흑석산의 백가지꽃 증언하누나.

 

<예기(禮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묘족은 구려(九黎)의 후예다.

구려를 묘() 민족의 선조로 삼고 있다.” (苗九黎之後 九黎爲苗民先祖)-<禮記>

 

5. 임혜상(林惠詳) 교수

홍콩대학의 임혜상(林惠詳) 교수는 그의 저서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맹자가 말하기를()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임금은 은()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족인데 동방에서 흥하고 왕성(興起)하였다."

 

6. 양관(楊寬)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은 그의 저서고사변(古史辯), 1927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현조(玄鳥)는 은()나라 사람과 동이(東夷)의 조상신이다.” (玄鳥是殷人東夷的祖先神.)

 

또 같은 책 상편에서는 동이족은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 태호(太昊), 제준(帝俊), 제곡(), 제순(帝舜), 소호(小昊), 그리고 설()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7. 노간(勞幹)

대만학자 노간(勞幹)<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중한관계론약(中韓關係論略)>에서 이렇게 주창한다. “우리들은 동방(東方)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자와 인()자는 통용된다. ()자와 인()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먼저 ()을 사용하였다고 하면 후대에 와서 서방에서 기원한 부족들이 이를 빌어 전 인류의 명사로 쓴 것이다.

 

만일 이()가 먼저 문화를 이루어 앞서 나갔다면, 이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사람 인()자는 전 인류적인 이름에 들 것이다.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려 쓴 것이다.”

 

8. 필장박(畢長樸)

중국의 학자 필장박은 중국인종북래설(中國人種北來說)에서 중국의 고대 문헌, 고고학적 유물, 언어적 특성, 인류학적 특성, 민속 문화적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중국 인종의 시원(始原)이 북방의 시베리아 일대와 동북아 쪽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필장박은 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而係遠始于寒的北方.)

 

9. 고꾜 야스히꼬(吾鄕淸彦)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 이렇게 썼다.

사마천의 사기(史記)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지나(支那;中國)가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변조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10. 유 엠 부찐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이렇게 썼다.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라나 주()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11. 시로코고르프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중국사(中國史)에서 이렇게 썼다.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강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이상과 같이 외국의 역사학자, 특히 중국의 역사학자들 까지도

중국대륙은 수천년 동안 동이족(東夷族;桓檀族)이 지배해 오다가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후, 지나족(支那族;漢族)이 탁록에서 치우천황(蚩尤天皇)과 싸우기 전후에 중국대륙 강회(江淮)지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 실사(實史)가 한단고기(桓檀古紀)에도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해방 후 친일식민사관 역사학자 이병도와 그의 문하 사학자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오히려 반도사관만 주창하며 일본의 침략사관의 주구(奏狗)노릇을 해 왔었다.

 

동이족(桓檀族)은 분명히 천산, 천해(바이칼호)와 중국대륙, 사라센까지 12칸국(桓國)을 건설-통치-지배했던 한단고기(桓檀古紀)의 민족역사를 가지고 왔건만, 이를 부정하는 친일식민사관 사학자들 때문에 그 활동무대가 한 반도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고대 역사를 다시 찾아 우리 선조들의 기상을 온 세계에 알려주자. 지금의 "한류" 처럼 말이다.

 

이 글을 처음 쓴 "오소운" 목사도 이렇게 끝을 맺었다. "대륙을 지배했던 민족역사가 분명 존재 하건만, 백제가 대륙을 지배했다고 지나족(한족) 학자들이 증언해 계속되어 왔건만, 이 모든 사실에 눈감고 귀닫고 친일반도사관만 짖어대는 패당 사학자들...., 치우천황은 있지도 않는 인물이라고 개짓듯이 하다가 실존인물로 밝혀지자 "동이족(환단족)의 원래의 뜻이 지나족이 존경의 뜻을 담아 부르던 칭호였는데 이것이 어느 순간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 됐으니 우리는 동이족이 아니다. 동이족은 우리민족이 아니다." 헛소리로 우기는 역적패당사학자들.

 

신채호 선생을 과대망상증 환자 쇼비즘이라고 떠들던 것처럼 우리민족이 대륙의 창대한 역사가 있었음을 증언하는 외국학자들을 환빠라고 집단 정신병자들 이라고 말해 봐라.... " 이 패당 충일(狽黨 忠日) 사학자들아!!!

여러분 우리의 고대사 <한단고기(桓檀古紀)>를 한번 읽어 보시라. <소설 한단고기>도 있다. 松隱, 劉秀. 삼가 添附.

 

이번에는 작가, 연출가, 미술가인 김상수님의 글을 소개한다.

- 국학 연구는 안하고 중화노예사관을 전파하는 한중연은 해체돼야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방물을 고려가 송에 바친 조공물로, 일본이 고려에 바친 조공을 토산물로 날조해 번역.

국사편찬위원회, 고려는 중국에 조공하지도 않았다는데 조공했다고 날조. 이는 조선총독부 식민주의 사관 추종이 만들어낸 역사 참극이다. 고려는 역동적인 해양제국이었고, 대 중국관계에서도 황제국이었다.

고려시대 활달한 문명의 교류는 오늘 코리아’ ‘꼬레로 세계가 명명하고 있듯이 고려시대 때 해외에 나라가 알려졌음을 뜻한다. 고려는 고려청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고려금속활자, 고려불화, 고려인삼 등 문물의 완성과 교류는 왕성했다. 사흘 전 아침이다.

 

강효백 교수

경희대학교 법학대학원 강효백 교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슬프고 분하여 마음이 북받치는비분강개(悲憤慷慨) 하는 목소리였다. “김 선생님, 이럴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나라의 역사학을 전공한다는 사람들은 자기 멸시와 자기 비하에 이렇게 빠져있을 수 있습니까? 1945년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75년이나 흘렀는데도 아직도 잘못 전수된 일본 식민 역사관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자들이 역사 교육을 좌지우지 하니..,

 

국사편찬위원회라는데서 번역한 ‘984년 고려가 사신을 보내 중국에 조공하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고려사> 어디에도 조공이란 글자는 없습니다.

고려라는 나라가 힘없고 무기력한 나라가 아니었잖습니까? 강력한 패권 국가였지요.

 

그런데 그런 고려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고려사> 기록에는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조공(朝貢)이라고 하면 종속국이 종주국에 때를 맞추어 예물을 바치던 일, 또는 그 예물을 말하는데, 고려사 기록에는 조공이란 표기는 아예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산물을 저쪽의 산물과 서로 주고 받은 것이지, ‘바친 것이 아닙니다. 조공도 아니고 방물(方物)이라고 표기했지요.

 

그런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이라는 국책 기관은 방물을 조선 시대에, 명나라에 보내던 우리나라의 산물이라고 해석해 놨습니다. 엉터리이지요. 그러면서 고려가 송나라에 보낸 방물은 '조공'으로, 일본이 고려에 바친 방물은 '토산물'로 번역해 놨습니다. 썩어 문드러진 역사학자들이 일본 식민지 때 해석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본이 고려에 투항하고 귀순하거나 조공을 바친 <고려사>기록 중에 14번의 기록이 나옵니다.

 

고려 황실이 일본에 뭔가를 주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작은 답례물을 하사했지요. 고려가 종주국이었고 일본이 종속국이었지요. <고려사>에는 송, , , , 인도, 사우디등 50여개국에서 '방물'을 고려에 바쳤다는 기록이 323회나 나옵니다. <고려사>를 일본의 식민지 역사관을 이어 받아 국보가 아닌, 지방문화재로 처박아 놓은 세계사 유일의 셀프 역사왜곡 범행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코리아'(Korea)의 어원이 된 고려, 왕조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졌다면 오늘까지 1,100년이 된다. 고려시대 활달한 문명의 교류는 오늘 코리아’ ‘꼬레로 세계가 명명하고 있듯이 고려시대 때 해외에 나라가 알려졌음을 뜻한다.

 

고려는 고려청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고려금속활자, 고려불화, 고려인삼 등 문물의 완성과 교류는 왕성했다. 문물만 오고 간 것이 아니라 인적 교류도 활발했고 다른 민족을 받아들인 사례는 오늘날 한국의 외국인 이주자 이상의 비율을 차지한다. 기록을 보면 당시 인구의 약 9% 가량을 고려 건국 이후 200년간 외국 민족의 이주를 허락했다. 당시 고려 인구 약 210만이었는데 17만 명이 송()나라 한족(漢族) 등 중국 대륙에서 왔다.

 

아시아 남방과 멀리 서역에서도 왔다. 이슬람 계통의 상인들도 왔다. 한국 사회 성씨가 275개쯤 되는데 절반 130개가 귀화 성씨이다. 신라 때 40, 고려시대 60, 조선시대 30개 정도다. 고려시대 보다 조선이 더 패쇄적이었다. 이렇듯 고려는 한국의 역사를 통틀어 요즘말로 하면 가장 국제화 다문화 국가였다. 이런 막강한 문화국가였던 고려에 대하여 일본은 열등감을 지녔던 것이고, 일본이 고려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기록한 <고려사>를 애써서 외면하고자 했고, 숨겨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시기가 끝난지 75년이 지났는데도 일본의 식민 역사관에 매몰된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해방 이후 오늘까지 <고려사>를 지방문화재로 처박아 두고 있는 현실이다. 강 교수는 <고려사>에서 일본이 고려에 조공을 바친 14번의 기록을 이렇게 정리했다.

 

1. 世家 卷第三 99910() 일본인 도요미도 등 20호가 내투(귀순 투항)하여 이천군에 편입시키다. 日本國人道要彌刀等二十戶來投, 處之利川郡, 爲編戶.

 

2. 世家 卷第四 101283() 일본국 번주 35인이 귀순 투항하다. 戊戌 日本國潘多等三十五人來投.

 

3. 世家 卷第七 1056101() 일본국 사신이 금주(김해)까지 와서 조공을 바치다. 冬十月 己酉朔 日本國使正上位權隷滕原, 朝臣賴忠等三十人來, 館于金州.

 

4. 世家 卷第九 107375() 일본인들이 조공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다. 東南海都部署奏, “日本國人王則貞松永年等四十二人來, 請進螺鈿鞍橋鏡匣硯箱櫛書案畵屛香爐弓箭水銀螺甲等物. 壹歧島勾當官, 遣藤井安國等三十三人, 亦請獻方物東宮及諸令公府.”, , “許由海道,...

 

5. 世家 卷第九 107422() 일본국 선장 39명이 조공을 바치다

(甲寅)二十八年 二月 庚午 日本國船頭重利等三十九人來, 獻土物.

 

6. 世家 卷第九 10761015() 일본국 승려 25인이 영광군에 와서 왕의 장수를 비는 불상을 바치겠다는 것을 윤허하다. 戊戌 有司奏, “日本國僧俗二十五人到靈光郡, 告曰, ‘爲祝國王壽, 雕成佛像’, 請赴京以獻.” 制許之.

 

7. 世家 卷第九 1080911() 일본 살마주에서 조공을 바치다. 閏月 庚子 日本國薩摩州遣使, 獻方物

 

8. 世家 卷第九 1082119() 대마도에서 조공을 바치다. 丙戌 日本國對馬島遣使, 獻方物.

 

9. 世家 卷第十 1084620() 일본 상인들이 수은 250여근을 바치다. 戊子 日本國筑前州商客信通等獻水銀二百五十斤.

 

10. 世家 卷第十 1087721() 대마도인들이 조공을 바치다. 庚午 東南道都部署奏, “日本國對馬島元平等四十人來獻眞珠·水銀·寶刀·牛馬.”

 

11. 世家 卷第十 1089819() 일본 상인들이 예물을 바치다. 日本國大宰府商客, 來獻水銀·眞珠·弓箭·刀劒.

 

12. 世家 卷第二十三 1243929() 일본국이 조공을 바치면서 우리 표류민을 귀환시키다. 壬申 金州防禦官報, “日本國獻方物, 又歸我漂風人.

 

13. 列傳 卷第五十 13887() 일본국 국사 등이 조공을 바치고 포로25인을 돌려보내주며 대장경을 달라고 청했다. 日本國使妙葩, 關西省探題源了俊遣人來, 獻方物, 歸被虜二百五十人, 仍求藏經.

 

14. 世家 卷第四十六 1391116() 일본 큐수 번주, 미나모토 료순(源了浚, 원료준)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다. 日本國源了浚遣使來, 獻方物.

 

[참고] 김상수, mukto@naver.com,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참고] 오소운 목사,

http://blog.daum.net/geun1634/category/%E9%9F%93%E5%AD%97%EB%8A%94%20%EC%9A%B0%EB%A6%AC%20%EA%B8%80%EC%9E%90

[참고] 김용섭,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 지식산업사, 2011

[참고] 강효백 교수, 경희대학교 법학대학원

[참고] 20201017일자 <이덕일 역사 TV>,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사 왜곡 공익감사청구 회신”.

https://m.youtube.com/watch?feature=youtu.be&v=l_RkJqIKn-0

[참고] 루이스 헤이, <<나를 치유하는 생각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행복과 긍정의 바이블)>>, 출판사 미래시간, 2014

https://blog.naver.com/nanasung6/222126539780

[참고] 루이스 L. 헤이, <<미러>>, 출판사 센시오, 2019

[참고] 도올 김용옥(2020.10.06.), ‘식민사관으로 우리 역사 보면 안 돼’.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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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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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은래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한국사"
    [발언록 전문] "청나라 시절, 한국의 만주영토 침탈" 공식사과도
    200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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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동북공정> 2차 역사침공에 대해 우리 정부는 "아직 중국정부의 공식입장이 아니다"라는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며 발뺌에 급급하다. 급기야 정부를 감싸던 집권 열린우리당마저 8일 야당들과 함께 정부의 굴종주의 외교를 질타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 '저우언라이 1963년 발언록'

    한심한 것은 2년전 중국의 <동북공정> 1차 침공때 한방에 중국정부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던 주요 문건의 존재를 우리 정부가 까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13억 중국인들이 마오쩌둥(毛澤東)보다 더 존경하는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했던 귀중한 발언록이 그것이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은 당시 중국 베이징대학에 연수중이던 설훈 전 의원이 발굴, <동북공정>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2004년 8월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띠움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됐고, 그후 중국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까지 감히 저우언라이를 부정할 간 큰 중국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공정>과 관련한 중국과의 싸움에서 <저우언라이 문건>은 더없는 전가보도이나, 우리 외교부는 이 문건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은듯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개탄을 낳고 있다.

    저우언라이 "고조선-고구려-발해사는 모두 조선역사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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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한국사 왜곡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당시 북한은 중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체제를 보존할 수 있었고, 그결과 중공의 발언권은 지대했다. 당연히 이를 악용해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고 더 나아가 백두산 등 북한영토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중국 지도부 일각의 국수주의 움직임이 있었다.


    생전의 저우언라이 총리. 그는 대국의 역사침공과 쇼비니즘을 경멸한 거인이었다. ⓒ연합뉴스


    지난 1963년 6월28일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행한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총리는 중국 국수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질타하며 역사침공 행위에 대해 북한에 공식사과했다.

    우선 그는 한-중 고대-중세사와 관련,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며 "이는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며,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였다"며 역사왜곡의 근본책임이 중국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는 구체적 실례로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우선 고조선사와 관련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기도 했는데 이것은 역사왜곡"이라며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이냐"고 고조선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고구려사와 관련해선,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랴오허 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분명 실패한 침략"이라며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 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며 고구려사를 한국역사로 인정했다.

    그는 발해사와 관련해선, "징보(鏡泊)호 부근은 발해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며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민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라며 발해사를 한국고대사의 한 지파로 인정했다.

    청나라 시절 만주영토 침탈에 공식 사과도

    저우언라이는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시절 한국의 조상들이 지배했던 영토가 청나라의 영토 팽창주의로 크게 줄어든 데 대해 공식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는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며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의 영토 침탈을 사과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사과후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재차 중국학자들의 쇼비니즘을 재차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고 역사왜곡 시정을 약속했다.

    한 시대의 거목다운 깨끗한 역사인식이자 사과였다. 그런 면에서 <동북공정> 역사침공을 벌이고 있는 현 중국 지도부는 저우언라이의 표현을 빌면 졸렬한 '쇼비니스트'에 불과하다.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제발 우리 정부가 더이상 '굴종정권'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기를 바라며, <저우언라이 문건' 전문을 싣는다.


    저우언라이 발언록. ⓒ연합뉴스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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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년(1963년) 6월28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의 중조관계는 매우 밀접하며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는데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시기는 중조양국과 두 민족의 역사적 관계이다.

    제2시기는 중국과 조선이 모두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당했을 때이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중국은 부분적인 일본의 식민지를 포함해 제국주의의 반식민지가 됐을 때이다. 이 시기의 중국과 조선은 혁명적 관계였다.

    제3시기는 바로 현재인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형제당'형제국가의 관계이다.

    이 세 시기의 중국'조선 두 나라와 두 당간의 관계에서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역사관계, 민족관계, 혁명관계에 대한 조사연구를 통해 쌍방의 관점과 견해를 완전히 일치시킨 다음 문건과 서적에 모두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 역사학자의 일대 사건이고 응당 해야했던 일이다. 이것은 또한 정치활동을 하는 당 활동가인 우리들이 당연히 노력해야할 방면의 하나이다.

    제1시기는 역사기록 이래로 발굴된 문물에 의해 증명된다. 두 나라,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조선족이 더 오래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부는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족 일부가 원래부터 한반도에서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거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역사기록과 출토된 문물이 이미 증명하고 있다.

    민족의 생활습관으로 볼 때, 남아시아에서 딸려 온 생활습관도 있다. 즉 벼농사, 방에 들어설 때 신발 벗기, 언어발음은 우리나라 광동연해지역 일대의 발음과 조금 가깝기도 하다. 우리나라 광동연해의 일부 주민은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왔다. 이 문제는 역사학자들에게 한층 심도있는 연구를 하도록 남겨두도록 하고 오늘 여기 연설 범위에 포함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도문강,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 조선족이 이미 오랫동안 거주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고 또한 이 지방에 가서 현장조사하고, 비문과 출토문물을 찾고, 역사흔적을 연구하는 것은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들을 돕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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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의 역사발전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토된 문물에서 증거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바로 곽말약(郭沫若) 동지가 주장한 것이다. 서적상의 기록은 환전히 믿을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당시 사람이 쓴 것이지만 관점이 틀렸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은 후대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역사서는 완전히 믿을 수만은 없는 2차 자료일 뿐이다. 당연히 이렇게 긴 역사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문자로 기록된 역사자료도 연구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자료를 연구하려면 중국과 조선 두나라 동지들이 반드시 하나의 공통된 관점을 세워야 한다. 이 관점이란 바로 당시 중국이 여러분들 나라보다 컸고, 문화발전도 조금 더 빨랐기 때문에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당신들을 침략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중국역사학자들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진, 한나라 이후 빈번하게 요하유역을 정벌했는데, 이것은 전쟁이 실패하자 그냥 돌아왔을 뿐이지 분명한 침략이다. 당나라도 전쟁을 치렀고 또 실패했으나 당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 그때, 여러분나라의 훌륭한 한 장군이 우리 침략군을 무찔렀다. 이때 바로 발해가 일어났다. 이후 동북에는 바로 요족(痢), 금족(金族)이 발흥했다. 그때 중국이 맞닥뜨린 문제는 요족과 금족의 중국본토 침입문제였다. 다음은 몽고족이 문제였는데, 원나라도 역시 당신들을 침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조선과 직접 합동작전을 전개했으나 만주족이 매우 빨리 흥기하여 장백산(백두산) 동쪽에서 요하유역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점령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족(漢族)또한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옮겨 거주하게 되었다. 만주족통치자는 당신들을 계속 동쪽으로 밀어냈고 결국 압록강, 도문강 동쪽까지 밀리게 되었다.

    만주족은 중국에 대해 공헌한 바가 있는데 바로 중국땅을 크게 넓힌 것이다. 왕성한 시기에는 지금의 중국땅보다도 더 컸었다. 만주족 이전, 원나라 역시 매우 크게 확장했지만 곧바로 사라졌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한족이 통치한 시기에는 국토가 이렇게 큰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의 흔적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 자신이 읽을 때는 종종 부주의하거나 무시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읽었던 여러 서적을 그대로 접수하는 것은 절대 좋은 일이 아니고, 책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 연극중에 당나라 사람 설인귀가 있는데, 그는 바로 동방을 정벌해 당신들을 침략한 사람이다. 우리 연극에서는 그를 숭배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회주의국가이며 여러분나라도 역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이 다시 상연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이 연극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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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중국에는 베트남을 정벌한 두 영웅 즉 마원과 복파(伏波) 장군이 있다. 베트남의 두 재녀(才女)는 용감하게 항거하다 실패하자 강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는데, 장군은 그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냈다. 나는 베트남에 갔을 때 두 재녀의 사당에 헌화하면서 마원을 비판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마원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그래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고학자들이 문물과 비석같은 유물을 발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적과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들 2,3천년에 걸친 관계를 제 위치에 올려놓은 것이 될 것이다.

    제2시기는 혁명의 시기이다.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고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가 우리를 침략해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가 되었고, 일본은 또다시 동북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아버렸다. 이 시기에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은 혁명적 동지관계를 구축했다. 이 단계의 역사적 사실은 매우 풍부하다.

    큰 단계로 구분해 보면, 10월혁명 이전은 우리나라 구민주주의혁명의 시기였다. 조선 또한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이 때는 갑오전쟁에서 10월혁명까지 20여년의 시기였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은 바로 하얼빈역이었다.

    10월혁명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혁명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두 나라에서는 공산당이 탄생했으며, 그 당시 조선에서 발을 붙일 수 없었던 많은 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왔다. 조선동지들은 중국의 각 지역 어디나 있었지만 동북지방에 가장 많았다. 그리하여 이후 중국혁명의 모든 역사단계에 조선동지가 참가하게 되었다.

    최용건(崔庸健)위원장 말에 의하면, 당시 조선동지들이 중국으로 망명해 와 중국혁명을 성공시키고, 이 성공이 조선혁명을 성공시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랬다고 한다. 10월혁명 초기 조선동지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가서 군사학을 배우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많은 동지들이 중국에 와 군사관련 업무를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남방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운남강무당이 있었다. 이후 손중산 선생이 세운 황포군관학교에 적잖은 조선동지들이 입교하였다. 그 때가 1924-1927년으로 최용건, 양림동지가 당시 교관이었고 많은 동지들이 학생으로서 군사학을 배웠다. 대혁명 때 혁명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하던 날 밤 광주(&#24191;州)에서 폭동이 일어나 많은 조선동지들이 희생되었다. 최용건 위원장은 그 때를 아직도 기억하는 데, 당시 160여명의 조선동지들이 광주 사하(沙河)와 한하(韓何)의 진지를 결사적으로 지켜내다 거의 대부분이 용감하게 희생되었다. 당시 최용건 동지가 지휘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차례 합의를 거쳐 광주의 그 진지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광주열사능원리에 기념관을 건립했다. 중국대혁명 실패 이후 즉 1928년 이후 조선동지들은 중국에서 비밀공작에 많이 투여되었는데, 상해, 동북 등지의 노동운동에 참가하거나 농민운동과 학생은동에 뛰어들었다.

    확실히 10월혁명 초기에는 조선동지들이 이런 혁명사상을 품고 중국에 왔다. 공개투쟁, 비밀투쟁, 정치투쟁, 무장투쟁을 막론하고 모두 참가하여 중국혁명을 도왔다. 중국혁명투쟁이 승리한 이후, 다시 조선혁명 승리를 추동하였다. 1931년 "9.18"포성 이후 상황이 변했다. 조선은 일본식민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동북 역시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는 비록 동북에 괴뢰정부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적일 뿐이고 실제로는 조선과 동북은 모두 아무런 차이도 없는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동북에서 시작한 항일무장투쟁은 조선동지가 중국혁명투쟁에 참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공동투쟁이며 연합투쟁으로 이것은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내가 이번에 새로 얻은 지식이다. 당시 김일성동지 영도하의 항일유격전쟁은 역사적 상황과 우리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연합투쟁이고 공동투쟁이라 인정해야 한다. 동북항일연합군과 같은 경우 당연히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항일연합군으로 해석해야 되고 사실 역시 이와 같다.

    내가 이번에 최용건위원장과 이효순(李孝淳)부위원장 그리고 박외상(朴外相)과 함께 동북 하얼빈, 장춘, 심양 등을 가서 항일혁명의 노전우들과 얘기를 통해 이런 견해를 실증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세가지 노선이 있었는데, 왕명(王明)의 좌경기회주의 노선의 지도아래 소위 당시 중국공산당의 무장투쟁방침은 바로 도시폭동이었다. 그러나 도시에는 역량이 안됐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동시에 농촌무장투쟁도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동북농촌에서 일어난 무장투쟁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조선동지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당시 동북으로 망명한 조선동지들은 농촌에 안착하였기 때문에 농민과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거나 혹은 조선족 거주지역에 살았다. 그래서 농민을 봉기시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가 용이했다. 그리하여 "9.18"에서 항일전쟁 승리 때까지 10여년간 많은 항일부대가 창설되었고 거의 모든 부대에 많은 조선동지들이 있었다.

    현재 이 역사단계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 한다. 항일연합군은 중국과 조선 인민의 연합군이고 기념관은 모두 이 같은 해석에 따른 것이다. 과거처럼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 즉 조선동지가 중국혁명에 참가한 것이며, 더우기 조선동지를 중국의 조선족으로 간주하면서 다수가 조선에서 망명해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정확한 것이며 왜곡이다. 이렇게 조선에서 망명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관점은 혁명대오 중에 나타난 대국쇼비니즘 잔재의 하나이다. 만약 항일전쟁 역사단계를 새롭게 쓰려고 한다면 동북에 참가했던 항일연합군에 대해 --- 북경에도 있지만--- 연구반을 조직하여 어떤 때는 조선에 가서 관련자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제의한다. 반대로 조선동지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공동연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만 역사적 진실성을 회복하고 전체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역사단계 이외도 해방전쟁과 반장개석 투쟁과정에서도 많은 조선족동지를 흡수하여 조선사단을 구성하였는데, 항미원조(抗美援朝) 이후 조선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중국의 해방전쟁에 영웅적으로 참가했고, 이후에 또 항미원조에 참가하여 승리를 이끌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혁명역사 단계에서 쌍방은 서로를 지지한다. 또한 조선동지가 중국동지의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 중국동지가 조선을 지원하는 것보다 많으며 시간 역시 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의의에서 본다면, 혁명박물관과 군사박물관에 진열된 물건들은 아직도 더 보충되어야 하며 수정할 부분이 더 남아있다. 지난번에 최용건위원장을 모시고 동북에 갔을 때, 나는 박물관을 관장하는 동지를 찾아 이미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제3시기는 현재를 말하는데, 우리 모두는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심화단계에 있어 보다 서로를 배우고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요한 때이다.

    역사상 뿐만 아니라 혁명투쟁중에서 쌍방은 이미 제국주의와 현대수정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경험했고 양국은 정확히 인식의 일치와 행동의 일치를 경험했다. 더 적확하게는 피로써 맺어진 전우이자 동지적 우의를 맺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여기고 있는데, 중국의 전선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진영의 동방전초기지로 간주하고 있다. 당신들은 당연히 중국을 당신들의 후방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며 특히 동북은 당신들의 근거리 후방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배우고 있다.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와서 참관하거나 우리들이 여러분들에게 가서 참관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미 매일매일 발전하고 있다. 다만 지금 목전의 일을 보면, 여러분들이 역시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 같다. 방금 우리는 예를 들면서 그들(중국과학원 □□夫원장을 가리키며)을 비판하지 않았느냐? 여러분들은 20여명이 42일 동안 방문했는데, 그들은 겨우 7명만이 조선에 가서 30여일만 머물렀다. 바로 이런면을 여러분에게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 동북국, 동북3성 성위원회가 금년 겨울 참관단을 구성하여 여러분에게 찾아가서 도시공작활동과 농촌활동, 당내 활동, 총노선, 천리마운동, 청산리활동 방법과 대안활동체계를 배울 것을 결정했다.

    우리 동북의 동지들이 여러분들에게 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동북에 사람을 파견해 연락을 직접 취할 수 있다. 평상시에 이렇게 밀접한 연결이 있어야만 일단 일이 발생했을 때 당신들을 우리의 전선으로 간주하고 여러분들도 우리를 여러분의 후방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야만 장벽이 생기지 않고 협조가 원활하지 못한 결함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당 공작활동이나 도시공작, 농촌활동, 공업교통공작 뿐 아니라 여러분의 분화활동 역시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이번에 조선대사관 대사와 이야기를 마쳤는데, 영화공작단을 파견해서 적색선전활동가의 창작경험을 배우고, 농촌에 가서 진정으로 배우고, 이선자(李善子)의 진짜 이름인 이신자(李信子) 방문하고, 청산리에 가서 또한 배우고자 한다. 이런 사본과 영화를 통해서 진정으로 조선인민의 공작을 배우고, 힘들지만 소박한 농촌생활의 작풍과 설득경험 그리고 생산투쟁과 계급투쟁의 경험을 배우고자 한다. 그런후에 연극무대와 은막에 선보이려고 한다. 중국예술가의 소개를 통해 중국인민에게 조선인민의 실제생활과 전투생활을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당신들의 노래와 춤 또한 배울 가치가 있다. 여러분들은 주체사상으로 음습한 기풍을 반대하고 있다. 우리의 춤과 노래는 민족화가 그렇게 강하지 못해 좀 잡다하고 뒤죽박죽인 편이다.

    최용건위원장이 동북의 세 지방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세차례의 만찬을 준비했는데 장춘에서 가장 실패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는데 조선의 풍격같지가 않았다. 또한 "동방홍(東方紅)"을 들어도 서양풍이 너무 강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홍군 춤"이라는 무도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노인과 젊은이가 등장했다. 이를 민속무용으로 알았으나 사실은 발레였다. 젊은 홍군은 여성이었는데 발을 뾰쪽하게 세우는 춤이었으나 이도저도 아니었다. 조선동지들이 보고나서도 반응이 시원잖았고 우리들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진이 원수가 문화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었다.

    조선동지가 매우 솔직하게 우리의 어떤 것들은 주체사상이 없이 동쪽에서 하나 끌어들이고 서쪽에서 하나 가져온 것에 불과하며, 침구나 먹거리 또한 옛것, 새로운 것, 중국 것, 외국 것이 구분되지 못하고 중구난방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지금도 대외문화위원회도 어떤 동지가 있는데, 가지고 나갈 작품에 주체사상이 없어 밖으로 가져가지 않으려고 한다. 많은 동작이 있기는 하지만 주의를 주지 않으면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르면서 좋은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조선양국 문화협정>의정서가 체결됨에 따라 우리는 가무극단을 조선에 파견하려고 한다. 하나는 역사혁명사극으로서 태평천국시대에 상해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이로 <소도회(小刀會)>이다. 여기는 당연히 시대풍격이 있다. 다른 하나는 신화인데 유럽의 신이 아닌 중국의 신으로 역시 풍격이 있다. 우리의 신의 모습은 하느님과도 다르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의 문화예술은 많은 부분이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현재 또하나의 문제는 문자에서 발생하는 간극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다. 나는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황장엽(黃長燁)동지가 이 문제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조선글에는 세 종류의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평양과 서울 그리고 연변이 그것이다.

    평양의 표준은 당연히 전형적인 표준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조선동지 조선인민이 모두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이 이 표준에 따라 말하고 문장을 써야 한다. 평양에도 주음(注音)이 있지만 이미 한자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과거에 인용했던 여러 중국성어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현재 인용하는 조선성어는 민족화되었다.

    서울의 표준은 여전히 한자이다. 남조선은 여전히 한자로 된 책을 읽고 중국성어 인용을 좋아해서 북조선인민이 알아듣지 못한다.

    연변의 표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부 말하는 방법조차 바꿨다는 데 있다. 듣기로는 조선말과 일본말이 말하는 방법에서 상당히 가깝다고 한다. 예를 들면 "我吃□"을 "나는 밥을 가지고 먹는다"고 한다. 연변말은 중국말을 받아들여 변화되어 왔다. 어떤 말은 이렇게 중국말처럼 바뀌었다. 두번째는 일본통치시기에 소위 협화어라는 일본인이 썼던 한자가 복잡하게 섞였기 때문에 연변의 말이 깨끗하지 못하다. 세번째는 보다 많은 것은 많은 중국한자성어를 끌어다 쓰다보니 소리음마저도 중국음으로 발음한다. 이렇게 되어 조선동지들조차도 그들이 하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가 <홍기>라는 잡지를 조선말로 출판해서 평양에 가지고 가면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특히 경제용어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문자 이 문제를 해결해 말하는 것을 알아듣게 해야 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오늘 내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는 것을 제대로 통역했는지 하는 것이다. 역시 여러 동지를 평양에 파견에 심도있게 배우도록 해야겠다. (대외문화위원회 증영(曾瑛)동지를 가리키며)당신들이 연출하는 가무극의 자막은 반드시 평양의 표준적인 사람을 찾아 번역토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제3시기의 관건은 말하고 쓰는데 있다. 배워서 통하지 않으면 손해다. 그래서 먼저 번역대오를 정비해야 한다. 조선동지와 내왕하려면 반드시 평양표준을 따라야 한다.

    여러분은 이번에 자연과학을 참관했는데 대략 적잖은 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다. 자연과학 자체는 계급성이 없다. 다만 우리들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연과학을 대하는 태도와, 여러분을 접대하는 일 그리고 유람과정에서 여러분은 우리가 대국쇼비니즘 잔재가 남아있는지 여부를 살피도록 해 주었다. 생활, 문화오락에 주체가 조금 없이 표현된 점이나 말이 평양표준에 맞지 않는 것 등은 아마도 다음에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만 대국쇼비니즘이 없기를 바라지만 개별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서는 이를 면하기 어려움도 있다. 여러분이 다음에 다시 방문하여 서로 비교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태견 기자

    http://www.viewsnnews.com/article?q=6188&fbclid=IwAR3nbydxiJyF5BljpMaCDm56OyZVj_DBrJGkJ99x59qI5UqYiu6fk1mpe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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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호

    10월 28일 오전 9:28  · 

    아는것이 힘 이라고 부역망국에선 웃기는소리다 
    아는것은 죄이다
    도덕도 상식도 정의도 양심도 통하지 않는곳에서는 오직 힘 을 키워 깨부수는것
    아니면 사육장의 개 돼지처럼 매귝적폐들이 주도하는 강압된 힘에의해 처먹처먹 그냥 사는것 
    두 길 뿐이다
    송명사대부역 친일 친미의 적폐 교단사학이  버젖이 교육하는 한사군 한반도설 기자조선 한반도 은혜로운 천자의 조선총독설은 1960년초 북경대에서 중국보수 고힐강교수를 깨고 
    형제조선의 리진린학도의 한반도 요동설이 논문으로 통과되며 국제적인
    한반도 요동설이 서게된다
    정통 진보역사가 국내 윤내현교수는 중국마저 인정한 한사군 요동설을 국내에 소개한다
    매국적폐 교단사학은 윤내현교수를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고발한다
    정말 ㄱ같은 나라 아닌가?
    이나라에선 정말 진실을 아는건 죄가된다
    뼈저리게 몸소 체헝 하고있다
    화독으로 전북김제만경에 내려온지 한달
    살을 찢고 나오는 아픔속에서
    전북지역 진보 향토사학자들과 의병사를 엡툰 영화로 만들기위해 의병 수묵화 전시회등을 통해 2세 창작영상지도자교육을 기획진행하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성군 정조대왕께서 자주적 화법을 도화서화원에 김홍도에 지시한 일필백묘의 우리풍속화의 기법 
    프랑스 파리를 시작으로 유럽10개국으로 투어하며  천손민족의 자긍심과 높은 문화의 힘을 알리려 
    국제적 통일문화종합예술인 프랑스협회의 조아화백과 진행추진중이다
    화독의 아픔보다
    나를 더욱더 고통스럽게 하는것은
    이나라의 부역적폐가 주도하는 썩어문들어진 한반도의 정신이다
    어디까지 이룰진 모르겠으나 하늘에 맞기고 오늘도 진인사 대천명의 마음으로 
    조아화백을 만나러 경남통영에
    통영의 진보동지들을 만나러 어머님 모시고 8백리길을 달려간다 
    하늘이 위대한 이나라의 선조들이 이 민족을 도우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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